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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만나는 기독교 영성
클라이브 마쉬 외 엮음, 김도훈 옮김 / 살림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발견하고는 우선 눈이 번쩍 뜨였으나... 읽고 나서는 여러가지 아쉬움들.
1. 영화와 신학간의 학제간 연구인데다,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까지 기독교를 두루 아우르는 이 책이 왜 가톨릭에서는 번역되지 못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일반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점이지만, 살림은 개신교 서적 출판에 꽤 많은 힘을 쓰고 있다는 것.
2. '메타내러티브'와 모든 보편성 요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전제로 하면서, 변해가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특성이 주목했다(386쪽), 영화의 서사성에 대한 이해는 신학과 영화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중심 주제가 된다.(44쪽)고 이미 전제하고는 있지만, 왜 내러티브로만 보려고 할까? 어쩌면 그게 이 연구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미치는 감정적 정서적 영향에 폭넓게 주목한다면 내러티브를 넘어서야 할 텐데. 내가 배운바로는 그게 바로 영화를 연구(공부)하는 방식이고, 영화를 영화로 보는 방법인데. 시청각이 사유를 침략했음을 불평하거나 지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지의 광학적, 청각적 기호들과 함꼐 사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시간-이미지>, 들뢰즈, 표4)는 들뢰즈의 고민이 이 책에는 하나도 반영이 안 되어 있다는 것. 물론 나 역시 들뢰즈를 조금도 이해 못하고 있긴 하지만. 신학을 통해 영화를 바라본다는 점이 주는 한계겠지만,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신학을 보면 달라지나? 왜 그래야 하는데? 모르겠다. 관심도 있고 재미도 있으나 뭔가 상당히 아쉽기도 한.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기독교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하면 안정된 논조를 지닌 다행스런 책. 영화를 너무 신화화하며 호들갑 떨고 있는 개신교의 일부 분위기와 책들에 비하면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가 함께 모여서 그런건지, 학문적 연구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화에 대한 탈신화화에는 성공. 그러나 영화 속 기호에 대한 탈기호화는 두고 볼 문제. 어쩌면 이 또한 연구의 한계일런지도.
4.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어 공부해야겠다. 주술구조를 따져가며 읽어야하는 독해의 번거로움이란-_- 꽤 팔리는 (대중)문학작품이 아닌 담에야 번역서에 교열을 안 붙인다는 거 익히 알고는 있지만, 살림 정도면 꽤 큰 출판사인데 말이야. 허나 불평하기 전에 인용된 다른 글들을 찾아볼 엄두를 못 내는 형편없는 내 영어실력이 더 문제.
5. 나는 확실히 너무 많이 배웠거나, 너무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게 문제. 확실하게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믿음보다는 어설픈 의심과 파헤치기에만 능하구나. 이건 완전 좌절거리.
2007. 5
>영화와 신학의 진지한 대화를 향하여
2. 영화, 그리고 문화의 신학들
/ 클라이브 마쉬, 성 요한 요크대학 리폰 칼리지 신학,종교학, 문화학 강의.
'신학'은 '신-이야기'이다. 신학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행해야할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이야기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은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은 궁극적 실제, 모든 존재의 근원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나 개념이다. 어떻게든 그 언어와 개념을 통해 궁극적 실재나 궁극적 존재가 이해된다. 신학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신학적 전통(무슬림,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무엇이든)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각자의 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신의 이해를 재작업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은 그 전통 안에 있는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특정 전통에 헌신하든 아니든, 그들은 자기들이 작업하는 신 개념을, 그 전통이 요구하는 신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것은 특히 예배와 윤리적 실천에 잘 표현되어 있다-과 연관시키려 한다.
신앙의 시각에서 볼 때에, 신학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을 포함한다. 가장 종교적인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문자 그대로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 '신으로부터'라는 말은 은유적인 말이다. 그러나 신학을 '신으로부터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이 인간의 단독작업이 아니라는 확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인간 경험과 독립되어 있는 실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신학은 단순히 인간의 개념화작업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신에 대한 이야기와 신으로부터의 이야기의 경계선은 아무리 보아도 모호한 것이며, 결정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자유와 책임을 가진다는 것, 이것은 또한 신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상당한 불명료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 이해를 검증하고 또 검증받기 위해서 그들 전통의 안팎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신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이러한 통찰은, 신학이 인문학 분야로 자신을 이해하고 기능하는 방식 속에 반영되어 있다.
