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링느링 해피엔딩 - 세상에서 가장 바쁜 아빠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딸이 보낸 백만 분의 시간
볼프 퀴퍼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우선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청소를 한 뒤에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책상에 앉는다. 오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 몇 가지와 오늘 꼭 읽어야 하는 책, 적어도 이번 주에는 들어야 할 강의와 읽어야 할 논문들. 그러고 나면 별로 하는 것 없이 오후 세시가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이 오후 세시다) 요즘의 나는 그렇게 지낸다. 경력 쌓기, 생산성 향상과 자기계발, 보육 기관을 이용한 육아 아웃소싱, 회복을 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급하게 아이 픽업하기.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에 집중하자며 재택근무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언젠가'를 꿈꾸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잡기란 여전히 어렵기만 하고, 그 사이에서 허둥대는 사이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다른 모든 일에 시간을 쓰는데 쉬이 밀려난다. 예컨대 이런 것. 오늘 아침에도 아이의 등원시간은 복작복작했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고, 지하주차장의 자동차들이 밤새 무사했던지, 단지 내 모든 나무들이 건강한지 살펴야 했다. 나무 안녕, 빵빵 안녕! 하며 연신 손을 흔들어대는 아이를 붙잡고 '선생님이랑 언니 오빠들이 채니를 기다리고 있대! 우리 어서 가볼까?'하고 재촉한다. 맞다. 그건 정말 재촉이었다. 그러다 문득, 니나의 한 마디가 떠올라 그것을 그만두었다. 엄마, 조바싱 내지 마요.

아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특별했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개미가 멸종하지 않았네?(개미라는 존재를 자각하지 않은지 대체 몇해던가;ㅁ;...) 아파트 단지 안에 사과나무가 있었다니! 의외로 거미집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잖아? 하는 감탄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향을 틀어버렸기 때문에 발견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최단거리'만을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빠, 우리한테 백만 분의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멋진 일만 생기는 백만 분, 그치?
니나의 아빠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그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용기를 냈다는 것. 그래서 떠났다는 것. 백만 분의 시간이라 하면 엄청난 시간일 것 같지만, 따져보면 고작 2년 남짓한 시간이다. 하지만 2년 동안 그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일이 먼저고 그다음 휴식, 현실이 먼저고 그다음 꿈, 잭팟이 먼저 터지고 그다음 여행-이라는 메커니즘에 익숙한 어른들에게는 더더욱!) 처음에는 백만 분의 시간 중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세어보는 데 급급했던 가족들도 점점 여행에 익숙해져갔다. 여행과 모험이 일상이 되자, 꿈이란 것 역시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딱 지금처럼 되고 싶어. 지금 우리는 여기 같이 있고 시간이 아주 많아. 우리는 우림을 마음껏 탐험하고, 얕은 물에서 잠수하고, 산에 오르고, 온갖 물건들을 발견하고, 시몬은 해변에서 걸음마를 배워. 나는 늘 꿈꿨어." (본문 중에서, 138쪽)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써 내려간 글이었다. 여유와 낭만이 흘러넘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와의 여행이 그럴 리가 없지!) 굳이 이유를 찾자면, 대자연 속에 푹 안겨있었기 때문이랄까. 무엇보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그들이 보기 좋았다.

느링느링 갈수록 시간이 많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쏜살같던 속도가 녹아내린다. 한순간 한순간, 한 방울 한 방울. 어쩌면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들로 이것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계가 녹아내리면 다시 거대한 시간의 바다가 생길 거라고. 고요하고 잔잔하고 햇살에 반짝이는 물, 끝없는 파란색, 수평선 끝까지. (본문 중에서, 80쪽)




+
웬만한 육아서보다 훨씬 좋은 육아서이기도 한 이 책.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우리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게 된다거나, 아이의 오늘보다 아이의 내일이 훨씬 더 신경 쓰이는 분들이라면 꼭꼭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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