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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굉장히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제목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았다는 제목은 소극적인 표현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그들은 해야 할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 아니면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감추었다 라는 의미가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서 속였다 라는 것이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솔직한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을 한 이래 경제학에서 경제가 성장하려면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할 것이냐 아니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규제(계획)를 해야 하느냐의 해묵은 논쟁을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경제학 전문용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장하준 교수 특유의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여 경제학의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서두에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그 유명한 장하준 교수도 역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상대방을 비판한 논리가 자기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같은 논리로 자기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기 때문이다.
흔히 좌파다 우파다의 구분 기준은 다양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성장과 배분 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좌파다 우파다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일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무엇이든 양면이 있으므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성장정책을 쓴다고 하여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분배만으로는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다. 분배없는 성장에 치윛다보면 결국엔 사회계층간 갈등을 일으켜 성장이 발목 잡힐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며, 반대로 성장없는 분배는 분배할 것이 없으므로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좌파는 분배만을, 우파는 성장만을 주장하는 것이라 착각들을 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라는 이 책도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관점의 차이일 뿐 아닐까? 다시 말해서 어느 정책이든 어느 이론이든 부작용 내지 반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평생을 경제학을 전공하고 연구한 저명한 학자가 아닌 무명의 필부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먼저‘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주제이다. 시장이 원활히 돌아가려면 각자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야 시장은 원활히 그리고 합리적으로 돌아간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시장에는 여러 형태로든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또 그런 제한이 있어야 하므로 자유시장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의 개입을 막아 시장을 보호하려는 자체가 자유시장이란 개념에 반하는 것인데도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깨어나라고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 한다. 그러면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노동시장을 제시한다. 노동시장을 완전 자유화하면 어린아이를 비롯한 약자를 보호할 수 없고 나아가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어느 나라나 노동시장에서 어린이와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노동시장의 자유화를 규제하고 있는데 이런 규제에 대하여는 자유주의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활극영화에서 날아다니는 장면은 실제로는 피아노 줄에 매달려 촬영한 것인데, 이와같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시장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힘의 균형이 깨져있는 국가간의 자유무역이 과연 공정한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공정하지 않다. 여기서 반문하고 싶은 것은 자유국가라 할 때 그 나라의 국민들은 아무런 제약없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가 이다. 아니다. 자유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 더 나아가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공권력으로 개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나라를 자유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시장에 자유를 주면 최적의 상태로 간다는 주장은 이상론에 불과하다. 헤겔의 변증법 正反合의 이론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막대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 설혹 막대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리 될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나 그건 현실적으로 요원한 것이다. 또 그리되가는 과정상 부작용으로 그런 최적의 상태는 아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유시장이라 해도 부작용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당연하다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시장체제하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폐해조차 시장에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저자의 말에는 선뜩 동의하기 곤란하다. 저자는 여러 경제상황 수치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한쪽 면만 침소봉대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아마 다른 시각에서 찾아보면 거기에 맞는 경제상황 수치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하면 안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주주가 유한책임을 지게 되고부터는 또 주식시장에서 주식의 거래가 자유화 되고부터는 사실 주주들은 기업의 장기적인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단기적인 배당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면에서 기엄에 유익되더라도 당장 배당에 관련이 없다면 경영진을 불신임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경영진들은 회사가 어찌 되든 당기이익 창출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기업은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
경영진의 진퇴는 최종적으로 주주들이 결정한다. 그런데 단기 배당에만 관심이 있는 주주들 때문에 기업의 장기적 생존이 도외시 되지 않도록 배당에 각종 규제를 가하는 것은 자유시장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는 특정산업이나 지역의 발전을 위한 각종 振興法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진흥법이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그건 진흥보다는 규제내용이 더 많기 때문이다. 즉 특정산업이나 지역의 발전을 진흥시키려면, 먼저 진흥시키는데 있을 수 있는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하여 사전에 철저한 규제를 규정하고 있다.
이와같이 진흥법에 진흥규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을 억제할 규제조항이 있는 것처럼 기업의 배당에도 기업자유에 맡기자만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이 말은 같은 일이라면 생산성은 같은데 잘사는 나라는 못사는 나라에 비하여 받는 보수가 많다는 의미로서 못사는 나라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증거라고 한다. 즉, 노동시장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면 못사는 나라 노동자가 대거 잘사는 나라로 이동하면 임금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는데 잘사는 나라에서 이민을 규제정책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잘사는 나라들은 자기들을 위해서는 지유시장주의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못사는 나라에게는 자유시장 정책을 쓰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사는 나라 안에서도 같은 질의 노동이라도 임금격차가 있다. 심지어 같은 직장에서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운전기사는 일정한 숙련도에 이르면 아무리 오래 근무하여도 일의 質은 같다. 그러나 현실은 오래된 운전기사는 같은 숙련도에 있는 근속연수가 짧은 운전기사보다 임금을 더 받는다. 이는 일종의 근속년수에 따른 임금의 격차 때문이다.