자신들의 신앙에서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실천에 있어서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실제로 이 단어가 '존재하고 있는' 한 실재를 언급한다고 믿는다. 사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이 의자나 탁자나 나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적, 객관적 실재로 '존재한다'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실재론에 입각하여 신은 실제로 '있다'라고, 신이 단순히 하나의 개념이나 단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어 한다. 종교와 신학이 의심할 여지없이 신화와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신은 인간의 신화-만들기의 결과나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 신화, 이미지, 상징, 상상력, 시적 언어, 은유는 모두 종교와 신학을 산출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실재를 어렴풋이 파악하기 위하여 차용된 것이다. 따라서 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신이 누구인지는 종교 전통 안에서나 종교 간에나 서로 다르게 이해될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신학은 신이 있다는 가정 위에서 기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양한 기독교 전통 안에서 이해되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며 신으로부터의 이야기이다. 신이 오로지 기독교 전통 안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선(prior) 판단은 성립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만이 홀로 누가 신인지를 파악해왔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 기독교 전통 내부로부터 신학적 성찰을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이 기독교 전통들과 관련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기독교 신학이 실제로 신을 독립적인 실재로 만난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확신과 실제로 신이 기독교인들에게 '말을 건다'고 믿는 확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사용된 '문화'의 의미는, 신학과는 대조적으로, 전적으로 인간적 구조물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문화는 인간 존재가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해석적 전략들의 전체적인 망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세워나가는 해석 망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문화'의 한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그 '의미 만들기'는 다른 분야의 의미 만들기보다 훨씬 더 명백하다. 종교나 아니면 예컨대 도상학과 같은 특정 예술 형식은 TV드라마나 팝 아트와 같은 다른 형태의 예술들보다 더욱 의미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
신학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세가지 방식이 있다. 이 방식들은 니버가 제시한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섯 가지 가능한 이해방식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다섯가지 해석들 속에서 니버는 그리스도를 문화와 대립적으로(Christ against Culture) 보거나, 그리스도를 근본적으로 문화와 일치하는 것으로(Christ of Culture) 보거나, 아니면 문화의 세가지 가능한 대화적 혹은 변증법적 관계들 즉, 구분과 통합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되는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Christ over Culture,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55-57)
영화는 종종 대단히 일상적이고 매일 매일의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또한 자주 사회의 밑바닥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사회의 온도를 측정한다. ... 이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은 '기독론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거기에 신학적 근거가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그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일상적인 삶에 주목을 할 수밖에 없다. ... 기독교 신학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세 번째 모델에 대한 탐구로부터 다음 다섯 가지의 신학적 범주들이 나오게 된다.
- 교회를 넘어 창조, 세상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
- 교회의 중요성
-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 하나님의 영의 창조성
- 기독교의 기독론 집중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기독교의 구체성 (68-69)
...틸리히적인 문화의 신학의 수정을 받아들인다면 영화가 신학에 초래할 결과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로, ... 신학에서 영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 교회의 컨텍스트와 신학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만 관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 신학적 해석자가 기독교 교회로부터 직접 도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과제와 연관되는 신학적으로 의미있는 자료에 주목할 때, 그는 '교회'와 '세계'가 상호연관을 갖는 방법에 대한 물음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세 번째로, ... 미디어로서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정서적' 반응의 창출을 통해 제시된 영상 이미지에 대한 응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감정적 채널을 통하여 신학적 성찰이 가능하도록 초대한다.
네 번째로, ... 영화가 일반적으로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관계기관(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로,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신학은 자신의 단명한 특성을 상기하게 된다.
