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달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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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뭉클하게 우리 마음을 깊이 울리는 그림책 작가 '안녕달'. 그의 신간이 나왔다(두근). 여느 그림책과 비슷하려니, 하고 주문했는데 받아보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255페이지라는 (그림책으로서는 보기 드문, 어마어마한) 볼륨! 그는 이 책 <안녕>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모두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책은 만남과 이별이 교차되는 지점들을 그리고 있다. (거의) 텍스트 없이 그림의 힘 만으로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데, 그림 하나하나에 묘사된 캐릭터들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를 떠올리게 하는 1장을 지나고 나면, <메리>를 떠올리게 하는 2장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2장은 소시지 할아버지와 강아지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우연한, 하지만 마치 필연인 듯 시작된 소시지 할아버지와 강아지의 인연은 날로 깊어진다. 완전한 타인이었던 그가 어느덧 내 삶에 들어와 그의 자리를 이만큼, 이만큼씩 날로 넓혀가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온전한 '나'이기만을 바랐던 소시지 할아버지가 어느 틈엔가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는 모습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장자를 읽는 중이라 더 그럴지도;ㅁ;...)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던 장면은 소시지 할아버지의 발밑에서 곤히 잠든 강아지의 배를 할아버지가 가만히 쓰다듬어주던 장면이었다.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두드린 끝에, 드디어 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떻게든 그중 한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을 마주한 이라면, 대개 소시지 할아버지에게 본인을 투영할 것이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달리하면- 계속해서 자신이 거절되더라도 끝까지 세상을 향해, 타인을 향해 문을 두드린 강아지가 보인다. 우리는 쉽게 소시지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라고 생각해버리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어떻게 하면 소시지 할아버지가 나를 예뻐할까?',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강아지가 있는 것이다.

소시지 할아버지가 사후세계에서도 강아지를 찾았던 것은,
위험하고 위태롭던 '폭탄 아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나를 멈추고, 너를 바라보는 데 집중한 강아지의 진짜 소통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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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방문객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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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허름한 빌라에서 28세 여성과 5살짜리 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집은 요금 체납으로 전기와 수돗물까지 끊긴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쉬이 그들의 죽음을 가난과 고독에 의한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에구구-'하고 지나쳤던 사건을 누군가 다시 취재한다. 56세의 저널리스트이자 대학 시간강사인 다지마. 오랫동안 혼자 살던 형은 고독사했고, 6년 전 이혼한 그도 언제 고독사를 맞이할지 모른다 생각했던지 그는 모녀의 죽음에 큰 분노를 느꼈다. 다지마는 이 사건의 성격을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고독사로 판단하고 지식인을 위한 월간지 '시야'에 실릴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가며 인사 정도 나누던 옆집 자매가 도움을 청해온다. 방문판매업자에게 고가의 정수기를 구입하도록 협박당하고 있다며. 그 일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경시청 형사의 요청으로 과거에 벌어진 방문판매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과연, 모녀는 정말로 굶어죽은 것일까?

 

"사시겠어요? 아니면 살해당하시겠어요?"

 

새빨간 현관문에 쓰인 한 문장은 볼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예상하다시피 이 소설 <한낮의 방문객>은 방문판매라는 형태로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파괴하는 범죄를 다루고 있는 추리소설이다. 모녀의 아사사건, 악질 방문판매업자의 등장, 네 건의 강도 살인사건. 굵직한 사건들이 툭툭 튀어나와 주인공 다지마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까지도 헷갈리게 되지만- 관계자의 입으로 언급되는 감금 살인사건의 실체가 밝혀질수록 그 끈적한 속도감은 빛을 발한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범죄는 사실 그 자체로 끔찍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일상성에 소름이 돋곤 한다. 그러니까 그 일이 소설 속 그녀들에게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다. (지난주, 새 아파트로 입주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낯선 이들이 집으로 방문한다. 하자 보수를 하러 오는 이도 있고, 아파트 상가에 오픈한 가게와 학원을 홍보하러 오는 이도 있다. 모르는 사이 쓱 내 가까이로 와 있는 전단지를 더 밀어낼 길이 없어 받아든다. 사실, 그들이 건네주는 사탕, 물티슈, 음료 등에 무엇이 어떻게 섞였을지 알 길이 없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것들을 한치의 의심 없이 받아먹었던 내가 바보 같다 생각되었다. 동시에 그런 작은 것까지 의심해가며 살아야 하는 오늘 우리의 사회가 너무 팍팍하다 생각됐다.

