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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우리 모두가 바리."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메모했다. 뭔가 할 말 또 한가득인데 정리가 안 됐거나 정리하기 싫었던 게다. 그렇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자'로서의 바리에 주목한 것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도 나오지만 세계체제 이후 적응하지 못한, 버림받은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의 얼굴이 '바리'입니다."(창비 2007 가을호, 251)라고 말한 작가의 창작 의도에 정통하게 읽어버린 셈이다.
재미있었지만, 뭐 그리 신나지는 않았다. 나는 아마도 '고통당한 고통의 치유자, 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 바리가 보다 더 스펙터클하기를 바랐나보다. 좌중을 압도하는 굿판의 무당처럼 바리의 생도 그러기를, 그렇게 강한 모습만 보여주기를 바랐나보다. 현대의 샤먼 바리는 한없이 여리다. 가도가도 고난의 행군, 안정됐다 싶으면 떠나야 하고 안온하다 싶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또 죽어야 한다. 카타르시스가 없다. 아마 그래서 신나지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게 현실일 게다. 바로 지금 여기, 살아가는 모양새. 개인적으로는 [심청]이, 그보다는 [오래된 정원]이 훨씬 더 좋지만... 아마 [바리데기]가 전작들보다 훨씬 단단하고 냉정한 작품일 게다.
<별순검>과 [퀴즈쇼] [바리데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까지 거치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건지 명확하게 알겠다. 아마도 내가 문학에 바라는 건 치유. 그리고 생의 의미를 간파할 해박한 지식.
문제는 여전히 깜냥이 안 된다는 것. 더 큰 문제는 여전히 덤비지도 못한다는 것. 미망이라면 이제 그만 좀 덮어버려라!
> 바리 혹은 황석영
[바리데기]
어디 갈라구, 혼나야 돼. 멍텅구리.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나는 화가 치민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까지 겪은 일만 해도 서럽다거나 진저리가 난다거나 아무런 원망의 말과 불평도 없이 수걱수걱 당하기만 해왔는데, 참으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까막까치는 부리를 벌리고 깔깔 웃더니 또 이랬다.
생명수 가져올래문 넌 아직 멀었지. 세상에 산 것들 고생 많아, 고생 많아.
나는 화를 꾹 참고 까막까치에게 물었다.
서천 가는 길을 가르쳐다구.
따라와, 따라와.
고것이 날개를 펴고 가지 끝에서 날아오르더니 내 머리 위를 몇번 빙빙 돌고 나서, 그대로 거대한 나무둥치를 향하여 머리를 처박을 듯이 곧장 날아갔다. 잘코사니야, 넌 이제 대가리가 깨어져 죽었다. 그런데 나무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리며 동굴 같은 입구가 나타났다. 까막까치는 그 안으로 날아가버렸는지 자취가 간데없다. 컴컴한 입구 안으로 발ㅇ르 내밀자 나는 빨려들듯이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밑바닥에 내려서자 천장이 까마득하게 하늘 꼭대기에 보이고 길이 동서남북중 다섯 갈래로 나 있다. 길 한복판에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은 사자가 쥘부채를 두 손에 꼭 쥐고 섰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소리였는데 그가 먼저 물어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131-132)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223)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자기가 풀어야 하는 거야. 에밀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243)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것을 샹이 건드렸을 뿐, 그것은 먼 길을 거쳐오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된다. ...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에요? 믿고 의지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게 그 본성이다. 색도 모양도 웃음도 눈물도 잠도 망각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우리에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우여곡절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란다. 어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 아내와 딸들이 총살당하고 잠무카슈미르를 떠나면서 나는 너와 똑같이 신을 원망했다. 어째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262-263)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283)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286)
"한국문학은 살아있다" 소설가 황석영과의 대화, 창비 2007 가을호
황 ... 쫓겨났다고 생각하면서 중심부에 안 들어가는 거죠. 중심부에 들어가면 내가 못 견디거든요. 그러니 늘 바깥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서 저 안을 그리워하고. 어떤 친구가 자칭 경계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경계인이에요. 늘 소속되지 않은 자의 그런 자유와 억압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요. (242-243)
언젠가 이문구의 소설을 대학에서 읽혔더니 '오히려 포스트모던'하게 받아들이더라는 누군가의 농담이 생각나는군요. [돈 끼호떼]가 요즘 새삼 기억되는 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되던 당시에 고전을 형식적으로 패러디했던 관점이 획기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하나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 한국은 언어와 문화가 마이너리틴데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까요? 전혀 예측 못하는 방향으로, 저들이 여태까지 고수해왔던 소설적 서술이나 방법론, 이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자기 스타일이지요. ... 서사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것에 걸맞게 서사의 형식, 그것을 엮어내는 방법론, 이런 걸 잘 형성해내면 내 문학이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지요. (247-248)
과거의 서술은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집 안과 거실로 들어가는 데 수십페이지가 들었어요. 정원의 돌과 나무에 관해서, 또는 집 안의 불빛과 분위기, 대문의 모습, 현관과 손님을 맞는 하인의 표정 복장 얼굴 생김새, 그리고 마호가니 또는 보르네오 또는 아프리카 원목으로 만든 온갖 가구들, 책상 위의 문방구와 서재에 앉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이런 식으로 수십권이 씌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테면 영환느 렌즈 안에 들어온 것만 보여줄 뿐 다른 방식의 서술로 줄거리를 이어줍니다. 디테일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장면과 장면을 배치하지요. 이를 몽따주라고도 하고 미장쎈이라고도 하고, 언뜻 비치는 작은 소품 하나로 복선을 준비해놓기도 합니다. 앞의 길고 잡다한 서술을 피사체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함축해야 하는 거지요. (249)
[바리데기]라는 서사무가가 문화침탈이 빈번했던 한반도 같은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구비로 전승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랬기 때문에 수천년간 살아남은 것이기도 하구요. 모든 얘기꾼들은 입말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 나는 심층과 표층, 죽음과 삶을 갈라서 얘기한 게 아니에요. 죽음과 삶, 현실과 비현실, 이게 다같이 공유되어 있는 거예요. 박민규란 작가가 최근에 젊은 작가들끼리 좌담하면서 근사한 말을 했더라고. 소설은 물질이다...... 이게 근사한 말이지요. 내가 최근에 리옹에 가서 얘기를 하는데 어떤 프랑스 여성작가가........ 인기 절정의 여성작가래요. 몇십만부가 팔리고 하는데 맨날 자기 사생활을 작품으로 쓰고 그런데요. 누가 "글을 어떻게 씁니까?" 물었더니 작가가 하는 말이 내면이 피투성이가 되고 어쩌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나는 뭐라고 했냐면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그리고 궁둥이로 쓴다." 그건 뭐냐면 소설창작은 8,90퍼센트가 노동이 결정하는 거예요. 우선 오래 앉아 있어야 되거든. 프로 작가는 글이 안 나와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해요. 안 나오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난 글쓰는 행위를 물질적 행위로 보고, 세상에 표출도니 것도 그 물질의 부분으로 봅니다. 요새는 작가들이 왜 그렇게 엄살이 심한지 모르겠어요. 하늘에서 천형, 천벌을 받은 것처럼 말하더군. (251-252)
귀신이란 게 뭐냐면 몸이 사회화되는 과정이 귀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봐요. (254)
이 시대 우리의 산문을 어떻게하면 개척할 것인가가 내 고민인데, 하다 말기도 하고 안타깝게 중도에 죽기도 하고 그러지요.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