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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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감기 몸살로 끙끙 앓은 탓에 지난주 중 며칠을 아예 절절 끓는 전기장판 위에서 보냈고 덕분에 미뤄두기만 했던 소설 하나를 끝냈다. 아아, 역시 고전의 힘이란! 그동안 나는 왜 그리도 책읽기를, 특히 고전을 등한시하고 외면했을까. 마지막쪽까지 다 읽고 양장본의 두툼한 표지를 덮기 전, 남은 몇 장의 종이가 팔락거리면서 옮긴이 약력과 책 가격이 표시된 부분이 보였다. 책의 가격은 무려.. 그러니까 36권 전집의 가격은 무려.. 그러니까 엄마가 고등학교 때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었으니까.. 그때 가격으로 무려.. 물론 컨텐츠나 번역의 질이나 종이의 질이나 꼼꼼한 작가연보며 에피소드까지 제 값을 톡톡히 하는 책이지만, 그게 지금 돈으로 따져보아도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닌데 무려 10년 전에 할부로 책을 들여놓았을 엄마의 정성을 생각하니 학부 때 숙제 때문에 깨작깨작 단편 몇개 읽은 것 빼고는 장편을 제대로 읽은 것이 처음이라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러나 죄송함은 곧 엄마의 재치있는 살림 솜씨 덕에 곧 꼬리를 내렸다^^ 출판사 다니는 친구의 권유로 산 무슨 쥬니어 어쩌구 문학전집을 우리가 손도 안 대서 속상하던 찰나, 마침 이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문학전집을 안보는 전집과 바꿔준다고 하기에 바꿨다는 것. 물론 권수는 예전 책이 더 많았으나 겉보기부터 훨씬 뽀대나 보이는데다 엄마에게도 익숙함직한 작가이름이며 작품제목들도 있고 해서, 우리들도 읽고 엄마도 읽을라고 들여놓았다는. 하하. 그런데 너무 두껍고 특히 뽀대난다고 여겼던 표지 때문에 꽤나 무거워 엄마도 읽지 않았다는. 하하하.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긴 여정, 말 그대로 산 넘어 물 건너 죽자사자 달려가는 그 길에서 어머니가 지친 심경을 톰에게 토로한다. 묵묵히 가족들 단속하며 보듬으며 가족을 지탱해 온, 진짜 가족의 대들보요 울타리인 어머니마저 지쳐 톰에게 하루하루가 버겁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두려워 더 힘이 든다고 말한다. 톰은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감옥시절을 얘기한다.

내일, 또 내일, 내일의 또 내일, 그렇게 앞 날을 생각하고 걱정하다보면 감옥에서는 버티지 못한다고. 신참들은 도대체 얼마나 지나야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한참 후 감옥에서 나가면 또 어떻게 살아갈까를 생각하다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벽에 짓찧고 자해를 하기 일쑤이지만 한참을 감옥에서 보낸 선배들은 그저 묵묵히 하루를 살아간다고. 오늘은 오늘 하루, 내일이 되면 또 다시 그 하루만 할 일 해가며 때 되면 밥 먹어가면 그렇게 산다고.

어머니는 톰의 그 말에 힘을 얻고 어이구, 장한 내 새끼 한다. 톰은 여러 번 반복해서 그저 내딛는 한 발, 또 한 발. 자신은 그것밖에 모르노라고 말한다.

그저 나는 한 발을 앞으로 디디고 나면 또 한 발을 내딛는 것 밖에 몰라.

삼촌에게, 가족에게, 그의 소명을 찾아준 짐 케이시에게 반복해서 오직 한 걸음밖에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게 묵묵히 한발씩 걷던 톰이 마침내 죽은 짐을 대신해 그리스도가 되기로(빈민, 노동자, 약자와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그 결심을 말할 때의 그 전율. 멋진 톰은 더 떠난 후 더 이상 소설에 등장하지 않지만 톰을 좇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가족들. 심지어 가장 약하고 사서 걱정을 했던 누이마저 죽은 아기 대신 아직 살아있는 노인에게 젖을 물리기로 결심하는 그 마지막 장면.

 

진짜 소설이란 무엇인지!

헛꿈에 지쳐 감기조차 키워가던 나를 치유한 것은 다름아닌 존 스타인벡이었다.


2005.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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