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의 달과 아기 공룡 스콜라 창작 그림책 50
이덕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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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공룡이 살았을 때- 아니 하늘에 달이 100개나 있을 때의 이야기 :)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던 아기 공룡은 '노랗고 맛있게 생긴 것'이 너무 궁금하다. 그런 아기 공룡에게 "저건 먹는 게 아니야. 밤하늘을 밝게 비춰 주는 달이란다."하는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을 리 없다. 엄마가 잠든 깊은 밤, 아기 공룡은 아무도 몰래 스윽 빠져나와 달을 한 입 베어 문다.

"사각! ...우아! 정말 맛있다!"

 

본디 한번 맛본 달콤함은 웬만해서는 멈추기 어려운 것. 아기 공룡은 결국 100개의 달을 다 먹어치운다. 그리고는 부글부글, 배가 아프기 시작! 엄마에게 한 거짓말이 들통날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꾸르륵꾸르륵 부글부글 빵빵거리는 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고백하고, 100개의 달이 뭉쳐진 커다란 하나의 달 똥을 싼다는 귀여운 결말.

(요만한 아이들이 다 그렇듯) 채니는 달 똥을 싸는 요 아래 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뿌우웅~ 힘내 공룡아! 할 때 채니도 같이 두 손에 힘을 꽈악!주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이런 생각들.
1.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해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결국 배탈이 나 상황을 고백하고야 마는 아기 공룡을 보며 나의 20대를 돌아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부글부글 꾸르륵꾸르륵 빵빵거리는 달들을 내 몸속에서 소화시키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2.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또 해서는 안될 일을 하긴 했지만) 100개의 달보다 하나의 커다란 달이 더 의미로워(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나 혼자일까.

그리고
3. (아기 공룡의 순수한 호기심을 끝까지 지켜내준 엄마 공룡을 보며) 자꾸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그간 나의 선택들을 지켜보며 얼마나 많은 순간을 꾹꾹 눌러 담아 참아냈을까. 그 생각을 하니, 100개의 달을 뱃속에서 둥글둥글 잘 뭉쳐서 커다란 달 똥을 잘 싸야겠다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 아이에게 '엄마 공룡'같은 엄마가 되어주어야 겠다고도.
그러니까 채원아, 엄마는 네가 달을 따 먹겠다는 생각을 한 것- 또 달을 따 먹은 그 실행력에 박수를 쳐줄게. 그리고 네 배가 진짜 꾸르륵꾸르륵 부릉부릉 빵빵거릴 때 네 배를 가만히 문질러 줄게. 정말이야, 약속한다! (그렇지만 식탁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시도는 제발 하지말아줄래u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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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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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어지럽게 시선을 가로막았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들의 눈빛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든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실은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조용한 시간을 찾다가,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밤에 몰래 일어나 숨죽이고 읽었다. 그러다가 해가 뜨면 왠지 모를 안도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미국의 역사적인 흑인 노예 해방 조직인 '지하철도'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지하철도가 실제 기차였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은 밑으로 계속 이어지는- 시작과 끝을 아무도 모를 지하철도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가팔랐지만 돌이 평평한 면을 이루며 가지런히 놓여있어 내려가기 쉬웠다(81쪽)는 문장에서 지하철도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느껴졌다. (실제하는 지하철도에 처음 발을 내딛는) 그 순간만큼은- 코라도 저자도 그리고 나도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될 것이라고.

"그럼 노예들은 어떻게 돼요?"
먹을 것과 일자리, 집을 받죠. 원하는 대로 통행할 수 있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고, 그들이 기르게 될 아이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요. 일자리도 좋아요, 노예 일이 아니야. 이제 곧 직접 보게 될 거라니까.
(본문 중에서, 109쪽)

실로 그것은 눈앞에 있는듯했다. 하지만 자유라는 포장지 뒤에는 랜들농장에서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들이 숨어 있었다. 드러내놓고 노예라 칭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도망자였고- 노예 일은 아니지만, 노예와 비슷한 일들을 해야만 했다.
(특히 박물관에서 살아있는 전시물 역할을 하는 코라는 정말이지 슬펐다) 계속해서 숨어야 했고, 숨죽여야 했다. 코라는 정말이지 대단하게도 그 순간들을 잘 견뎌내지만,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감옥과 다름없는 곳을 누군가의 유일한 피난처로 만드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일까, 코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속박에서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그 그물 속에 있는 것일까. 도망자 신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자유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이었다. 숲을 가까이서 보면 나무들로 빽빽하지만 바깥에서, 텅 빈 초원에서 보면 그 진짜 윤곽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자유가 된다는 것은 사슬과는 혹은 얼마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대농장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바람을 쐬고 여름 별을 바라보며 제한 없이 움직였다. 작음 안의 큰 곳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주인에게서 자유롭지만 일어설 수도 없는 작은 토끼장 속을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본문 중에서, 203-204쪽)