선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들이지만, 결코 가상의 상황이라 여겨지지 않아 섬뜩했던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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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이은소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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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사에 의하면 현대인 4명 중 1명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말이 거창해 정신질환이지, 사실 '마음이 아픈 것'이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이 따갑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는 스스로가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몸이 묶인 것도 아닌데, 우리의 마음은 밧줄보다 더 단단한 무엇인가로 어딘가에 묶여있다. 그것이 어디인지, 무엇으로 묶어놓은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아 더욱더 답답할 뿐이다.

 

소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촉망받던 의관 유세풍이 시골 자그마한 의원에서 심의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다. 심의가 되어가는(유세풍이 되어가는) 초반 몇몇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병자의 에피소드에 집중된다. 기구한 사연의 병자들은 그 어느 하나 안타깝지 않은 자가 없다. 오줌싸개 서자, 치매 걸린 화냥년, 우울증 수절 과부, 알코올 중독 광대, 히스테리 비구니까지. 시골 자그마한 의원이라지만 그곳을 운영하는 계지한의 실력도 꽤나 출중해 보이고, 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료비를 강요하지 않는 곳이라 의원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침술이나 진맥, 약 처방은 기술이야.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지. 하나 심의가 되는 길은 배울 수도 없을뿐더러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야. 병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돌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해. 하여 어떤 면에서는 내의원에 입격하는 것보다, 이름난 침의가 되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게야. 병자를 대면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게야. 병자가 손목은 내밀어도 마음은 잘 보여 주지 않으니까. (본문 중에서, 116쪽)

 

모든 일에 늘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세엽은 '세풍'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비로소 진짜 자신의 삶을, 진짜 의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저 아낙들의 이야기나 듣고 공감해주면 된다는 주문은 그로 하여금 '듣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는 곧 심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세풍이 만난 병자들의 증상은 제각각이었지만, 그가 병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치유해주는 과정은 그 본질이 모두 같았다. 그들의 마음을 읽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것.

 

세풍을 찾은 병자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신분이 천하거나, 돈이 없거나, 힘이 없었다(조선 시대에 여성이라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약자였다). 세풍은 그들의 마음을 다정하게 맞잡으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라는 말을 건넨다. 엄연한 계급사회였던 조선 사회에서 그런 말은 너무 이상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들이 그저 따뜻한 위로로 전해져 왔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오늘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돈이 없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시대를 서러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뻔하지 않게 읽혔던 것은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심의라는 설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유의 긍정적인 문체는 물론이고(조선의 해학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달까)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들을 배치해 이야기에 개연성을 높인 것, 심리학의 개념들을 한의학에 접목시키려 했던 노력들이 인상적이었다. (실로 작가는 <동의보감>, <황제내경>, <한의학 대사전> 등 한의학 서적과 논문을 약 1년간 탐독하고 조사했었다고 한다.)

 

 

 


+ 무엇보다 때때로 마음에 사이다를 들이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나는 장면에서 그가 대신 화내주어 정말 고마웠다. (특히 은우를 구해내는 에피소드에서)
+ 모르긴 몰라도, 곧 드라마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 전개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매력적이라 소설로만 남게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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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페미니즘
코트니 서머스 외 지음, 켈리 젠슨 엮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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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다. 정확히는 아이를 임신하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체로 평등하다 생각하며 살았던 나의 세상은 임신과 동시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버렸다. 나는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아이가 무서운 속도로 제 몸을 키워가고 있는 만큼 나는 '엄마'라는 사회적 틀 속으로 갇히고 있었다.

'엄마니까 이래야지'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많은 것들을(아니, 사실은 거의 모든 것들을) 엄마라는 이름과 맞바꾸게 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마치 해가 뜨면 언젠가는 져야 하지 않겠냐는 듯한 말투와 시선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제껏 쌓아온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내 두 손에는 더 높이 쌓아올릴 블록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생각하면서도, 왜 이 모든 희생이 여자에게만 강요되는지에 대해 끝없이 화가 났다. 그리고,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이 아이가 나와 같은 절망감과 좌절감만은 느끼지 않기를 바라며,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해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다행히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육아가 메인인 삶을 살고 있다). 흔히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아주 급진적인, 혹은 배타적인 어떤 것을 떠올리는데 사실 페미니즘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학적인 성을 헛갈려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평등은 남자도 자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막 29개월에 접어든 딸아이는 매달리기와 공놀이를 좋아한다. 인형으로 하는 역할극도, 쿠키나 팬케이크를 만드는 요리 놀이도 좋아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는 '남자다운 것' 혹은 '여자다운 것'이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저 아이는 다양한 활동을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시선 속에는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이 섞여 있다. "여자애가 저렇게 험하게 놀아서야..."라는 말을 종종 듣는 나는 아이가 보란 듯이 더 험하게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왜 루피는 분홍색일까, 왜 루피만 요리를 할까? 왜 벨라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속상함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울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연중에 받게 되는 남성 친화적 메시지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내재해 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역할이다. 여자는 누가 구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 여자는 마법사가 아니라 그 남자 마법사의 조수다 등등)

