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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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없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 그것 때문이었다.
오래도록 내가 쓰고 싶었고,
오래도록 내 목을 메이게 했으나 구성할 수 없었던 이야기. 혹은 구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
내게 김훈의 장편은 낯선 것이지만, 뜻밖의 '작가의 말'인 그의 자기혐오나 좌절은 너무도 절실히 이해된다.
주제 넘게도 감히 나는 그렇다고 느낀다. 

나는 홍보 담당자였고, 그는 기자였다.
그때의 기억과 상처가 나를 사실과 진실, 또는 정보와 뉴스에 대해 고민하게 했듯 그도 그러했을 게다.
나는 종종 사실을 가공해 보도자료로 만들어 그것만이 진실인 양 매체를 설득해야 했고,
기자인 그는 떄로 그렇게 가공된 보도자료로 기사를 썼을 테다.
그리고 그가 쓴 기사의 최종고를 손 보는 건 그가 아니었을 게다.
내가 쓴 보도자료도, 그가 쓴 기사도 
사실이라는 미명 하에 마음과 다른 이야기가 활자화됐을 테고
그걸 접하는 이들은 그 이면에 숨은 무수한 이야기들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 활자화된 이야기는 나같은 아이나 그같은 이들의 고민이나 망설임 혹은 먹먹한데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감정 따위는 담지 않은 단호한 사실이 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됐을테니까. 
그러니 나는 감히 그를 이해한다 말한다. 
그리고 소설의 감동이나 공감과는 별개로 사실과 진실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묶은 그가 부럽다.  
내가 홍보를 한 것은 고작 4년, 더하기 드문드문한 시간이지만 그의 기자생활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나의 영역은 고작 의료와 공연 혹은 문화 였지만 그의 문화부와 사회부를 두루 거쳤다 했다.
그러니 그의 좌절은 나의 것보다 깊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상처는 나의 것보다 훨씬 크고 너덜거릴 것이다. 

그가 기자 출신이 아니라면,
이 소설이 사실과 진실 이야기라는 출판사 평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저자 후기를 '때때로 문인 혹은 문청에게 나타나는 염세적 허울 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염세와 허울, 이라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단어와
병이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주는 부조화가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작명만큼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늘 저 병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나는 그의 자기혐오를 너무 절절이 이해한다.
우습지만, '고작 내깟게 어떻게...' 라고 나를 내려다보며 뇌까리다가도 그냥 한순간 확 이해되고 만다.
아마도, 나는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말에 더 깊이 공감했는지 모른다.
가끔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그 공감의 폭과 정서는 여느 때와 다르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이나 마음은 보도자료에 담을 수 있는 확연한 사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니까. 

이 초조한 와중에 놓지 않고 읽었건만...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다.
내가 종종 되새기는 '공무도하가'의 그 슬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의 공무도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간 너머로>라는 책처럼,
노목희가 그린 낙타 그림처럼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건너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과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어느새 그렇게 흘러와 버린 이들.
그렇다고 그들이 게으르거나 인생을 방치한 것도 아닌데
흘러와 보니 그렇게 넘어와 버린 이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나의 공무도하... 인지도 모른다. 슬프다.  

 

><공무도하> 김훈, 문학동네, 2009. 9  


그의 문체는 순했고, 정서의 골격을 이루는 사실의 바탕이 튼튼했고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의 시야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의문을 과장해서 극한으로 밀고 나가지 않았고 서둘러 의문에 답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자의 투시력이 있었다.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아무것도 결론지으려 하지 않으면서 긍정이나 부정,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가 보여주는 모든 폐허 속의 빛은 언제나 현재의 빛이었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초로의 여행자는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였고 내부자인 동시에 외부자였으며, 인간이 겪은 시간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26-27

노목희는 때때로 장철수의 옷소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 안쓰러움은 투항이나 탈출 혹은 생포되기를 예비하는 자의 조바심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것을 노목희는 장철수가 검거된 후에 알았다.   36

