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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한때 잘 나가던 충무로 한량 주인공, 아버지 유산을 사업으로 다 날려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백수 형, 바람을 피우다가 두 번째 남편에게 마저 이혼 당한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딸까지.. 문제 많고 대책 없는 자식들이 나이 든 어머니에게 빌붙어 지내면서 때론 남들보다 못하게 원수처럼 지내기도 하고, 먹는 거 가지고 어린 조카와 삼촌이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함께 지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 간의 무언의 배려로 각자 혜택을 받고 있었고 그 혜택이 혜택인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을 일깨워 주었던 것 같다.
나도 가족, 형제들에게 무언의 배려를 그동안 받아오며 지내지 않았을까...
p128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 - 톨스토이
p192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p192
처음엔 물론 나도 오함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면회도 자주 가고 영치금도 넉넉하게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빚을 졌다는 부담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때문에 오함마를 점점 더 멀리하게 되어 출감하기 몇 달 전부턴 면회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급기야 죄의식과 부채감 등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그를 미워하게 된 거였다.
p222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되는 법이다.
p243
그가 새로 합류하긴 했지만 집 안은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가을의 바닷가처럼 적막해 여름내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졌던 스물네 평 연립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같이 있을땐 웬수처럼 미워하다가도 막상 없으면 그리운 게 식구인 모양인지 나는 문득문득 민경이의 짱알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오함마의 뱃고동 소리도 그리웠다.
p244
우리 가족은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던 과거와 화해하고 비로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또한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지만 패티김의 노래가 울려퍼지던 그날 아침만큼은 우리 집도 평화로운 가정이었다.
p252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언제나 특별한 혜택을 받고 살았다. 적어도 나의 가족안에서 그렇다는 애기다. 그들은 늘 나를 배려해줬고 무엇에서든 우선권을 주었다. 그들 덕에 나는 가족관계 안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다. 오함마에게 두들겨맞은 것도 어릴 때의 이야기일 뿐 나이가 들어서는 오히려 그가 나를 어려워했다. 순전히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들은 나를 지지해줬지만 나는 고생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덕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으며 그들을 부담스러워하기까지 했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지하지 않았다.
p286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