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하얀 생쥐
마르 베네가스 지음, 안드레아 안티노리 그림, 남진희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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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쁘고 새하얀 생쥐. 너무너무 깔끔한 생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새하얀 털옷만은 더럽히고 싶지 않단다. 그래도 먹이는 찾아야 할 터. 어느 봄날, 바람에 날리는 씨앗을 쫓아 멀리까지 나가게 되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만다. 그렇게 시작된 생쥐의 첫 모험, 혹은 첫 여행.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던 생쥐는 바람의 집을 만나고, 이어 불의 집, 물의 집에 문을 두드리게 된다. 길을 잃어 당혹스러운 마음, 두려웠던 마음은 차차 사라지고 세상을 만나는 기쁨에 한껏 들뜬 생쥐. 새하얗던 몸이 검게 변할수록 생쥐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기쁨이 가득 차오른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끝. 이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하얀 생쥐>는 누구나 쉽게 떠올려봄직한 위기와 극복, 성장의 과정을 담았다.

 

그림이 예뻐서인지 아이가 이 책을 좋아했다. 해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자주 읽었다.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 시간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1.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생쥐는 새하얀 몸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밖에는 재미난 것들로 넘쳐난다. 친구들이 있고, 모험이 있고, 위기와 극복의 과정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2. 외면이 잠시 변하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불의 집을 지나온 뒤, 물의 집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생쥐가 부드러운 물결에 휩쓸리며 목을 축일 때, 새까맣던 생쥐가 하얀 제 몸의 색을 찾았을 때 아이는 얼마나 신나하던지. 사실 까만 생쥐와 하얀 생쥐는 전혀 다른 생쥐라 해도 믿을법한데, 아이는 귀신같이 같은 생쥐라고- 생쥐가 목욕해서 흰색이 된 거라고 내게 일러준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자꾸 잊게 되는 것. 외면이 잠시 변하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3. 너의 최초의 발걸음을 응원해.
돌아올 집이 있었기 때문에 생쥐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완전히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헤맬 수 있었을 테고, 순간의 경이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는 순간, 생쥐는 자유를 얻었다. 처음 만난 자유의 순간이기 때문에 어리둥절했으나, 생쥐는 금세 그것에 적응했다. 그렇게 바람을, 불을, 물을, 숲을 만났다. 최초의 발걸음은 늘 두렵다. 그 두려움을 깨고 나아가는 딱 한 걸음의 용기. 네게도, 내게도 늘 필요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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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필로테라피 4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이주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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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불편함에 몸을 뒤트는 우리에게 '고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그대가 느끼는 불편함이 불쾌하거나 참을 수 없는 것이라 가능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 생각하는지, 혹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는지. 또 이런 질문도 던진다. 고통에서 무조건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으응? 그럼 평생 고통 속에 살아도 좋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뒷얘기를 들어보면 또 고개가 갸웃해진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지 수년이 지나, 이제 그를 떠올려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의 회복이 과연 건강한 것인지에 대해서다.

그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면, 절망을 불행한 과거처럼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절망할 줄 안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외려 더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느끼는 마음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고민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를 때 실존적인 고민은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이처럼 이 책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는 절망과 불안의 감정에 대한 조금은 새로운 처방전을 내린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는 그의 단언은 어쩐지 위로가 되고,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냉철하게 쓰인 그의 글은 외려 뜨거운 애정으로 와닿는다. 책을 읽는 동안, 지금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무수히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했던 방식으로 생각의 각도를 조금 뒤틀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리 보였다. 어떤 문제에 너무 깊숙이 빠져 있는 내가 (그제서야) 보이기도 했고, 문제가 아닌 문제들도 더러 있었다. 또 어떤 문제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했다. 마치 아담이 금단의 과일을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게 되며 동시에 죽는다는 금지의 법과 경고를 신에게서 받았던 것처럼.