토요일 야외수업 때 노목희는 아이들을, 이제는 무너져버린 저수지 뚝방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무는 해가 능선을 스치면서 내려앉는 저녁 무렵에, 수면에서 명멸하는 빛과 색들의 변화를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우는 해에 끌리는 쪽으로 빛들은 떼지어 소멸했고 소멸의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서 신생과 소멸을 잇대어가며 그것들은 어두워졌다. 물 위로 뛰어오른 작은 물고기들이 다시 물에 잠기는 그 짧은 동안에, 물고기 비늘과 눈알에서 밝은 색으로 태어났다. 시간이 빛과 색을 가장자리 산그늘 쪽으로 끌어당겼고, 빛이 저무는 시간과 합쳐지면서 푸른 저녁이 수면 위로 퍼졌고, 색들이 그 위에 실려서 흘렀다. 산그늘에 덮여서 빛이 물러서는 가장자리 수면에서 색들은 잠들었고, 바람은 수면을 스칠 때 물의 주름 사이에서 튕기는 빛이 잠든 색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두운 수면에서 빛들은 무슨 색으로 잠드는 것인지 바람에 흔들려 다시 꺠어나는 색은 잠들기 전의 색이 아니었다. 부서져서 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그것들을 빛 또는 색이라고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다시 부서지거나 새로 태어나서 말 너머에서 명멸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짧고, 정처없었다.    

미대 서양화과에서 노목희의 실기점수는 늘 B학점을 넘지 못했다. 붓으로 기름물감을 찍어서 캔버스에 바를 때, 붓 끝에서 손목으로 와 닿는 물감의 유성이 노목희는 낯설었다. 붓이 물감을 밀고 나갈 때, 몸과 물감 사이의 저항은 뻑뻑한 이물감으로 팔에 감겼다. 그 저항을 뚫고 나가면 한바탕 색의 세상을 펼쳐낼 수 있을 터인데, 다가오려는 것들 앞에서 노목희는 자주 망설이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목희의 화폭은 주저의 흔적으로 남루했다. 실패한 화가인, 늙은 지도교수는 말했다.
......넌 왜 덤벼들지를 못하니? 뭘 그렇게 쭈빗거려. 힘을 줘서 밀어내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노목희의 화폭은 주저의 흔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도청소재지에서 열리는 서양화 공모전에서 노목희는 낙선했다. 이 세상의 색들은 빨강, 파랑, 노랑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빨강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노랑으로 검정에서 흰색으로 흰색에서 검정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흐름의 진행태였고 거기에는 지나간 시간의 훈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팔레트를 열고 나이프로 색을 으깨서 섞을 때 노목희는 그 흐름에 실려서 흔들렸다. 나이프 끝에서 색들은 피어나서 들끓었다. 저무는 해가 능선 아래로 깊이 기울어서 수면에 아무런 색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노목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수지 뚝방을 내려왔다. 거기가 창야였다.    41-43

조사단장의 브피핑이 끝나고 질의답변 자리가 마련되었다. <파이스턴 데일리 리뷰>지의 여기자가 물었다.
- 환경변이가 폭격훈련과 무고나하다는 결론인가?
조사단의 관계분석팀장이 답변했다.
- 여러 가지 변이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인과관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다.
한국매일신문의 문정수 기자가 물었다.
- 증명되지 않으면 부재하는 것인가?
분석팀장이 답변했다.
- 부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부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도 또한 아니다. 존재와 증명 사이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다는 전제도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증명되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긍정할 수 없는 것이 과학의 고충이다. 이해를 바란다.
기자석 뒷자리에서 <아시안 위클리> 기자가 발언권도 없이 말했다.
- 말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럼 조사는 왜 했나?
조사단장이 답변했다.
- 쉬운 말은 아니다. 오늘 회견은 여기까지다.    53-54

그에게서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의 체취와 비슷한, 몸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사람의 몸속에서 절여지면 이런 냄새가 날 것이라고 노목희는 생각했다. 그의 체격과 골상은 동양인이었지만 그는 어느 대륙이나 어느 나라 사람 같지는 않았고, 그의 나라는 몸에 깊이 절여진 그의 체취 속으로 펼쳐쳐 있는 것처럼 노목희는 느꼈다.    91

국물을 마셔, 튀김이 좀 딱딱해, 만든 지 오래된 것 같아, 라는 노목희의 말의 그 사소함과 명료함이 문정수는 문득 슬픔으로 느껴졌다. 슬픔은 난데없고 가늘고 날카로웠다. ...124-125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느 ㄴ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받가을 문정수는 때때로 노목희에게 말해주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에, 혹은 자정이 지나서 날짜가 바뀐 새벽에, 그 이야기는 지체없이 전해야 할 전보처럼 다급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전하는 먼지와 불길과 냄새는 노목희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듯 싶었다.   125-126 

- 그게 더 아쌀해. 아는 놈이 한 놈도 없는 동네가 좋아. 그런 데서 살면 손바닥 악력이 금세 는다. 넌 그런 데로 가야 해.   

