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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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란 무엇일까. 단순희 책을 읽고 감명을 받고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 물론 변화에 대한 저마다의 정의가 있을 것이다. ‘담론에서 작가는 단순히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된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는 완성될 수 없음을 뜻한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관계 즉 관계는 담론의 일관된 화두다. 작가는20년간의 수형생활 동안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변화란 개인만의 생각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이 위대한 것은 시대의 조류에 상관없이 언제나 새로운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담론에서의 고전 재해석 또한 새롭다. 그리고 수형생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를 통한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 시키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찰을 통한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그와 함께 생활하던 수형 생활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같은 처지에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바로 입장의 동일함은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고 강조한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인간관계의 단절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담론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도우면서 감사하자고 한다. 함께 한다는 것. 그러면서 작은 변화부터 실천하여 이뤄내는 것. 그러면서 세상을 향한 자부심을 가지고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고인이 된 작가의 마지막 유훈인 듯 싶다.

자신이 외롭고 혼자라고 느낄 때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은 축 처진 어깨를 어루만져주면서 함께 옆에서 말없이 서 있어줄 것이다.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를 자각하고 스스로를 바꾸어 가기를 결심하는 변화의 시작, 탈주이고 새로운 관계의 조직이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서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독서 후 망각하는 것은 단순히 독서로 끝나버려서 이다. 책을 읽었으면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리고 그 책을 찢어버려야 한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다른 출발 이어야 한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마디즘(유목주의)

 

똘레랑스는 은패된 패권 논리다.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이기 때문에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니다

 

자기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된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사람 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맺고있는 인간관계가 자기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이다.”

 

변화는 결코 개인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런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자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이 최고의 경청이다

 

대전의 노랑머리 창녀의 사례를 보며,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한다는 것, 인간의 오만과 천박함,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수순한 어떤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왜소한 인간관이 아닐 수 없다.”

 

무궁화는 덕이 있는 꽃이다. 벌레와 함께 진드기까지 함께 살아가지 않느냐.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 꽃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위해 피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 피는것도 아니다. 빛과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다. 오로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다. 시들어서 더 이상 꽃이 아니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아서 자라고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모정이다. 꽃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무궁화는 아름답다.”

 

약자의 위악과 강자의 위선, 약자의 위악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보지 못한다.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 내는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다.”

 

참된 인식이란 관계맺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식이란 주체와 대상의 엄숙한 혼혈의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관계없이 인식 없다

 

머리좋은 것이 마음 좋은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것만 못한 법이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인식은 그것이 어떤것에 대한 인식이든 가장 밑바탕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러닝셔츠 없어도, 치약 없어도 떳떳한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 조건이 나아지는 것도 어려움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차라리 그런 것이 없더라도 떳떳한 자존심이 역경을 견디는 데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한다. 물질적 도움 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혹서의 교도서 안에서의 고통,, 옆 사람을 향하여 부당한 증오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 그 증오를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들어내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동을 들어내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겨울을 선호한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은화처럼 맑아지기 때문이다. 겨울은 어지러운 생각을 청리하는 철학의 계절이다. 기상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찬 벽에 기대고 앉아서 열중했던 명상명상은 현재의 공간을 벗어나는 정신적 탈옥이다. 강의의 화두로 삼고있는 관계론의 산실이 겨울 독방이었다.

세계는 관계다. 나는 관계다. 아픔과 기쁨의 근원은 관계다

나의 겨울 독방은 무한한 시공으로 열려있는 정신적 비약이었다.”

 

증오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해서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란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지금을 그때만큼 춥지않다. 덥지도 않다.

자신의 생각을 서슬 푸르게 벼를 수 있는 계절이 없다. 그것은 어디에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과제라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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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의 미학이란 것은 극한 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이공이산寓公移山을 쓴다고 하자. 첫 획을 너무 위로 치켜 그었다고해서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쓸수는 없다. 인생과 마찮가지다. 지우고 다시 쓰거나 개칠치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획으로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자字가 잘못된 경우에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 보완해야 한다. 한 행은 그 다음 행으로, 그리고 한 연은 그 옆의 연으로 조정하고 조정시켜가야 한다. 그런 고민을 끊임없이 하면서 써야 한다. 그렇게 하여 얻게되는 한 폭의 글씨에는 실패와 사과와 감사등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긴다. 서로의 관계론은 획,,,연의 조화에 그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는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워야 한다. 상당한 정도의 필력이면 까만 부분을 보지 않아도 된다. 하얀 부분이 얼마나 더 남았나를 더 많이 본다.”

 

 

처럼 한 획의 실수는 그 다음 획으로, 또 한 글자의 실수는 그 다음 글자로 만회해 가면서 씁니다. 자연히 획과 획, 글자와 글자가 서로 기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방서와 낙관을 합니다. 전체 균형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실수와 사과와 도움과 감사가 어우러져 있는, 그러기에 삶과 인생이 그 속에 담겨있는 경우 그것을 서로의 격조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를 테면 구조에 있어서의 서도의 관계론이다.”

 

사람의 학식이 글에 담긴다. ,,사상과 뜻이 글에 담긴다. 최종적으로 그 사람과 같다.”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교라는 것은 반 자연이다. 붓글씨도 마찬가지다. 명필이나 대가의 글씨는 졸렬하다. 졸렬해 보인다. 날렵하거나 아름답지 않고 어리숙하다. 어리숙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진정성이 느껴지고 싫증이 나지 않느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단편작품 명인전’, 불사지사

 

대인춘풍 지기추상,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하고, 반면에 자기를 갖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

 

콜롬버스의 계란 세우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단순히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어미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조이다. 바로 생명의 모양이다. 이것을 깨뜨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황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이다.”

 

보르헤스 촛불, 촛불은 어둠을 밀어낼 수 있을뿐 그 대신 별을 보지 못하게 한다

 

 

나 자신이 등가물이었던 경험을 소개하겠다. 나는 오로지 무게로만 서있었던 경험이 있다. 자르는 나무가 움직이지 않도록 밟고 있는 역할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내게는 나무를 밟고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몸무게 이외에도 여러가지 능력이 있다. 그런것이 모두 사장되고 오로지 몸무게 으로서만 의미가 있구나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등가물은 그 물건의 속성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교환 가치만 남아있는 것이다.”

 

 

조광조가 죽고나서 우리나라 개혁 세력들이 일대 반성을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작된다.

중앙->지방, 정치투쟁->사상투쟁, 기동전->진지전으로…”

 

 

갇히지 않는 사유, 100년후는 아니더라도 10년 후, 20년 후의 사유를 선취先取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식인 담론의 실천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과 일들로부터 격리된 나만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관계다를 주장하는 이유다. 독방은 내게 최고의 철학 교실이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 깨달음과 공부였다.

반 에덴의 동화 어린요한의 한 구절 버섯이야기….

 

이건 독버섯이야….~~~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 논리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한다. ‘자기의 이유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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