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은 후 서경식과 프리모 레비를 읽어야지 다짐한 후 서경식과 프리모 레비를 사기까지 반년, 진작 사둔 책을 손에 들기까지 넉달, 들고 다니며 다 읽기까지 꼬박 다섯달. 참 오래도 걸렸다. 꾸준하지 못하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띄엄띄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여러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구구절절 공감이라 외려 몰입하지 못했다는 것. 양자 이야기에 울어버린 것 하며 운동엔 젬병이던 저자의 모습에서 기억도 안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의 달리기며 끝내 넘지 못했던 철봉,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알게 한 철봉, 1,2등이 넘어진 덕분이었지만 어쨌거나 운동회 달리기에서 무려 3등을 했던 짜릿함까지 예상치못한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책을 더 읽고 싶어 야유회조차 달갑지 않았던 소년의 마음이나, 시집을 읽으며 행여라도 형들의 핀잔을 받을까 책을 감추던 모습 등이 순수하게 책이 좋아 책을 읽었던 어린 명제와 오버랩됐다. 책을 더 읽고 싶은 데 일찍 불을 끄는 엄마가 야속했고, 책 얘기를 하면 어쩐지 가족이나 친구들의 핀잔을 들을 것 같은 생각. 문창과에 들어가기 전까지 순수했으나 부끄럽기도 했던, 정말 취미이자 재미이던 내 독서습관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던 게 더딘 책읽기의 첫번째 이유. 놀랍게도!!! 공감의 소년이 아닌 청년 시절에도 있었으니, 지식인 서경식이 대학 졸업 후 파친코 가게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단다. 그 지식인의 허송세월을, 나태의 절정인 그 시간죽이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은 단번에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괴로웠을 마음. 물론 그와 나의 나태의 이유는 다르지만, 그에 비하면 나의 나태는 정말이지...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두번째 이유는 부채감 혹은 반성,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 책장을 휘리릭 넘길수도 없고 책을 펼치는 것조차 한동안은 부담이었다. 사실 이 책을 산 이유 중 하나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드러난 그 해박한 지식과 열린 세계관이며, 유아언니를 통해 알게 된 재일조선인 혹은 교포2, 3세의 삶 등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수필, 또는 누군가의 독후감을 싫어하면서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수많은 추천 때문이 아니라 아마 그런 지적 편력을 다시금 향유하고 싶은 지적 허영? 뭐 그런 게 컸을 거다. 그러나 내내 광고하고 있듯, 이 책은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트클럽상 수상작이며, 수상의 주된 이유는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라는 것, 그런데 수상당사자는 재일교포 2세이며, 재일교포로서 이 상의 첫 수상자라는 것. 모국어가 아니라 모어(母語)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자의 감정이 느껴져 자꾸만 괴로웠다. 그의 독서편력에 신나가 공감하다가도 웬지 미안해져서. 나보다 훨씬 세상을 오래 산 분인데, 그의 소년시절이 한없이 애틋하고 짠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한 건 재미. 강박 내지 의무감으로 다시 집어드는 다른 책과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연상되는 기억이 많아, 몰입할 수 없지만 그런 재미를 놓칠 수도 없었기에. 게다가 은근 무시하던 수필 장르의 매력까지 느끼게 해준 탓. 어쩌면 수필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 그래서 말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렇게 깨어있게 하고 치유해주는 것. 좋은 글. 좋은 글이 담긴 책이다. 

책 한권 한권마다 유년의 기억과 정서를 담아, 웃음과 눈물과 성장을 담은 그의 기억과 글에 비하면 내 블록질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새삼 부끄러웠다가,
나도 비슷한 유년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왜 쓰지 못하는지 새삼 억울하기도 했다가,
그런 저런 생각 끝에 어쩌면 책은 내게는 맥거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오래 걸린만큼 많은 생각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책.
하필 편집을 하면서 본 책이라 그런지, 편집 또한 어찌나 이쁘고 정갈한 지... 

2007. 6 - 10
 

>소년의 눈물... 방울 방울..

"한국어판을 펴내며"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 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 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 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5)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밀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7)

"어린아이의 눈물2 -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조국 상실자 바이코프는 '국가'에 절망하여 '자연으로 자신을 침잠시켰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자비한 현실 정치는, 호랑이 '왕대'에게 그랬듯 바이코프 역시 그가 바라는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63)

"본디 한 뿌리에서 자라났건만 - [삼국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살아오면서 형제들 문제, 집안 문제로 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본디 한 뿌리에서 자라났건만" 하는 조식의 [칠보시]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읽은 책의 구절을 떠올리는 자신이 늘 조금은 우스워지곤 한다. (102)

"얄미운 녀석 -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마음이 왜 그렇게 혼란스레 요동쳤던 것일까? 그 안에 바로 그 시절 내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 내 관심과 초조함 역시 결국엔 늘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지 의문으로 수렴되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훌륭한 인물이 못 될 것 같다는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혹시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식에 항상 시달렸던 것이다.
요컨대 이 얄미운 녀석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한번 그런 데 생각이 미치자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과연 나에게도 '명문교'에 합격했다며 으스대고 싶은 기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사'를 위해, 혹은 다른 무엇을 위한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지만, 결국 '엘리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한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이를테면 저 영어시간의 사건만 하더라도, 무언가 거대한 존재에 저항할 계획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다', '동정을 받고 싶다'는 기분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나 역시 "고개를 떨구어" 버린 것은 아닌가? 등교길 전차 안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내 모습을 들킬까 전전긍긍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 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 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118-121)