사실 돌이켜보면 미국 노예해방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나 영화는 꽤나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전에 없던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코라의 탈출기가 생생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보다 코라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자유의 땅으로 가기를 바라는 독자의 마음이 어느새 지하철도에 실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었던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게 했다. 물론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이란 본디 그럴싸하고 결코 손에 닿지 않는 것이니. 어쨌거나 나는 코라의 오늘 밤이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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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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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많은 남자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대체 얼마나 더 평등해지기를 원하는 거야, 이미 충분히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 설마 여자라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거야? (...) 어쩌면 누군가는 그렇게 비아냥거리거나 헛웃음을 내뱉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건대) 세상은 아직 평등해지지 않았다. 남녀가 정말 평등하다면, '남녀평등'이라는 말도 사라져야 옳다. 그것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는다면, 굳이 그것을 지칭할 말도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남자한테는 절대로 그런 걸 안 물을걸요."
(...) 어떤 질문은 세상에는 여러 여자들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듯하다. 인간이라는 종의 51퍼센트는 여성이고 그 여성들은 나머지 49퍼센트 못지않게 다양한 욕구와 신비로운 욕망을 가진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문 중에서, 16쪽)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남녀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사실 출산전까지만해도 나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불평등한 세상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만큼 공부했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는 데 있어서도 불평등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임신과 동시에 주위의 걱정 어린 목소리들이 나를 이상한 길로 몰고 갔다. 굉장히 많은 이들이 내게 "아이 낳고서도 계속 일할 거야?"라고 물었다. "당연하죠."라는 나의 대답에 "아기 돌봐줄 사람은 있어?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빨리 어린이집에 보내는 건, 좀 불안하지 않아?"하는 질문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그게 모두, 엄마인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요?

사실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우리 사회는 그 모든 것을 '엄마'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래서 어제까지만 해도 사회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구성원들은 출산과 동시에 육아만을 전담하게 된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한 쪽에 안은 채로 다른 팔에 갓 태어난 아이를 받아든다. 슬프게도 두 가지를 병행하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나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려면 부모의 육아 못지않게 중요하고 긴요한 일들(예를 들어 글을 쓰고, 정치활동을 하고, 사회운동을 하고, 영화를 만드는)을 뒤로하고 아이에게 쾌적한 의식주를 제공하는 데 힘쓰기로 한다. (u_u....)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최근 다시 한번 열린 페미니즘 대화의 장은 더없이 반가웠다. 그것은 한편으로 여러 잔혹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그 잔혹한 문제를 둘러싼 침묵이 깨진 데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내에서의 성추행이나 캠퍼스 강간에 대한 대화들이 그렇다. 수많은 사연이 유례없는 규모로 널리 관심을 끌었다. 여성 혐오가 그나마 덜한 일부 주류 언론, 그리고 소셜미디어나 대안 언론의 페미니스트들이 만난 교차점에서는 격렬할 만큼 활발한 대화가 새롭게 일어났다.

아직, 과정 중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늘- 말해지지 않았지만 말해져야 할 것들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언어와 의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여자들이 있을 것이다. 침묵은 늘 깨지고 있고, 찰랑찰랑 밀려온 파도가 발자국과 모래성과 물에 씻긴 조개껍데기와 해초를 덮는 것처럼 다시 차오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관통하는 한 문단!)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본문 중에서,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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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링느링 해피엔딩 -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딸이 보낸 백만 분의 시간
볼프 퀴퍼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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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우선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청소를 한 뒤에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책상에 앉는다. 오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 몇 가지와 오늘 꼭 읽어야 하는 책, 적어도 이번 주에는 들어야 할 강의와 읽어야 할 논문들. 그러고 나면 별로 하는 것 없이 오후 세시가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이 오후 세시다) 요즘의 나는 그렇게 지낸다. 경력 쌓기, 생산성 향상과 자기계발, 보육 기관을 이용한 육아 아웃소싱, 회복을 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급하게 아이 픽업하기.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에 집중하자며 재택근무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언젠가'를 꿈꾸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잡기란 여전히 어렵기만 하고, 그 사이에서 허둥대는 사이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다른 모든 일에 시간을 쓰는데 쉬이 밀려난다. 예컨대 이런 것. 오늘 아침에도 아이의 등원시간은 복작복작했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고, 지하주차장의 자동차들이 밤새 무사했던지, 단지 내 모든 나무들이 건강한지 살펴야 했다. 나무 안녕, 빵빵 안녕! 하며 연신 손을 흔들어대는 아이를 붙잡고 '선생님이랑 언니 오빠들이 채니를 기다리고 있대! 우리 어서 가볼까?'하고 재촉한다. 맞다. 그건 정말 재촉이었다. 그러다 문득, 니나의 한 마디가 떠올라 그것을 그만두었다. 엄마, 조바싱 내지 마요.