딸아이는 한 걸음씩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활짝 열린 지금의 마음은 학창 시절을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닫힐 것이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혹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라고(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말해줄 날이 올까 봐 두렵다.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할 문이 그 애가 여자라는 이유로 면전에서 닫힌다면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울 것만 같다.

 

"페미니즘은 완벽한 여성 한 사람의 발에 꼭 맞는 유리 구두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되어야 한다. 그 우산은 우리를 서로에게서도 보호해야 한다."

이 책 <나다운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44명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집이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여성들과 남성들의 목소리를 한데 녹여내 읽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나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 모두에게 꽤나 무거운 짐이 지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딸아이를 키워내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로운 생각이다. 여성이 여성다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에서 해방된다면, 남성 역시 남성다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나답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존중받는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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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쉬고 싶다 -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한 카르페 디엠
니콜레 슈테른 지음, 박지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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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의 의미는 시대와 사회적 가치에 따라 변화해왔으며, 선호하는 프레임에 맞게 받아들여졌다. 고대 이집트의 귀족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태도로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인성과 창의성을 개발할 이상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심심함을 '자유의 동생'이라 평하기도 했다. 네로 황제의 선생이었으며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휴식을 삶의 필수 요소로 여겼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한가함에 대하여>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책에서 세네카는 휴식이 있는 삶을 높이 평가했다. 여유는 생활에 균형을 가져다주며, 인간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는 위험을 막아줄 수 있다고 말이다. (본문 중에서, 9-10쪽)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휴식이란 무엇일까. 휴식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가함을 즐기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 사회의 문화는 너무 효율만을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잃었고, 사색하고 긴장을 풀고 창의력을 높이기 위한 시간과 공간도 잃어버렸다. 무작정 하루에 한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외치는 것이 아니다. (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엄청나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의 변화 같은 것 말이다) 휴식의 시간이야말로 개인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의 필요를 위해 사용되는 시간이니 소중히 하자는 것이다.

 

이 책 <혼자 쉬고 싶다>는 '휴식'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이론과 방법들을 소개한다. 저자 스스로가 휴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자신을 쉬게 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휴식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 휴식의 형태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에게 휴식은 독서일 테고, 어떤 이에게는 맥주 한 잔, 또 다른 이에게는 목욕이나 산책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는가, 그로 말미암아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는가, 인생의 의미를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휴식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아닐 수 있다)

 

그럼, 전문가가 말하는 '휴식'의 정의에 대해 들어볼까.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연구팀은 휴식을 "목적과 관계없이 집중하고 있는 창조적인 상태"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상태는 대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일에 몰두할 때 경험할 수 있다. 연구팀은 또한 휴식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가 휴식을 통해 '시간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휴식을 경험할 때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 휴식의 특징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정의로는 철학자 귄터 피갈 교수가 제안한 것인데, '휴식은 자유와 편안함 속에서 행하는 만족스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실제 경험으로 확인한 바 있다. 즉, 휴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도적인 동기이자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114쪽)

 

(책이 중간중간에 그렇게 하듯) 나에게 질문한다. 나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가. 언제 어디에서 만족스러운 순간을 경험하는가. 나는 시간에 쫓기듯 살고 있는가, 혹은 여유롭게 시간을 통제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기간의 휴가를 보내고 싶은 열망이 내게 있는가.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고 싶은가. 그리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순간에 만족을 느끼고 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그것들을 재미있게 잘 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그런 대답을 하면서, 아, 정말 즐겁게 살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느꼈다.


<혼자 쉬고 싶다>는 제목을 읽었을 때, 바다 한가운데 몸을 누인 그녀를 보았을 때-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나는 요즘 너무 바쁘니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으니까 조금은 내려놓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러니까 '휴식'의 정의에 대해 고민해보면서 나는 지금 충분히 충만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큰 안식이 되었다. 그냥 이렇게 읽고 쓸 수 있는 일요일 오후면, 시원한 아이스라떼 한 잔이면 충분하다.


+
그럼에도, 욕심쟁이처럼 노트에는 이렇게 썼다.
내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인 목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하며, 어느 길이 내게 가장 옳은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기로 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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