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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평점 :
소설가가 밝히는 창작의 비밀, 이라 하면 일단 '어랏!'싶다. 더군다나 좋아하는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웬만해서는 모르기도 어려운 중혁작가가 밝힌 '창작의 비밀'.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호기로운 제목 역시 그답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대개 그렇듯, 그만의 묘수가 담겨있지는 않다. 대신, 책상 위의 친구들을 찬찬히 소개하고(메모롤은 언젠가 꼭 한번 써보고 싶다!), 글을 쓰지 않을 때의 일상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늦은 밤, 일을 모두 끝낸 다음 이불을 뒤집어쓰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 맞아, 이 느낌이었지'라는 감탄과 함께 독서 감각이 살아난다. 글자들이 춤을 추고, 문단들이 길을 만들고, 종이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고, 게임을 하는 것도 좋지만, 책을 읽을 때의 감각은 오직 책을 읽을 때만 살아난다. 미나리를 먹어야 미나리의 향과 식감을 맛볼 수 있듯(그래요, 저는 미나리 마니아!) 책을 읽을 때만 맡을 수 있는 산뜻하고 알싸하기도 한 책의 향기가 따로 있다. (본문 중에서, 62쪽)
그래도 읽다 보면, 그가 글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쓰는 것인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도 꽤 있다. 예컨대 첫 문장 쓰기. 에세이든 논문이든 소설이든 블로그 포스팅이든, 첫 문장은 늘 어렵다. 나의 선생님은 '차음 생각난 문장은 버리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역시 그와 비슷한 논지를 펼치고 있었다. 첫 문장을 쓰는 그의 방법은 이런 것. 첫 문장은 생각만으로 대충 쓴다. 아무 문장이나 가상의 모니터 화면에 띄운다. 그리고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문득 그게 첫 문장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문장을 지우고 첫 문장을 다시 쓴다. 이번에도 대충 쓴다. 그리고 다시 그 문장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여러 개의 문장을 첫 문장으로 써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첫 문장이 나타난다. 그 문장이 최선을 다한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하는 데까지 해본 문장'이라서 그렇다. 더 이상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첫 문장을 종이 위에 적는다. (본문 73-77쪽, 첫 문장 쓰기)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면 '잘 읽는 것'. 모든 글쓰기가 독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어떤 글을 쓸지 결정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새로운 책이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다면, 그 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발목을 붙잡는 책이 아니라 계단이 되는 책이어야 한다. 천천히 읽고, 낯설게 읽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읽고, 두 번 읽고, 부러 오독해가며 한번 더 읽기도 하고, 밑줄을 쫙쫙 쳐가며 혹은 작가의 문장들에 열심히 반박해가며 읽어도 봐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또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가 그 수많은 밑그림 위에다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그림은 또 다른 사람의 밑그림이 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 (김중혁, 비닐광 시대, 악기들의 도서관, 104쪽)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을 당신에게 영향을 받은 나만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아니 아주 미세한 빈틈이라도 찾아내보고 싶기에. 아,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읽고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창작의 비밀을 담은 숱한 책들에서 진짜 비밀 다운 비밀은 적히지 않은 이유. 어떻게 표현할지는 가르칠 수 있지만, 무엇을 표현할지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아,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