같은 질의 노동이면서도 근속년수에 따라 임금의 격차를 두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나이든 노동자일수록 부양가족이 많다, 기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알아서 일을 처리한다 등등의 이유이다. 그것이 합리적인지 여부의 판단은 여기서 유보하고 이것이 현실이다. 같은 나라, 같은 직장에서도 이러할 진대 나라가 다른데 임금이 같은 수 있을까? 임금은 생산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는가?
네 번째‘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라고 하는데, 가전제품이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촉진시킨 것은 틀림없다. 가전제품이 보급됨으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노동력을 가정에 사장시키지 않고 사회로 끌어낸 공로를 어찌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
1970년대 스페인 교과서에‘라틴 아메리카에는 가정부가 없는 사람이 없다.’라는 예문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 문장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문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리틴 아메리카에는 가정부가 없는 사람이 없다면 가정부도 가정부를 데리고 산다는 말인가? 가정부도 가정부를 데리고 살 수 있도록 가정부들이 순번을 정해 서로 상대의 가정부가 되어주는 제도가 있다면 몰라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비판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는 소위‘식모’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의 파출부에 해당하지만, 그러나 지금 같은 시간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온갖 가사를 도맡아 하였다. 월급 같은 보수의 개념은 전혀 없었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식모가 시집을 갈 때 약간의 혼수를 해주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 하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먹는 입을 하나라도 덜자며 여유가 있는 도시에 사는 집에 딸을 식모로 보냈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래서 도시의 웬만한 집에는 식모가 있었다. 당시 TV드라마에도 식모가 자주 등장했는데, 특정지역 사람을 식모로 등장시킨다고 문제시하던 것을 나이든 사람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우리 집 역시 그리 잘사는 편이 아닌데도 외가에서 그런 분이 와서 식모살이를 했다.
195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는 썩 잘살지는 못해도 웬만한 집이면 가정부가 있었다는 의미이지 가정부도 가정부를 데리고 산다는 의미인가? 참으로 말의 의미를 곡해해도 이리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저자의 견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전제품이 여성을 가사에서 해방하여 사회로 끌어낸 공로를 어찌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마는 그렇다고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변화시켰다고 함은 무리이다. 가전제품이 여성을 가사에서 해방시켰다면 인터넷은 우리를 단순업무에서 해방시켰다. 이런 인터넷의 놀라운 공로를 어찌 과소평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인터넷은 단순업무에서 해방시킨 정도라 아니라 국가의 기간 인프라산업이 아닌가?
다섯 째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다시 말해서 시장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어우러져서 사회적 조화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지속될 수 있는 경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존재라는 사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에는 이기심 외에 도덕성, 희생정신 등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항상 최악의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매슬로우(Maslow)가 주장한 인간의 욕망 5단계에서 보듯이 도덕성이나 희생정신은 이기심으로 필요한 것이 충족된 후에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처음부터 도덕성과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이다. 따라서 시장을 움직이는 기본은 이기적인 본성이고 필요가 충족이 되면 도덕성과 희생정신에 의하여 이기적 본성에 의하여 흐려진 시장의 역기능이 순기능으로 바뀌어 진다고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일곱 번 째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라고 주장한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가들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경제개발을 추진했지만 결과는 경제침체 내지 경제적 재앙이었다. 성장률은 극히 미미했고 마이너스 성장을 하거나 국가의 보호를 받은 산업은 성장을 멈추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자유시장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극히 일부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진국은 자유시장 정책을 시행하여 부자나라가 됐었기 때문이며 최근 들어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개발도상국일수록 좋은 성적을 올렸다.』 라고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나 실제로는 지금의 선전 부자나라들은 과거 국가가 개입하여 보호무역과 정부보조를 한 결과 지금의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라고 한다. 즉 개발도상국가가 자유시장 정책을 써서는 부자나라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저자는 세계는 극심한 경제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홀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중국과 과거 1880년대 미국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나라들은 자유시장정책이 아닌 철저한 국가가 개입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따라서 자유시장정책으로 개발도상국들이 부자나라가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에도 부자나라 선진국들과 세계은행이나 IMF 같은 국제경제기구들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자유시장정책을 채택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자유시장정책이 이미 경쟁력을 갖춘 자기들의 입장에서 유리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말은 원론적으로 맞다. 아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가 자유시장정책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화약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려면 자유시장정책으로 가는 것은 맞다. 언제까지나 국가가 보호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금융기관이 부실화된 것은 관치금융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논리가 아닌 정치의 논리로 은행을 운영하였기 때문인 점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다만 독자적으로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정부의 보호와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보호와 규제도 제대로 된 정부가 하여야지 아무 정부나 보호와 규제를 한다고 기업의 성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개발도상국가가 경제성장에 실패한 것은 자유시장정책때문이라기 보다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닌 무능 부패한 정부가 보호한답시고 간섭한 것이 더 큰 원인이라 해야할 것이다.
