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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나는 그렇게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만 이야기하게 돼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죠. 혹은 내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과거의 나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도 그저 이야기하다 보면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 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구나. 나는 이런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이요. 하지만 이것들은 그리 흥미롭거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아니죠. (이야기의 이야기, 36쪽)
다섯 편의 단편 소설과 한 편의 중편 소설이 <청귤>이라는 타이틀로 묶였다. 보통 소설집을 읽을 때 작품과 작품 사이에 물리적인 시간을 조금 두는 편이지만, 어쩐지 김혜나의 소설집은 단숨에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로 좀 그랬다. 인물도 배경도 모두 달랐지만,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특히 어릴 때 뇌수막염을 앓아 사시가 되었다는, 그래서 줄곧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어려서의 그 경험은 성인이 된 인물 개개인에게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수록 작품인 <그랑 주떼>를 거의 다 읽었을 무렵- 어쩌면 이들이 다 같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청귤>의 미영과 지영, <그랑 주떼>의 예정과 리나. 언뜻 보면-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 한 사람 같다 느껴진다. 서로를 향한 동경은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결국 그들은 하나 되는 순간의 짜릿한 경험을 한다. 그 동경을 동성애로 읽어야 할까, 고민했던 <청귤>의 섹스 신은 <그랑 주떼>에서 예정이 리나를 업고 달리는 신을 만나면서 뭔가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완전함을 드러낸다.
나는 오로지 진실을 이야기해요. 단 한 번도 거짓을 이야기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적이 없어요. 이제까지 내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이 다 진짜였어요. 진짜 '나'의 이야기였다고요. 그 안에는 한 치의 거짓도 꾸밈도 없었어요. (이야기의 이야기, 37쪽)
놓칠 뻔했던 '작가의 말'은 또 하나의 소설 같았다. 그것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했다. 그녀는 작품 속 인물들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그저 소설 속 한 문장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소설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녀가 언젠가 한 번쯤 꺼내 보이고 싶었던 마음들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생각이(어쩌면 상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문득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정말이지 꺼내 보이기 어려운 마음들이니까. 조금은 민망하고, 창피한. 하지만 '나'의 어떤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는.
<청귤> 속 '영'은 스스로를 '겉보기에만 멋지고 신비로워 보일 뿐 실제로는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청귤 같은 존재(청귤, 70쪽)'라 생각한다. 그 실제가 어떤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해준 것 같아 좋았다. 말려서 약에도 쓸 수 있고, 썰어서 청으로 만들 수도 있다며 '청귤'의 효용성과 유용성을 이야기해주는 또 다른 '영'은 더 좋았다. 책을 덮고서야 띠지에 적힌 한 줄이 눈에 들어온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 당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당신의 이야기가 내게 무사히 도착해서- 정말이지 다행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