아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특별했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개미가 멸종하지 않았네?(개미라는 존재를 자각하지 않은지 대체 몇해던가;ㅁ;...) 아파트 단지 안에 사과나무가 있었다니! 의외로 거미집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잖아? 하는 감탄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향을 틀어버렸기 때문에 발견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최단거리'만을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빠, 우리한테 백만 분의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멋진 일만 생기는 백만 분, 그치?
니나의 아빠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그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용기를 냈다는 것. 그래서 떠났다는 것. 백만 분의 시간이라 하면 엄청난 시간일 것 같지만, 따져보면 고작 2년 남짓한 시간이다. 하지만 2년 동안 그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이 먼저고 그다음 휴식, 현실이 먼저고 그다음 꿈, 잭팟이 먼저 터지고 그다음 여행-이라는 메커니즘에 익숙한 어른들에게는 더더욱!) 처음에는 백만 분의 시간 중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세어보는 데 급급했던 가족들도 점점 여행에 익숙해져갔다. 여행과 모험이 일상이 되자, 꿈이란 것 역시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딱 지금처럼 되고 싶어. 지금 우리는 여기 같이 있고 시간이 아주 많아. 우리는 우림을 마음껏 탐험하고, 얕은 물에서 잠수하고, 산에 오르고, 온갖 물건들을 발견하고, 시몬은 해변에서 걸음마를 배워. 나는 늘 꿈꿨어." (본문 중에서, 138쪽)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써 내려간 글이었다. 여유와 낭만이 흘러넘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와의 여행이 그럴 리가 없지!) 굳이 이유를 찾자면, 대자연 속에 푹 안겨있었기 때문이랄까. 무엇보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그들이 보기 좋았다.

느링느링 갈수록 시간이 많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쏜살같던 속도가 녹아내린다. 한순간 한순간, 한 방울 한 방울. 어쩌면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들로 이것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계가 녹아내리면 다시 거대한 시간의 바다가 생길 거라고. 고요하고 잔잔하고 햇살에 반짝이는 물, 끝없는 파란색, 수평선 끝까지. (본문 중에서, 80쪽)




+
웬만한 육아서보다 훨씬 좋은 육아서이기도 한 이 책.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우리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게 된다거나, 아이의 오늘보다 아이의 내일이 훨씬 더 신경 쓰이는 분들이라면 꼭꼭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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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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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는 말은 이따금 뒤따라오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것으로 만든다. 이를테면 '왜'가 '사는가' 혹은 '죽는가'라는 말과 함께 놓일 때. 삶이란 결국 무게를 견줄 수 없는 이 두 개의 질문이 번갈아 드나들며 파도를 만드는 어떤 해안선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혹은 너무나도 단조로워서 그 해안선을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것들은 대개 극단의 상황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적어도 전쟁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재난 소설이다. 하지만 그 재난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전쟁인지, 자연재해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인지), 그 원인이 무엇이었던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이 있었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건- 그들은 살아남았고, 살아가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상황이 어찌 됐건 간에) 앞으로도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황량한 세상은 생각보다 쉽게 왔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낯선 이를 마주하면 몸을 낮추고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판단된 다음에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살아남았네요'하는 인류애보다는 '둘 중 하나는 죽을지 몰라'하는 경계심이 더 컸다. 그것은 전쟁이든, 바이러스든, 자연재해든- 그 원인이 무엇이 됐든 간에 그것보다 더 큰 재앙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가 없다는 것.

어른들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말이란 감정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같았다. 말이 길어질수록 비난과 원망처럼 차디찬 감정이 찰랑찰랑 흘러넘쳤다. 언성 높여 싸우거나 흉한 말을 내뱉는 것도 아닌데 대화의 끝은 자꾸 서늘해졌다. 살아남은 것도 죄고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도 죄라는, 너나 나나 몹쓸 인간이라는 자조와 책망이 눈빛에도 말투에도 깃들어 있었다.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힘들어서라는 걸. 그래서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는 엄마의 죽음도 나의 삶도 견뎌 낼 수 없다. (본문중에서, 36-37쪽)

다행인 것은, 그곳에도 아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어린이는 아니지만, 아직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경험한 사회란 '학교'와 '가정'일 터. 나를 경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보듬어주는 사람이 많았던 환경일 것이다(물론 이들의 생활이 그리 원만치만은 않았지만). 어쩌면 그 점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괴담이나 거리낌 없이 난무하는 살인과 인신매매 사이에서도, 삶을 가치롭게 여길 줄 아는- 오늘을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그 태도가.

상자를 열어 봤다. 립스틱이었다. (......)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불행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 같은 것. (본문중에서, 42-43쪽)

재난 소설에서 재난의 종류와 그 경과를 싹 들어내고 나니, '사람들'이 더 잘 보였다. 그래서일까. 읽는 동안 여러 번 목이 타들어가듯 메말라졌고,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물을 들이켰다. 커피와 쿠키를 책상 앞에 가져다 놓은 적도 있지만,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더 공포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긴장감이, 도리와 지나가 만난 이후에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소설이 그것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을 질문을 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예컨대 건지의 에필로그 같은 것. 평생 묻고 또 물어도 알 수 없는 그런 것.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걷고 걸었다. 위험은 수없이 많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땐 그게 전쟁인지도 몰랐다. 뭔지도 모르고 사람을 죽였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게 가능할까. 그런 사람이 있을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세계는 뒤집어졌고 인류의 질서는 제로가 되었다.
생명은 여전히 고귀한가. 살인은 아직도 죄악인가. (본문중에서,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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