여덟 번째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리 다국적기업이라해도 경영진이 누구냐에 따라 최종적인 결정이 국적의 영향을 받는 것은 구태여 논할 필요가 없다.
아홉 번째, ‘탈산업화’라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허울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기초소재산업의 뒷받침이 없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사상누각이라 할 것이다. 센카쿠열도 분쟁에서 보여준 일본과 중국간의 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스포츠에서도 기초종목이라할 육상이 전무한 나라는 결코 올림픽에서 우승을 할 수 없듯이 말이다. 미국 등 선진국을 보라. 그들은 공해산업을 개발도상국에 넘긴 것이지 알맹이 산업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탈산업화 하지 않았다. 다만 서비스업에 비하여 비중이 약간 감소했을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제조업을 무시하고 서비스업으로 가는 것이 선진화라고 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다만 임금상승 등 악조건 하에서 알맹이 제조업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가 핵심이라 할 것이다.
열 번째,‘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한다. 맞다. 각종 통계수치로 잘살고 못사는 나라를 말하면 오히려 유럽의 작은 나라가 잘사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나는 가끔 미국보다는 뉴질랜드나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국제경찰이니 뭐니 하면서 국제분쟁 여기저기에 쓸데없이 끼어들 필요가 없이 자기나라만 잘 추스르면 되니까. 세계에서 가장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란 점을 알고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표현을 달리 하여야 한다. ‘마국은 세계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이다.’라고… 요즘 여기에 중국이 끼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누구도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하지 않듯이 말이다.
열한 번째.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저자의 의도는 현재 아프리카가 가난한 것은 아프리카의 잘못보다는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했던 선진국의 탓이라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라고 생각한다. 과거는 제쳐두고 지금 아프리카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종족간의 갈등, 즉 내란과 민주화되지 않은 독재정권이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아프리카 원주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했던 나라들이 임의로 국경을 정한 것이 근본 遠因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극복할 의무와 책임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있다. 그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하는 것이다.
열두 번째,‘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정부도’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물론 정부라 하여 유망주를 고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주제는 더 이상 논할 의미가 없다. 다만 저자도 지적하였듯이 개발도상국가에서 추진한 경제정책 중 상당수가 ‘흰 코끼리 프로젝트’였던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세계은행 등에서 개발도상국가를 지원할 때 능력이 없다 판단되는 개발도상국가에 제한을 가한 것이지 모든 개발도상국가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저자의 글을 뒤집어 읽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열세 번째,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위 부자감세정책이라 부르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당연한 말을 새삼스레 한 의도를 모르겠다. 투자는 돈벌이가 된다고 확신할 때 하는 것이지 단순히 돈이 있다고 투자를 할 사람이 있는가? 그건 많이 가진 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투자는 누가 하는가 이다. 없는 자가 투자할 수 있는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소 부자가 돈을 벌게 해주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단, 부자가 그렇게 번 돈을 선순환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하고 해야지 단순히 부자가 돈만 벌게 해서는 오히려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감세로 인하여 늘어난 소득을 투자하게끔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부자감세’는 분명히 잘못 된 것이다. 따라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은 맞으나 이를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결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열네 번째,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보수는 참으로 다루기 힘든 부분이다. 받는 자 치고 많이 받는다 하는 자 없고 주는 자 치고 적게 준다고 하는 자 없다는 말이다. 보수가 꼭 생산성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이 너무 단순하다고 본다.
축구, 야구 등 인기종목의 프로선수들의 연봉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본다면 이해가 것이다. 특히 본국 선수와 소위 용병이라는 외국선수의 연봉 수준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보수의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성이지만 그 외 고려사항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열다섯 번째,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우선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를 하여야겠다. 기업가 정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도전정신, 창의성, 혁신(Innovation)이라 생각한다.
