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2 - 대륙에서 키운 꿈
이정근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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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했을 때의 비참함이 어떠한지는 世界史를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봤기에 누구나 쉽게 실감할 것이다. 비록 나라가 망하지는 않고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타국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 있다면 그건 나라가 망한 거나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한 후 조선의 신세가 바로 이와 같다 할 것이다. 말이 좋아 국가이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한 이후에는 청나라의 말이라면 무조건 응하여야 하는 조선을 어찌 독립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자기들의 영토에 편입하고자 할 의도로 침공하였다기보다는 명나라를 멸망시켜 중원을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하여 청나라를 협공하는 것을 사전에 끊어놓는 것이 목적이라 할 것이다.

만일 청이 조선을 자기들의 영토로 할 의향이었다면 소현세자 등을 볼모로 잡을 것이 아니라 인조를 폐위시켜 심양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혹시 조선을 침공하여 병합하면 저항이 극심하여 중원을 점령하여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우려되어 전략적으로 그리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旭日昇天하는 청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와 명나라 관계를 잘 활용하였다면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 증거는 병자호란 9년 전에 있었던 정묘호란이다. 이때에 정세만 잘 판단하였다면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병자호란을 겪고도 변할 줄 모르는 인조와 조선 조정이다. 그건 척화파나 주화파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우물 안 개구리로서 척화파와 주화파의 차이라면 당장 앞에 닥친 청의 항복요구에 대하여 어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단기응급처치방안에 대한 대응방안의 차이일 뿐 당시 중국대륙의 정세에 대한 판단을 제쳐두고 崇明背淸이란 근본적인 인식에는 둘 다 같았기 때문이다.

세자와 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갔기에 청나라 심양에 수많은 사신들이 오고 갔으면서도 누구 하나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헛된 숭조사상에 빠져 청나라의 요구에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청나라 관리나 역관들에게 뇌물을 주어 임시변통으로 모면하려고만 했으니 어찌 한심하다 아니 할 수 있는가?

한편 왕이라는 자는 적국의 심장부에 가 있는 세자를 통하여 적정을 얻으려하기는커녕 청나라에서 자기를 폐위시키고 불모로 잡아간 세자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어 세자의 활동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지경인데 심지어 왕이 세자를 불신하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자는 심양에서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의 기세를 보면서 나라와 조정이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는데 인조와 조정은 이 모양이니 조선의 앞날이 어떠하게 될 것인가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죽어나는 건 민초, 백성들뿐이었다.

개인이나 나라나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그 끝이 무엇인가? 불과 4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조정은 또다시 병자호란을 맞게 되는 과정을 작가는 예리한 필체로 적시하고 있다.

흔히 역사는 반복한다고 하는데 그때의 상황을 요즘에 비추어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단,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 실천에 옮기는 개인이나 나라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런 개인이나 나라에게는 역사는 똑 같은 일로 반복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에 당시 상황을 말없이 알려주는 유적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소공동에 있는 남별궁터의 원구단, 전쟁의 참화에도 무사했는데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 전승 축하 연회가 열리던 심양 황궁 봉황루, 혼하 강변에 있는 영빈관 심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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