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페미니즘
코트니 서머스 외 지음, 켈리 젠슨 엮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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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다. 정확히는 아이를 임신하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체로 평등하다 생각하며 살았던 나의 세상은 임신과 동시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버렸다. 나는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아이가 무서운 속도로 제 몸을 키워가고 있는 만큼 나는 '엄마'라는 사회적 틀 속으로 갇히고 있었다.

'엄마니까 이래야지'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많은 것들을(아니, 사실은 거의 모든 것들을) 엄마라는 이름과 맞바꾸게 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마치 해가 뜨면 언젠가는 져야 하지 않겠냐는 듯한 말투와 시선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제껏 쌓아온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내 두 손에는 더 높이 쌓아올릴 블록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생각하면서도, 왜 이 모든 희생이 여자에게만 강요되는지에 대해 끝없이 화가 났다. 그리고,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이 아이가 나와 같은 절망감과 좌절감만은 느끼지 않기를 바라며,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해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다행히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육아가 메인인 삶을 살고 있다). 흔히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아주 급진적인, 혹은 배타적인 어떤 것을 떠올리는데 사실 페미니즘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학적인 성을 헛갈려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평등은 남자도 자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막 29개월에 접어든 딸아이는 매달리기와 공놀이를 좋아한다. 인형으로 하는 역할극도, 쿠키나 팬케이크를 만드는 요리 놀이도 좋아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는 '남자다운 것' 혹은 '여자다운 것'이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저 아이는 다양한 활동을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시선 속에는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이 섞여 있다. "여자애가 저렇게 험하게 놀아서야..."라는 말을 종종 듣는 나는 아이가 보란 듯이 더 험하게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왜 루피는 분홍색일까, 왜 루피만 요리를 할까? 왜 벨라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속상함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울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은연중에 받게 되는 남성 친화적 메시지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내재해 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역할이다. 여자는 누가 구해줄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 여자는 마법사가 아니라 그 남자 마법사의 조수다 등등)

딸아이는 한 걸음씩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활짝 열린 지금의 마음은 학창 시절을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닫힐 것이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혹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라고(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말해줄 날이 올까 봐 두렵다.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할 문이 그 애가 여자라는 이유로 면전에서 닫힌다면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울 것만 같다.

 

"페미니즘은 완벽한 여성 한 사람의 발에 꼭 맞는 유리 구두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되어야 한다. 그 우산은 우리를 서로에게서도 보호해야 한다."

이 책 <나다운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44명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집이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여성들과 남성들의 목소리를 한데 녹여내 읽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나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밝은 분위기가 좋았다. 모두에게 꽤나 무거운 짐이 지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딸아이를 키워내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로운 생각이다. 여성이 여성다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에서 해방된다면, 남성 역시 남성다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나답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존중받는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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