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니스 - 잠재력을 깨우는 단 하나의 열쇠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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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낮잠 시간, 설거지도 쌓여있고 오전에 했던 물감놀이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지만- 잠시 그대로 두고 서재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동화를 들려주는 오디오 클립도, 장난감 소리도, 아이의 재잘거림도 없는 고요한 시간. 이 시간을 청소와 설거지로 보낼 수는 없다.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책을 읽었다. 하필 집어 든 책도 '고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 <스틸니스>는 우리에게 '고요'가 왜 중요한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여러 사례를 통해 역설하고 있다. 삶의 고요한 순간이 오늘을 사는 데 어떤 에너지가 되는지 잘 알고 있는 저자는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고요를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 마음이 읽는 내내 그대로 전해져와 좋았다.

인류의 모든 문제는 홀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무능함에서 유래한다.

1654년,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본문 중에서, 20쪽)

우리의 삶은 바쁘게 흘러간다. 확인해야 할 정보는 시시각각 쏟아지고, 조금만 느긋하게 굴면 확인해야 할 메일, 메시지들이 눈덩이처럼 쌓여 우리를 짓누른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고 해서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람은 우리 손안에서 계속해서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달리고 있는 문제의 규모와 절박함은 현대의 것이지만, 사실 그 뿌리는 시대를 초월한다. 실제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내면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잠재우는 힘, 느긋한 마음을 갖는 힘,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는 힘, 그리고 우리의 신체를 지배하는 힘을 기르는 일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극도로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스칼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고요'란 무엇일까. 우리 각자에게 '고요'란 무엇일까.

최근 몇 달 동안, 오전 6시 15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은 이미 출근한 시간이라, 아이가 깨기 전까지 모든 공간이 고요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시간을 보낸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밀린 업무를 한다거나, 메일을 확인해야 할 것 같은;ㅁ;)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난 시간은 소중하다. 평소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아주 작은 소음들(냉장고라던가, 정수기가 돌아가는)만이 이 공간이 진공상태가 아님을 알려준다. 이때, 시간은 정말이지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이 시간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고 있다. (코로나는 내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u_u)

그러니 내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안의 고요'가 필요하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거의 유일한 길이며, (꼭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갖다 대지 않더라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일상의 분주함을 이런 식으로라도 저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면에서 '자기 안의 고요'를 찾는 일은 나를 갈고닦는 일. 케이지의 <4분 33초>를 감상하면서, 무위를- 나의 고요를 다시 다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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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판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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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그 초조함과 불안함이 일찍 왔다. 그러니까 아마도 마리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처음 만났던 뫼르소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그 이후에는 괴팍하거나 조금 불안한 인물이었다면- 이번에는 뭐랄까, 부유하는 이미지에 맞닿아있었다. 맞다.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을 끝내고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바다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때의 감각, 그러니까 세계의 중력이 조금은 무너지고 차가운 바닷물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풀어놓는 그 기분이 소설 전반을 압도했다. 바다에 몸을 맡기는 것은 분명 이 세상의 일이지만, 이 세계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속에서는 땅을 딛고 두 발로 서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법칙이 작동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바다에 몸을 맡기는 것이 두렵고, 또 무섭다. 상대를 모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의 실체와 상관없이, 그것이 나를 언제고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안게 된다. '이방인'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방인'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제3국이 아닌 전혀 다른 풍토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우리가 아는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뫼르소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가 사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자기와 결혼하고 싶은지를 묻는 마리의 말에 '그건 하나 안 하나 같은 거지만 만약 네가 그걸 원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본문 중에서, 65쪽)'라던 뫼르소의 대답도 낯설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도 이 세계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태양 살인은 가능한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날의 햇볕은 엄마를 묻던 날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고, 뫼르소는 그 뜨거움 때문에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아랍인은 칼을 뽑아 뫼르소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아랍인이 겨눈 것은 (뫼르소에게) 칼이 아니었다. 칼 위에서 반사되어 뫼르소의 이마를 찌른 빛이었다. 그 순간을 표현해낸 두 문장, "나는 이마에서 울려 대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희미하게, 여전히 내 앞의 칼날로부터 찔러 오는 눈부신 단검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불타는 칼은 내 속눈썹을 물어뜯고 내 눈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본문 중에서, 87쪽)"를 곱씹어 보면 먼저 찔린 쪽은 뫼르소다. 뫼르소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보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뫼르소의 태양 살인이 정당방위였다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우리가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인 사건 뒤에 이유를 붙인다. 돈, 명예, 사랑 같은 것들이 주로 그런 이유가 된다. 사람을 죽여놓고, '태양이 눈부셔서요'하는 대답은 아무리 가해자의 입을 통한 것일지라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진다. 뫼르소는 대체 왜! 왜 아랍인을 죽였는가,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옥죄어 오는 태양이 눈두덩을 땀으로 덮는다 한들- 그게 살인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 이 세계에 사는 이가 아니다. 해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그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 그가 속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우리가, 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 세계의 프레임 안에서 설명하려니 자꾸 삐걱거렸던 것이다.

