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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 프로 소설가다."
그의 자의식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인정!
그는 정말 프로 소설가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의 엄혹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작가이다.
홍보든 경제든 영화든, 누군가는 프로라고 자임하기 위해 고민하고 땀 흘리고 치이면서도 달리고 짐 지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프로 소설가가 되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독서편력, 자랑이 아니라 드러냄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저 그의 단편만 읽을 때는 '책 많이 읽는 작가구나' '시야가 넓은 작가구나'싶었는데, 그는 이야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탐하다 연애를 하게 되는 나와 정민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이야기, 그 시절 젊은이의 이야기, 작가의 이야기, 독자의 이야기까지 끝없이 다른 이야기를 물고 들어오게 한다.
고전을 읽다보면 그 촘촘한 이야기에 빠져들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들이 생각나서, 나도 말을 하고 싶어서, 나도 쓰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게 내가 고전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다짐하는 이유인데 이 책이 그렇다. 누군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자신보다 세상에 더 해박하다고 느낄 때 뒤통수 맞은 느낌이라며 이 책을 소개했는데, 작가보다 나이가 많은 이라면 그렇게 느낄 만하다. 이야기에서, 사진에서, 시대의 편린에서 보편적인 세상사의 굴곡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모두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역시 운명과 사랑과 배신과 복수와 좌절과 슬픔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가면 풍경은 달라지지만, 역시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비슷하다.
작가로서 진심으로 바라는 일은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정말 많은 얘기를 들려주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이 다시 내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다 이루었도다!! 저 짧은 작가의 말이 그의 바람이라면 그는 정말이지 다 이루었다. 나 혼자 감탄하고 나 혼자 흥분한 건 분명 아닐 게다. 수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머릿 속에서 둥둥 떠나녔을 것이다. 작가의 문장 행간 사이사이에서 내 이야기들은 주책맞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눌러둔 탓에 더 튕겨나온건지도, 아무려나 참지 못하고 책 날개에 급하게 끄적인 것 역시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흥분은 내게도 이야기를 그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끊길까봐 살짝 초조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멈추면 친밀함도 휘발된다는 걸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문학 전공이라 그런지, 잦다 못해 자연스러울 지경인 수동태와 대과거. '이야기의 힘이 이리도 도저할진대 문법이 대체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감기 핑계대고 며칠 침대 붙박이로 있는 동안, '소설 책과 사전, 연필만 있으면 나는 참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책이 아니라 아마 이 이야기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2007. 11. 16-1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것은 그게 제아무리 괴기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를 미치게 만들지는 않아. (27, 정민)
...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 나는 고립된 사람들에게 현실이 한순간 뒤흔들리면서 그보다 더 생생한 환상이 나타나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 떠들어댔다.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공기중으로 휘발되는 알코올처럼 내 안에 들어 있던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으므로, (41-43)
개인적인 모든것은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욕망이기에, 그러니까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지극히 내밀한 욕망이기에, 나는 거기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윽고 나는 그게 사창가에서 드러나는 욕망과 달리 나만의 사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덫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엘레나가 된 순희를 향한 욕망은 연민의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으로 포장됐으므로 도덕적이고 공적인 것이었다. 도덕적이고 공적이라는 말은 그런 욕망을 지닌 우리들이 그 욕망의 대상들보다 사회적 위치가 높다는 사실을 뜻했다. 실제로 도덕적으로 욕말할 때도 그랬지만, 도덕적으로 욕망한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는 스스로 뭔가를 희생하고 있다고 믿었고, 뭔가를 희생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 그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내게 느닷없이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 어떤 희생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너무나 사적인 욕망이 자리잡았으므로 나는 당연하게도 그 욕망을 부도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백히 부도덕한 모든 것들은 인간의 무의식을 점령하고 거기서 떠나지 않는다. (53-54)
아마도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 그건 완전한 해방의 느낌 그 자체였으므로 나는 우리에게 다가와 "그런 식이라면 너희들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중년 남자의 두려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해방은 두려울 정도로 요염한 쾌감과 연결돼 있었다. 중년 남자의 말은 옳았다. 완전한 해방이란 사적인 쾌감과 관계된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55-56)
문제는 그게 연인이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인류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고, 또 그러므로 이 우주는 유할할 수밖에 없다. (64-65)
그 순간 정민이 왜 그 이야기를 떠올렸고, 또 내게 들려주려고 마음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야기는 씨앗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뿌려졌다. 그 씨앗이 과연 어떻게 싹을 틔울지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94)
그건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였다.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 그걸 가리켜 현실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102)
우리는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과 연결되는 거야. (110, 정민)
객지생활은 자기가 하는 것 같아도 밥이 하는 거니까. (119, 식당아줌마)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너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짐을 꾸려 떠나보내라.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그제야 나는 그즈음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23)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들 천지였다. (143)