... 영화의 세계와 기독교 신학 사이에 존재하는 적당한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최소한 신학은 오늘날 서구에서 적합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단순한 '적합성'을 위한 요청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탐구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것이고, 진리는 언제나 시대 적합성을 띠는 것이다. 누군가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가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탐구 때문이다.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종종 그것이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76)
3. 신학에서 영화 사용하기
/ 데이비드 존 그레이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바비블 칼리지 신약. 개방대학교 지구과학 강의. 과학과 신앙
영화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을 인상적인 시각매체를 통해 제시하는 하나의 도구이다.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종교적인 것'이라고 전통적으로 이름을 붙여왔던 주제들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종교적인 주제들은 인간의 경험과 운명에 관계되는 모든 질문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들의 감성과 반응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영화를 비유에 빗대는 것이다. 크로싼은 신화와 비유를 구분하면서, "신화는 (기성)세계를 확고히 하지만 비유는 그것을 타파한다"라고 했다. 즉, 전달수단으로 신화가 가지고 있는 효과란 관점을 재고할 수 있게끔 도전이나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옳다고 정의한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 신환느 현 상태를 설명하고, 사건들이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의 이론적 근거나 원인을 밝히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비유란 전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지반을 파고 들어가 의문을 던진다. (85-86)
야우스의 활자 텍스트에 대한 설명(수용미학)은 시각적인 텍스트에도 적용된다. 혁신적인 영화는 우리의 종교적 유산들과 상호 작용하여 성체시현을 야기하고, 다른 시각들과 윤리적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길키는 예술이 문화 비평을 하는 것이 에술의 '예언자적' 역할이라고 묘사한다. 예술은 우리의 경험을 고양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예술은 일상의 배후와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진리를 열어 보인다. ... 초월적인 것은 예술을 통해 나타나며, 예술과 종교는 서로 접근한다." (88)
영향력있는 할리우드 극작가인 슈레이더는 대학 시절에 종교적인 것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영화 안에 있는 '초월적인 형식'이라고 자신이 명명한 것에 대해 논의한다. 슈레이더는 실제로 초월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거의 없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초월성을 구성하는 것이란 '일상적 감각 경험과 ... 내재적인 것을 넘어'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 그는 엘리아데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관점들을 영화라는 매체에 적용시켰으며, ... 엘리아데는 니체의 '신의 죽음'과 부버의 '신의 일식'을 지적하고 나서 '신의 죽음'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결국 전통의 종교 언어로는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 엘리아데는 신이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안에서도 반종교적인 인간이나 사회에 의한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종교적 차원이 살아남아 있음을 예쑬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거룩함'이라는 종교 차원의 개념을 좀 더 탐구할 수 있는가? 실로 그것은 가치 있는 개념인가? 슈레이더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적 보편성'을 보고자 한다. 그는 신학자, 미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과 달리 오직 비평가들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을 보고자 한다. (89-90)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말해 주고 종교도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종교적 전통-위에서 논의된 비유처럼-을 재고하고 전복시키는 이야기로 기능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대안적인 종교적 내러티브가 될 수도 있다. (92)
5. 가위손: 도시적인 동화로부터 바라본 기독론
/ 피터 말론, OCIC(현 SIGNIS)대서양지구 회장, 호주 주교회의 영화분과 담당
그들(많은 작가들)은 복음서의 예술르 문화적인 예수로 바라본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역사적 사실들이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들은 기독교 전통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다양한 문화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은 복음서들을 그들의 의식 속으로, 그리고 그들의 상상과 언어 속으로 흡수해 왔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예술적 창조자들에게 자신들이 탐구하고 있는 가치의 은유.상징.이미지로서 예수에 대한 스토리들과 예술의 인격을 묘사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유비나, 반드시 신앙의 유비는 아니다.
모순이 없는 신학적 통찰들이 지성적인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성적인 단계에 머무르면서 신비의 진리에 대한 보다 큰 이해나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통찰들은 또한 상징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비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단계의 평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획득된 총찰들은'물론 '통찰'이 이러한 경험을 위한 가장 좋은 용어가 아닐수도 있지만- 감정 즉, 신비의 아름다움을 수용하는 갈망과 감정들의 수준에 있을 수도 있다. (135-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