이런 정신으로 기업이라는 적지않은 조직을 이끌어가는 건 아무나 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선진국일수록 기업을 경영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보수를 받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먹고 살기 위해 기업가 정신이 투철하다고 한다. 단순히 먹기 살기 위해서 이것저것 닥치는데 일을 하는 것이 기업가 정신인가? 물론 후진국은 아무리 기업가 정신이 투철해도 모든 제도가 선진국보다 못하여 기업을 경영하기가 더 어려운 점이란 것은 인정하지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열여섯 번째,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 관여하는 것을 일체 삼가야한다라 주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급적이라고 하면 모를까 일체란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저자의 독선 내지 왜곡된 생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명제는 맞으나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저자의 편견이 곳곳에서 들어난다.
열일곱 번째,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교육과목에는 사회에 나가 생업에 종사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은행원에게 생물이나 물리 화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엔지니어들에게 문학이나 역사 등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얼른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종사한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과목을 학교에서 배웠지만, 이것이 업무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그 일에 대한 지식만 알아야 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교육은 기본이다. 국민들이 할 수만 있다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 그건 좁은 시각에 빠지지 않고 안목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 교육의 병폐는 대학에서 학생선발시 변별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과목별로 깊숙이 들어가는 전문지식을 요구하는데 있다. 그리고 교육을 꼭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저자의 생각에 깊은 우려를 보낸다.
열여덟 번째,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명제는 쓴 이유를 모르겠다. 루이 12세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했는데. GM이 곧 미국이라면 모를까 GM에 좋다고 미국에 좋은 것이라 할 사람이 있는가? 그것도 항상이란 말을 써가면서 말이다.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열아홉 번째,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 살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라면 모를까 정부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는 한 정부가 국정 전반에 대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분야는 더욱 그렇다. 더구나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말이다. 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의 논쟁만 있을 뿐이다.
스무 번째,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동의한다. 물리적 평등이 평등이 아닌 것처럼 단순한 기회의 균등은 기회의 균등이 다. 기회의 균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의 균등이라 생각한다. 누구는 자동차를 타고 누구는 손발을 묶어놓고 뛰라고 한다고 기회의 균등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의문은 자유주의자들이 과연 이런 것까지 공평하다고 주장하는지 나는 들어보질 못했다.
스물한 번째,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불필요한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지당한 말씀이다. 이론이 없다. 단, 저자는 큰 정부라 하여 불필요한 조직을 가지는 것까지 말하는 건 아니리라 믿는다. 그건 낭비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역할만 한다면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가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스물두 번째, ‘금융시장은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금융이란 이름이 붙는 업종에는 정부의 철저한 감시 감독 그리고 규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일반 업종과 달리 금융이란 자기자본금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남의 돈을 받아서 운영 관리하는 특수한 업종이다. 은행, 보험, 증권, 공제, 상조 등등.
금융업종은 적자를 내거나 파산이라도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입자. 예탁자에게 나아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가히 핵폭탄급이다. 따라서 상품 하나하나도 정부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 다만 그러다 관치금융이 될까 우려가 되지만 그래도 감독 감시 규제는 철저하여야 한다. 그리하여도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이 부분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스물세 번째.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좋은 경제 정책이란 말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유능한, 훌륭한 이라면 모를까 좋은 경제학자라는 표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법을 전공한 사람은 유능한 참모는 될지언정 최고지도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건 무슨 일을 하려면 법 규정을 따지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이 말을 경제학자 역시 이것저것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필요한 결단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역시 결단을 하는 최고 지도자는 specialist보다는 generalist이어야 한다는 말과 의미가 상통하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책의 내용은 저자의 name value에 걸맞지 않는다 할 것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제대로 인용한 것인지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부분만 선별한 것은 아닌지 나로서는 심히 의문시 된다. 또한 모든 경제현상에는 양면이 있는데 어느 일면만 부각시킨 점이 적지않아 적이 실망스럽다.
이 책은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좋은 책이란 점에는 동의하는 부분이 많으나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으로는 선뜻 좋은 책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자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책 표지에 누구의 초상인지 모르나 입에 검은 테이프를 붙인 모습은 그들이 알고도 고의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여 책을 발간하면서 이토록 상업주의에 물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책을 덮으면서 해보았다.
다행스런 점은 저자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하여 쓴 책이라는 한 것은 그나마 이 책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