... 저 별이 베가니까 직녀별일 테고, 저 별이 알타이르니까 견우별이겠구나. 어떻게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 멀리 떨어진 두 별이 서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때도 세상은 서로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걸까? 아무리 외로워도 여름밤이면 다들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가 됐겠네. 저렇게 멀리 떨어진 별들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서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았겠다. 그지? 고개만 들면 거기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별들이 보였을 테니까. (144, 정민)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보호색을 지녀 자기를 감추는데, 발딧불이는 왜 그렇게 환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걸까?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먼 지구까지 빛을 보내는 저 별들처럼 반딧불이들도 고독한 걸까?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 연결되려고 보호색 따위는 기꺼이 던져버린 것일까?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148, 정민)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주에서 정민과 나란히 누워 바라본 밤하늘처럼 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 해 여름 헬무트 베르크에게 들은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몇 번ㅇ르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150-151)
동틀 무렵의 희미한 여명 속에서 흐릿한 풍경을 골똘히 바라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는 또한 모든 것이 제가끔 의미를 지닌다. 할아버지의 시구절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내가 바라보던 담 광장 주변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면서 모든 것이 내게 중요한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155)
트라벤은 [트로차]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썼어. '누군가 경찰 조서에서, 재판의 판결문에서, 감옥의 수인 명단에서 자신의 본명을 발견한다면, 그는 잘 알려진 이름 대신에 가명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조서에서, 판결문에서, 수인 명단에서 발견되는 그 이름이란 바로 죽음의 이름이지. 그러니까 새로운 삶을, 새로운 현실을,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망명이란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 잔인한 현실을 꿈으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야. ... 때로 현실은 견디기 어려운 정도여서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나으니까. (163-164, 베르크씨, 정교수)
밤이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날개를 폈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환상. 매일 밤 태어났다가 매일 아침 소멸하는 것. (167, 오페라 <투란도트>의 희망 정의)
베르크씨의 집에 머물면서 서울의 지시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 불안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갑자기 짐을 싸서 평양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내일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지 나는 깨달았다. (170)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의 세계란? 패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일 뿐, 운명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니 꿈처럼 지나가는 비극의 삶에서 살아남겠다면 먼저 웃으라는, 쓸쓸한 목관과 유머러스한 현악의 전언. 그 순간 베르크 씨는 차이코프스키가 그 교향곡을 작곡한 이래, 인류가 그 곡을 어떤 식으로 들었건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므로 다음에 올 인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곡을 새롭게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폐허가 됐고 베를린에는 물도, 가스도, 전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었다. 왜냐하면 삶이 본질적으로 역설이니까. (220)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나지만, 결국 또 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 (227, 베르크씨)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 역시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에서 도피하고자 했다. 더 깊이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그는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서 위악을 선택했다. (250-251)
상향등 불빛이 길게 뻗은 길 저편까지 뻗어나갔다. 풍경은 그 둥근 불빛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게 꿈결처럼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게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리라는 걸 그는 알아차렸다. 젖 떼는 법을 배우는 강아지처럼, 이제 거기서 나오게 되면 다시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걸. (252)
자, 눈을 감아봐. 그리고 가만히 느껴봐. 그 막막한 어둠이며, 계속해서 들려우는 파도소리며,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마치 지금 막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들을 느끼듯이. ... 지금 네가 느끼는 그 세상이 바로 너만의 세상이야. 그게 설사 두려움이라고 하더라도 네 것이라면 온전히 다 받아들이란 말이야. 더이상 다른 사람을 흉내내면서 살아가지 말고. (254, 상희가 이길용에게)
... 나중에 편집하려고 보니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느꼈던 고민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 다큐멘터리 역시 어디에서 상영되든 역사를 풍경으로 만드는 동시에 관객들을 소외시킬 게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파업을 하는 것이지, 파업을 지켜보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275, 서진수의 유학 동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엇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그런데도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구요. (328, 내가 이길용 혹은 강시우에게)
이유 없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그리워서 외로움에 시달리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 그리움의 본질은 온기의 결여였다. (368)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 저녁이에요. 동쪽 하늘은 파랗고 거기로 별이 떠올라요. 하지만 서쪽을 보면, 아직 빛이 남아있는 거죠. 요즘 베를린의 밤처럼 말이에요. 밤이 깊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빛. 모든 게 끝이 난다고 해도 인생은 조금 더 계속되리라는 그런 느낌."
"해진 티셔츠, 낡은 잡지, 손때 묻은 만년필, 칠이 벗겨진 담배 케이스, 군데군데 사진이 뜯긴 흔적이 남은 사진첩,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사물들 속에 깃들지. 우리가 한번 손으로 만질 때마다 사물들은 예전과 다른 것으로 바뀌지. 우리가 없어져도 그 사물들은 남는 거야. 사라진 우리를 대신해서. 네가 방금 들은 피아노 선율은 그 동안 안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곡이 됐어. 그 선율이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라. 그건 결국 늦게 배달되는 편지와 같은 거지. 산 뒤에 표에 적힌 출발시간을 보고 나서야 그 기차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기차표처럼. 안나가 보내는 편지는 그런 뜻이었어.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377-378, 나/베르크씨)
"그렇게 하면 그게 내가 살아온 삶이 되는 걸까요?"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384)
어쩌면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도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은 더없이 중요했다. 나는 어느 날 하눅에 있던 정민에게 편지를 쓰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발견했다. 편지의 끝에 나는 서로 체온의 힘을 믿었던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이 아샤 라시스에게 읽어준 주름살에 관한 문장을 옮겨적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 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 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 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 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틍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다. 학설이 옳다면, 우리는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39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