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훔쳐라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실력 있는 젊은 작가다. 소설집 내내 김소진을 연상시킬 정도로 낯선 우리말들이 대거 등장한다. 해설 쓴 성민엽의 말마따나 생경한 토속적인 우리말들이 첨단의 소재와 어울려 등장하니 '낯설게 하기'의 효과가 살갑게 다가온다. 다만 소설이 매우 암울하고 괴기해서, 읽고나면 기분이 나쁘다(?). 여기 실린 모든 소설들은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다. 가짜, 거짓, 허위, 사기, 사이버, 망상 - 이것들이 현실과 진실을 전복시켜버린다. 현실이 알이라면, 가짜들은 알을 품은 닭이다. 때문에 박성원의 소설에서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가짜들은 무섭게 부유하며 활개치고, 나는 복화술사 박성원 소설에서 진짜는 발견 못하고, 가짜만 혼잡스러이 읽은 채 엉뚱한 이해를 끄적인다.

「댈러웨이 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의 사진가가 풍문으로 떠돈다. 그 사진가의 사진은 컴퓨터로 조작된 것이다. 가짜가 현실을 엎고 판을 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댈러웨이의 사진 기법(평범한 인물, 풍경 사진인데 잘 들여다보면 인물의 눈동자에 혹은 숟가락에 또는 가로등에 댈러웨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장면이 반사되어 들어 있다. 이건 문학에서 그 흔한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로 통용되는 기법)에 대해 너스레를 떨어대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대단한 기법이 아닌 듯하여 실은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이 소설을 읽은 직후 친구에게 전화해서 댈러웨이라는 사진가가 있는데 어쩌구 그 기법이 어쩌구… 소설과 똑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만 레이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게 뭐가 대단한데?'라고…. 일반적으로 소설집의 앞에 실리는 소설이 가장 재미있는데, 이 소설은 재미 때문이 아니라 가장 쉽게 읽혀서 앞에 실린 성싶다.

「중심성맥락망막염」은 시야의 중심이 안 보이는 괴상한 병을 앓는 사람이 등장한다. 반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무르팍을 탁! 칠 소설. 「이상한 가역 반응」은 사회의 허위와 개인의 망상에 대해 뜨악한 의문을 던진다. 「실마리」는 작가가 공들여 쓴 분위기가 역력하다. (일단 주인공이 소설가다.) 사이버 동호회에서 발생하는 논쟁을 풍자한 대목에서 (공감이 가니까) 무척 웃었다. 「런어웨이 프로세스」와 「호라지좆」은 김영하 소설보다 욕이 더 심하게 나온다. 또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고, 재밌다. 「호라지좆」에 나오는 중앙도서관은 울동네에 있어 자주 가는데, 언젠가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박성원이 은근히 몽땅 풍자해놓았길래, 나로선 아쉬웠다. (하지만 많이 웃었다.)

「왈가닥 류씨」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성민엽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류씨는 작가이고 왈가닥은 소설이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박성원이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언뜻 보이기도 하지만(정말 그렇다면 너무나 솔직하고 또한 불온하다…), 그것 역시 거짓말일런지?…

'류씨는 왈가닥이라는 인형을 언제나 오른손에 끼고 다닌다. 류씨에게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왈가닥이 류씨의 수음용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중론이었다.'(240) '그러면 왈가닥과 류씨는 앞으로 무엇을 하냐구? 그야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잡상스런 너스레나 떨면서 우리끼리만 킬킬대는 단지 거리로만 존재하겠지. 앞으로도 비웃을 소재는 많으니까 말이다. 복화술? 세상에 복화술이라니, 도대체 누가 요즘 세상에 그런 것을 구경한단 말인가.'(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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