다시 읽은 <이방인>은 내게 그런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대체 왜 알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우리 상식이 통용되는) 설명의 체계 속으로 가져와서 설명하려고 드는 걸까. 우리는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밖의 세계가 있음을 쉬이 인정하지 못할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부조리'라는 세 글자로 못 박아버리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나를 깨운 건 바스락거리는 소리였다.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인지 방 안의 흰색이 전보다 훨씬 환해 보였다. 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고, 물체 하나하나가, 모서리의 각들이, 모든 곡선들이 예리하게 눈을 에려 왔다. 엄마의 친구분들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들은 모두 십여 명쯤 되었고, 그 눈부신 빛 속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본문 중에서, 23쪽

몇 번을 읽었어도 스쳐 지나갔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장례를 기다리며 마주했던 빛은 그랬다. 조금은 졸린 듯, 몽롱했던 그의 세계로 어떤 소리와 빛이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엇으로 뫼르소는 저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전보다는 조금 더 뫼르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또) 생각했다. 고작 몇 십분 전에 저 세계에 살고 있는 뫼르소를 이 세계의 상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조리라고 써놓고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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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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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일상은 무척이나 단출하다. 오전 6시 15분에 일어나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책을 읽는다. 아이가 일어나면 아이와 일상을 보낸다. 아이가 잠깐 다른 것에 집중한 사이 곁에 둔 에세이집이나 시집을 펼친다. (하지만 언제나 잠시뿐) 다시 아이와의 시간을 갖는다. 요즘 딸아이는 오후 11시가 넘어야 겨우 잠든다. 아이가 잠들면 다시 책을 조금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전혀 답답하지 않다. (스스로에게 의아할 정도로;ㅁ;...) 의외로 견딜만하다 싶은 것은, 아이와의 시간이 쌓이면서 서로에게 맞물려 들어가면서 일 테고, 또 그 사이사이에 잠깐씩이라도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자신의 일상을 밝힌 마지막 글을 읽으며, 그의 오늘과 나의 오늘이 닮아있어 좋았다. 뭐랄까, 이 단출함이 순간 '단정함'으로 읽혔달까)

