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빈 강빈
김혜경 지음 / 문학스케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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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간 여인, 그래서 불행한 삶을 산 여인, 조선이 아닌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한 시대를 주름 잡았을 여인,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멍에가 된 여인, 그는 강빈이다.

이 땅의 여인들은 엄격한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 女必從夫 三父從事의 속박에 갇혀 순종을 미덕으로 알고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원래 이 땅의 여인들은 그러하지 않았었다.

신라에서는 여왕이 셋이나 나왔고,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 하지만 사실 백제를 세운 건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이다. 또 고려시대에는 성종이 거란의 협박에 나라의 일부를 떼어주자고 나약한 소리를 할 때 분연히 일어나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걸출한 여인 천추태후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인들은 바깥출입조차 할 수 없었고 단지 여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뜻을 펴볼 생각도 못하고 스러져갔다. 그건 전적으로 유학을 숭상한 영향 때문이었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못난 왕을 들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인조라고 한다. 하기야 신하들의 등에 업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조는 원래 아들조차 믿지 못하는 천성이 옹졸한 자이었다. 결국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가 서인과 북인이 세력을 다투는 가운데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인조 자신은 물론 조선의 큰 불행을 불러왔다.

인조는 국제정세에 어두워 당시 대륙을 호령하는 신흥 청나라를 배척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받들다가 丙子胡亂을 자초하였다. 그리하여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三拜九叩頭를 올리는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고, 자신의 후계자인 소현세자를 청나라의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못난 군주였다.

강빈은 그런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빈이다.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 8년간 볼모생활을 했다.

강빈은 소현세자가 비록 볼모로 잡혀갔지만 조선의 대표자로 청나라와 외교를 하는 사이에 세자관의 살림을 직접 맡아 재정을 직접 조달하였다. 물론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정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였지만 강빈의 진취적인 사고가 더 큰 계기가 되었다.

강빈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교역을 하여 큰돈을 모아 재정적 독립을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속환하였고, 다시 이들로 하여금 농장을 경작하게 하여 필요한 곡식을 조달하는 등 당시 조선왕가의 내명부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대신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또 청나라가 어떻게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명나라는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특히 소현세자와 함께 발전한 청나라와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져 그들과 접촉하면서 장차 귀국하여 강한 나라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볼모가 풀려 귀국한 소현세자와 강빈은 이런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삼전도의 치욕만 생각하며 오로지 청나라를 배척하려는 옹졸한 인조에 의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심지어 인조는 소현세자가 자기를 밀어내고 보위에 오르는 것으로 의심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조선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역사에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소현세자의 죽음 배후에는 인조가 있다고 한다. 그건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이라고는 하나 인조가 보낸 의원의 침을 맞고 돌연히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소현세자의 죽음은 최소한 인조의 방조내지 묵인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더욱이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에 빠진 강빈마저 인조는 강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죄목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쫓아내더니 다음 해에 사약을 내려 살해한다. 거기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어 두 아들을 죽게 한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의 배후에 인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부자간에 아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내니 권력이 무엇인지 무서운 생각이 든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세자를 포함하여 외국에 나가 발달된 문물과 제도를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 물론 왕이 곧 나라인 당시의 특성상 왕이 외국에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강빈은 비록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그곳에서 8년 동안 있으면서 청나라와 서양 등 외국의 발달된 문물을 접한 조선조 최초로 세자요, 빈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후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보다 훨씬 앞섰을 것이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에 안타깝다.

그랬더라면 정조에 앞서 조선의 개혁군주가 될 수 있었을 소현세자와 여걸 강빈이기에 그분들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한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한 나라를 이끌어갈 최고 지도자의 자질은 어떠해야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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