'근대 인간'은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때문에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세상은 화려해졌고, 많은 것들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쉴 새 없이 많은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인다. 우리는 때로 그것이 자유라 믿으며, 인위적인 삶에 쉽게 만족해버린다. 하지만 정말, 오늘의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다 보니' 오늘을 살고 있네- 하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라는 불안한 가능성을 다시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오늘도 불안 속에 있는 나에게, 또 우리에게- 칸트의 응원을 던진다. 용기를 내, 너만의 분별력을 사용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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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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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만 이야기하게 돼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죠. 혹은 내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과거의 나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도 그저 이야기하다 보면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 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구나. 나는 이런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이요. 하지만 이것들은 그리 흥미롭거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아니죠. (이야기의 이야기, 36쪽)

다섯 편의 단편 소설과 한 편의 중편 소설이 <청귤>이라는 타이틀로 묶였다. 보통 소설집을 읽을 때 작품과 작품 사이에 물리적인 시간을 조금 두는 편이지만, 어쩐지 김혜나의 소설집은 단숨에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로 좀 그랬다. 인물도 배경도 모두 달랐지만,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특히 어릴 때 뇌수막염을 앓아 사시가 되었다는, 그래서 줄곧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어려서의 그 경험은 성인이 된 인물 개개인에게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수록 작품인 <그랑 주떼>를 거의 다 읽었을 무렵- 어쩌면 이들이 다 같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청귤>의 미영과 지영, <그랑 주떼>의 예정과 리나. 언뜻 보면-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 한 사람 같다 느껴진다. 서로를 향한 동경은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결국 그들은 하나 되는 순간의 짜릿한 경험을 한다. 그 동경을 동성애로 읽어야 할까, 고민했던 <청귤>의 섹스 신은 <그랑 주떼>에서 예정이 리나를 업고 달리는 신을 만나면서 뭔가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완전함을 드러낸다.

나는 오로지 진실을 이야기해요. 단 한 번도 거짓을 이야기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적이 없어요. 이제까지 내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이 다 진짜였어요. 진짜 '나'의 이야기였다고요. 그 안에는 한 치의 거짓도 꾸밈도 없었어요. (이야기의 이야기, 37쪽)

놓칠 뻔했던 '작가의 말'은 또 하나의 소설 같았다. 그것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했다. 그녀는 작품 속 인물들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그저 소설 속 한 문장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소설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녀가 언젠가 한 번쯤 꺼내 보이고 싶었던 마음들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생각이(어쩌면 상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문득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정말이지 꺼내 보이기 어려운 마음들이니까. 조금은 민망하고, 창피한. 하지만 '나'의 어떤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는.

<청귤> 속 '영'은 스스로를 '겉보기에만 멋지고 신비로워 보일 뿐 실제로는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청귤 같은 존재(청귤, 70)'라 생각한다. 그 실제가 어떤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해준 것 같아 좋았다. 말려서 약에도 쓸 수 있고, 썰어서 청으로 만들 수도 있다며 '청귤'의 효용성과 유용성을 이야기해주는 또 다른 '영'은 더 좋았다. 책을 덮고서야 띠지에 적힌 한 줄이 눈에 들어온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 당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당신의 이야기가 내게 무사히 도착해서- 정말이지 다행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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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로 간 소신
이낙진 지음 / 지식과감성#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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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오랜만에 수필집을 읽었다. 수필이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가볍고, 또 지나치게 감상적인 느낌이라 주저하게 되었었는데 이 책 <달나라로 간 소신>을 읽으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것이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수필은 본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니라고 한다. 수필은 철학의 세계관과 소설의 구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장르다. 수필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 때문에 이야기들은 단편적이지만 그것은 구체적이고 이 관념적이라고 했다. 또한 단편적인 혹은 삽화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에 비체계적이고 반체제적이지만 그 이야기들에는 진솔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도 했다. (좋은 수필을, 좀 더 찾아 읽어보고 싶어지는 이유다)

 