최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철수는 손바닥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아무것도 거기까지 따라오지 않기를 장철수는 바랐다.     167

젓가락으로 김치를 마주 잡고 찢어 먹는 하찮음이 쌓여서 생활을 이루느 ㄴ것인가. 그 하찮음의 바탕 위에서만 생활은 영위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소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의의 들판으로 생활은 전개되는 것인가. 그 사소함이 견딜 수 벗이 안쓰럽고 그 적의가 두려워서 나는 생활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렇게 쭈빗거리고 있는 것일까......    218

문정수의 말은 듣는 사람이 없어도 무방할 듯 싶었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버린 세상에 관하여 문정수가 더듬거리며 말할 때 노목희는 가끔씩, 그랬겠구나...... 잘했어...... 내버려둬......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고 응답해주었다. 노목희의 응답은 추인이거나 달램처럼 들렸다.
저 남자는 어째서 저런 하나 마나 한 말을 저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저런 말을 하려고,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가? 괜찮아..... 내버려둬..... 이런 대답이 필요해서 이밤중에 저렇게 힘들게 더듬거리고 있는 것인가.
노목희는 무릎을 두 팔로 싸안고 앉아서 문정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목희가 하푸을 하면서, 안 졸려? 라고 물어도 문정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정수의 말은 듣는 사람이 없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듣고서 잘했어, 내버려둬...... 라고 응답해주지 않으면 울음으로 변해버릴 말처럼 들렸다. 문정수의 어조는 무력했으나, 그 무력감 속에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이 숨어 있었다.    218-219

- 불쌍하구나, 다들. 하지만 너하고 관련 없는 사람들 아냐?
-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해. 막막하고.
- 내버려둬. 그냥 내버려두는 게 가장 옳을 거야.
- 내버려두지 않을 수도 없어. 차장은 막 욕을 하더군.
- 누굴 욕해? 방천석을?
- 몰라. 그게 그 사람 버릇이야. 대상이 누군지도 모를 욕을 늘 해대지.
- 욕이 아닐 거야. 신음이겠지.    220-221

횟집마을로 넘어오는 비포장 오르막에서 장철수의 손수레는 뒤로 밀렸다. 장철수의 두 다리가 힘을 잃고 뒤로 끌렸다. 장철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두 다리가 힘을 잃는 순간, 장철수는 땅의 중력에서 풀려나 주저앉거나 바람에 불려갈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무력감은 가벼움이었다. 두 다리가 힘을 잃는 순간, 끌고 온 무게가 소멸했고, 뒤로 끌리는 몸이 소멸하는 무게 속으로 빨려들었다. 아마도 죽음의 질감이 이러할 것이라고 장철수는 생각했다.   239

 해망은 그들의 고향이며 객지였다. 공유수면이 매립되기 전, 펄에서 조개 잡고 어선들이 마을 앞 선착장까지 들어오던 시절은 몸은 고단했어도 마을은 화목하고 마음은 편했고 생활도 지금보다 넉넉했다고 그들은 사회조사원들이나 방송 기자들에게 말했다.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삶이 건강했고 평화롭고 충만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말의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더 큰 거짓이 작은 거짓을 눌렀다. 그들의 말 속에서 방조제 이전의 삶은 늘 평화롭고 충만했다. 그래서 매립으로 잃어버린 그 평화와 충만을 보상액수에 모두 포함시켜서, 그들은 펄에 코를 박고 살아온 해망의 갯가를 떠나려 하고 있었는데, 액수가 커질수록 소송은 지연되었고, 소송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이제 두어 마리 남은 철새처럼 해망의 갯가에서 서성거렸다. 횟집 주인들은 그 엉거주춤을 스스로 '보상병'이라고 불렀다. 보상병이 깊어지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들떠서, 낮에는 뭍으로 밤에는 펄로 헤맨다고 그르은 술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횟집 주인들이 바다사자 주위에 모여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다사자는 뒤채고 부딪치고 뛰어올랐다.   241

- 고마워. 내가 다 갚을게. 잘 풀리고 있잖냐.
문정수가 너 신장 얼마 줬니? 라고 말하려던 순간, 박올출이 먼저 말했다.
- 야, 장기매매 같은 건 기사 쓰지 마. 내가 다 갚을게. 넌 쓴 기사보다 안 쓴 기사가 더 좋다. 그게 더 진실돼. 안 그래?
문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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