"끝내 읽지 못한 책 -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46)

닛타 지로에서 우치다 핫켄에 이르는 책들은, 이를테면 내게는 '읽지 않아도 무방한 책'이다. 혹여 내가 자주 병치레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읽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 '읽지 않아도 괜찮은 책'에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허비해버렸던 것일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오기도 한다. 읽어서 무언가 얻을 게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정에 없던, 부수적인 소득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도락'인 셈이다. (150)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는 관념이 내 머리에 싹튼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그 과정은 두 방향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간단히 말하면 내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 측면에서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분야에 '꼭 읽어야 할 책'들이 방대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이 자리에서 구구하게 쓰지는 않겠다.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 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둔 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 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칭찬받던 그 어린 시절은, 어느덧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더이상 단순한 즐거움으로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152-153)

그녀와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더 안간힘을 다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이라도 읽는다면 그나마 괜찮았다. 목록이나 겉표지만 알고 있는 책들을 마치 실제로 읽은 듯이 얘기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 허점이 드러날라 치면 앞뒤 조리를 맞추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허둥지둥 그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다종다양한 새 개념과 어휘를 만나고, 마른 땅이 수분을 빨아들이듯 이를 흡수했던 것도 그 즈음이다. 이때 나는 '허영'이니 '자기혐오'와 같은 단어들을 내 소유로 만든 뒤,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쏘아붙였다. (158)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 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163)

"희망이란 - 루쉰의 [고향]"
대학을 졸업하고 3-4년이 흘렀을 무렵, 나는 어느 지방 도시의 파친코 가게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때는 마작장에서 주임 같은 일도 했다. 나는 곧 그 방면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고통 속에서 하루를 끝내고 파친코 가게 2층 숙소에서 우울하게 옆으로 웅크려 누웠을 때에도 이따금 루쉰의 글을 읽었다. (176-177)

아주 오래 전, 이 글을 읽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어느 새 피와 살로 변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역시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을 거듭해가며 '피를 목격하고 난 후' 마침내 루쉰의 '암흑'과 '희망'이라는그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 루쉰이 "희망이란 본재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는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거의 없다'라고........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걸어가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180-181)

"사라져가는 말 2 - 김소운의 [조선시집]"
조명희의 [주도](呪禱) 
 
주(主)여!
그대로 운명의 저(著)로
이 구덕이를 집어 세상에 드러트릴 제
그대도 응당 모순의 한 숨을 쉬였으리라
이 모욕의 탈이 땅 우에 나둥겨질 제
저 맑은 햇빛도 응당 찡그렸을리라.

오오 이 더러운 몸을 어찌하여야 좋으랴
이 더러운 피를 어따가 흘려야 좋으랴
주여 그대가 만일 영영 버릴 물건일진대
차라리 벼락의 영광을 주겠나이까
벼락의 영광을!
 
"다리를 소유하려는 사상 -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하나의 다리를 건살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ㅇ낳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를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에 절대로 데우스엑스마키나 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만 한다.(22, 프란츠 파농, [대지의 처주받은 사람들])
작은 형은 파농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형들은 어떤 꿈과 이상을 품고 스스로를 '투기'하려 했던 것일까?
어찌 되었건, 형들이나 나나 모두 굳게 믿고 있었다. 원대한 이상과 일상의 욕망, 그 괴리에 온몸이 찢기면서도 제 삶을 의미있는 무엇으로 만들려면 서투를지언정 이상을 향해 도약해야만 한다고." (228)

"저자 후기"
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 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 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인,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236)

"해설 - 일상에서 보편의 세계로: 서경식, 그의 행보에 대한 공감 / 이시카와 이츠코"
어린아이의 눈물.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교실] 서문에 실린 이 에리히 케스트너의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서경식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ㅁ룽르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난으로 인해 모국어는커녕 자신의 조국을 침탈한 나라의 언어를 깨우칠 기회마저 빼앗겨버린, 서경식의 어머니와 같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속으로 고통스럽게 눈물흘리며 보냈던 것일까.
어린 자식의 예방주사를 맞히러 보육원이나 병원에 가서도 자신의 주소와 성명을 기록해야 했기에 정말 난처했다는, 야간 중학교 졸업문집에 실린 어느 재일조선인 여성의 글이 떠오른다. 그녀는 나이 쉰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하루의 혹독하고 고된 노동 뒤에 야간에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역 이름, 자식의 학교에서 전해오는 각종 통지서, 거리의 간판들, 편지 등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읽어낼 수 없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는 또 다른 어머니의 글에는, 야간 중학교 학습을 통해 글을 익히면서 편지와 신문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고 글짓기까지 가능해지자 "마음속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일본의 지배만 없었던들 이분들은 생활의 방편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타국 일본의 문자를 쓸 수 없다는 이유로 부조리한 상황을 감내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일본인 대부분은 그분들의 눈물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자녀들, 곧 소년 경식이 남몰래 흘렸을 눈물도 눈치챌 수 없었다. 또 거꾸로,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열도 곳곳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막연함 불행감"을 가져다주었고, 그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고통의 눈물을 흐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246-2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