이 책 <달나라로 간 소신>은 두 번 쓰였다. 10여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최근에 다시 한번. 가득 채운 네모 한 칸이 10여 년 전에 쓰인 글의 표식이고, 최근에 쓴 글 앞에는 가득 채운 네모 두 칸이 붙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다소 감상적이거나 동화 같다 생각했던 부분도 네모 두 칸의 섹션으로 넘어오면서는 사그라들었다. 그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을 때, 나는 은이와 윤이(그의 딸들 이름이다) 또래였다가 그의 동료쯤 되었다가 했다. (실제로는 그들 사이 중간 어디쯤이다만)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아빠가 젊은 날 했을 고민들을 매만져보니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그의 글쓰기에 항상 '읽기'의 과정이 녹아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소소한 일상의 구체적 사건, 아주 은밀한 감정의 서술에도 읽기가 따라붙었다. '읽는 인간, 쓰는 존재'라는 어느 출판사의 문구를 참 좋아하는데- 그것이 실천되면 이런 모양새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쓰는 일은 읽기를 딛고 일어선다 했다. 정말이지 치열하게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진다. 그런 과정들이 글에 자연스럽게 녹아, 햇빛이 되었고 구름이 되었고 무지개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의 글쓰기라, 탐이 나기도 했다. 그가 해왔던 만큼 읽고 쓴다면 언젠가 내게도 그런 빛이 자연스레 새어 나올까, 궁금했다.

삽시간에 너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다. 아직 그를 잘 모르는데, 그를 너무 잘 알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수필의 매력이려나- 어쨌거나, 읽고 쓰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데에 작은 동력기를  하나 더 달고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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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3
공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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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하면 탁, 하고 떠오르는 한 글자 ’. <논어>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마주하게 되는 것 역시 ’이었다. 그런데 ’이란 무엇일까. 공자가 <논어>에서 그것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것은 인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거꾸로 인을 가진 이는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1.3 / 공자가 말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용모가 빼어난 자들이 인덕한 경우는 드물다.
4.2 / 공자가 말했다. "인덕을 갖추지 못한 자는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 수 없으며 또 오랫동안 안락하게 살 수 없다. 인자는 인도에서 안락하며, 지자는 인이 이로운 것을 알아 인을 행한다."
4.3 / 공자가 말했다. "오직 인자만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를 판별할 수 있다."


인한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알고, 그에 따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때문에 공자의 인은 때로
이기도, 이기도, 이기도, 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을 형성하는 일부일 뿐, 그 자체는 아니다. 공자가 <논어>를 통해 말하고 있는 의 개념은 그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이상적이다. 때문에 을 아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논어>를 읽고 생각한 바로, 은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부모에게 닿으면 효가 되고, 나라에 미치면 충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마음을 관찰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니, 3년 상을 잘 준수한다면 가히 효라 할 수 있다(1.11)'라던지, '장중한 태도로써 백성들을 대우하면 그들은 곧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부모에 효순하고 자제에 자상하면 백성들은 곧 당신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선량한 자를 기용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가르치면 백성들은 곧 서로 권면하여 노력할 것입니다.(2.20)'라는 구절을 되새겨보면, 공자 역시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공자의 '더불어 삶'은 굉장히 도덕적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것이 <논어>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옮겨 적은 것이라 그런지, 유교 사상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술술 읽혔다. 유명한 구절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조각난 채로 읽었던 탓도 있겠고, 아직 우리 사회에 유교의 뿌리가 남아 큰 반감 없이(혹은 물음표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곳곳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문장들이 있어 필사하기도 했다. 이 책이 수 천년을 견뎌 오늘에까지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날카로움이 아닐는지.

 

 

 

 

덧+
1. <논어>는 문장이 간략하지만 그에 함축된 바가 많아서 예로부터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속출하였다 한다. 실제로 이 책과 함께 여러 권의 <논어>를 함께 읽었는데- 한자 하나를 두고 해석하는 바가 다른 경우도 왕왕 있었다. 또 제자들이 묻는 말에 공자가 답하는 형식이라, (제자들의 질문은 쓰여있지 않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 답이 있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2. 책은 머리말에서 '오늘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논어>가 만들어졌던 공자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추론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지만, 어떤 책이든 쓰인 때보다 읽히는 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 문장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 제아무리 좋은 글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이에게(자식에게, 혹은 제자에게) 직접 전하는 말보다 더 진하기 어렵고 그렇다면 이 글 역시 공자의 '찌꺼기'일 뿐일진데-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와닿지 않고 거기,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대체 왜 이것을 이제 와 읽어야 한다는 것일까.
3. 공자는 서재에 틀어박혀 글만 공부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 외려 흥미로웠다. 사마천의 사기에 적힌 바로는 키가 221cm씩이나 됐다는데,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예의 바르며,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외모를 상상하며 읽으니 더 재미났던 부분도 있었다. (행실과 관련한 부분에서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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