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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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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기, 손바닥만 한 파이가 하나 있다. 세 명의 사람들이 이 파이를 나누어 먹을 것이다. 세 사람은 어떻게 파이를 나눠먹을까? 상상할 수 있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파이를 세 조각으로 동등하게 나누어 한 조각씩 먹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가 파이를 만드는데(혹은 구입하는데) 가장 기여도가 높았는지 합의하여 그에게 좀 더 큰 파이 조각을 나누어 주는 방법이다. 세 번째로는 나누지 않고 한 사람이 다 가져가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파이를 나누어먹으면 그 누구도 만족스럽게 파이를 즐기지 못할 터, 세 번째 경우라면 한 사람은 파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다.
평등平等.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국어사전의 '평등'은 매우 이상적이다. 위의 상황에서 평등이란 첫 번째 경우, 다시 말해 파이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먹는 경우가 그에 해당될 테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손바닥만 한 파이를 세 조각으로 나누면 아주 작은 조각만을 맛볼 수 있게 된다. 행여라도 세 사람이 허기진 경우라면,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평등이란, 그것의 정의만큼 마냥 이상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책 <평등은 없다>의 첫 장을 열자마자 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미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들의 소득이 지나치게 불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중에 빈곤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소득을 똑같이 빈곤선 아래로 맞춰 버리면 소득 불평등은 확실하게 제거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똑같이 빈곤하게 만듦으로써 소득 평등을 달성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소득 불평등의 제거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날로 극심해지는 사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하면 좋을까.
책은 경제적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동일한 몫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덕의 관점에서는 각자가 충분한 몫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18쪽)라고 쓰고 있다. 나는 '충분한 몫'이라는 데 밑줄을 좍 그었다. 문제는 불평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몫을 받지 못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게 그거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평등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문제를 잘못 짚는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빈곤과 과도한 풍요를 모두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 결과는 분명 불평등의 축소일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의 축소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경제적 평등은 반드시 실현해야 할 도덕적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회의 구성원 일부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소유함으로써 안락함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다수의 구성원은 가진 것이 너무 적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꼭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을 때는 그 사람에게 평균 이상의 높은 보수를 주어야 한다. (몹시도 당연한 경제 원리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을 허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평등'이라는 말속에 숨은 선한 이데올로기가 묘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평등이라도-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언제나 오류일 수밖에 없다. 실현되는 것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평등주의적 이상은 없다. 평등을 위한 노력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평등 자체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해서가 아니라, 그런 노력이 다른 가치의 확산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평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대가 막연히 좋다고만 생각했던 '평등'은 정말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