이 책 <일상의 악센트>는 타인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 재주인 40대 후반의 한 남성이 자신의 단정한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어느 에세이집이 바람 많이 부는 날의 파도 같다면, 이 책은 호수를 닮았다. 늘, 항상 거기에 있다는 저이나- 주위를 산책하거나 조깅하기 좋도록 잘 정돈해둔 점, 호수의 모양을 따라 심긴 나무들이 철따라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점도 그렇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는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그 변화를 감지했을 때, '아름답다'라던가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저자의 단골 바 바텐더들의 근사한 몸가짐의 이유와도 같다. 몸에 힘을 빼고 몸을 쭉 펴서 곧게 서 있는 것,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하지만 과하지 않은) 인사, 자세를 갖추고 조용히 품위 있게 걷는 것이 그들의 근사한 몸가짐을 만들었다. 오늘의 나를 아름답고 근사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는 데서 흠칫 놀랐다. 그저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는 것. 한걸음 물러서서 나를 살펴보고 지금의 내가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상상하며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가장 간단한 것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제 몫을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조심스럽고 부드럽고 조용하고 느긋한 것입니다. 무엇 하나 빠져서는 안 됩니다.(109쪽)

 

그의 에세이 안에서 오늘의 나를 점검하고, 조금은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나'도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살핀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외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한눈에 봐서는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나의 어떤 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발견해내지 못해서 빛을 숨기고 있었을 내 모습에 자양분을 주는 시간이 생기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멋지게, 근사하게 만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본다는 것은 숨어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이다.(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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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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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트하우스>의 화자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마땅한 직업 없이 어머니의 집에 얹혀산다. 한때는 기타 연주로 돈을 벌기도 했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지난여름, 오랜 친구였던(하지만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마주친 이후다. 어린 시절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크누텐이 떠나버렸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크누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그게 계기였을까. '나'는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소설은 그래서 쓰였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이 소설을 만들었다.

소설은 '나'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에게 중요한 이미지와 문장은 끝없이 반복되어 읽는 이를 찾아온다. 때문에 어떤 장면('나'가 크누텐과 그의 가족을 마주치는 장면 같은)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읽히지 않는 어떤 사건들이 '나'와 크누텐을 멀어지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크누텐의 아내가 끼어들면서 불안감과 상실감은 증폭된다. 놀라운 점은, 모르는 사이 화자가 '크누텐'으로 옮겨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화자가 '크누텐'으로 옮겨졌다는 것 역시 '나'의 불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불안함은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의 소설이 주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타고 진행되는 서사를 기대했다면, 이 소설은 읽기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는 내내 화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기에, 행간을 읽어내려 부단히도 애썼지만- 결국 독자인 내게 남은 것은 '불안함을 마주하는 불안함'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때로는 손이 떨리기도 했다. 무려 30년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불안감을 타자기에 쏟아냈을 '나'의 맥박이 전해졌다는 데서 나는 이 소설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새삼, 문학의 힘을 느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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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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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을 말하는 오늘, 소설은 '사랑 없는 세계'를 제목으로 내걸었다. 곱씹을수록 으스스한가 싶지만, 생명력 가득한 책의 표지가 이 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맞다. 이 소설 <사랑 없는 세계>에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사랑이 녹아있다.

소설은 정감 넘치는 동네의 작은 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시작된다. 어쩌다 보조 요리사로 채용된 후지마루는 이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엔푸쿠테이에는 T 대학 학생들이 자주 오는데, 그중에서도 식물학을 연구하는 마쓰다 교수의 연구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이야기가 한층 깊어진다. 후지마루는 연구실로 점심 식사를 배달하다가 대학원생 모토무라에게 반한다. 무엇이 계기인지는 정확하게 몰라도, 어느 순간 그녀에게 빠져버렸고- 그녀에 대한 마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식물학의 세계로 이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편견 없이 식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에게 감탄하면서도 마음을 쉬이 내어주지 않는다. 무언가 단 하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면, 그건 어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식물을 향한, 연구를 향한 사랑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본문 중에서, 96쪽)

 

모토무라는 식물이라는 은하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같은 시간, 후지마루는 요리의 맛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두 사람이 매진하고 있는 분야는 어쩌면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청춘들이 어떤 한 분야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마음껏 써보겠다고 결심하고, 또 애쓰는 그 모습만큼은 놀라우리만큼 겹쳐 보인다. 때문에 후지마루는 오늘도 '사랑 없는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모토마루를 바라본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쓰다 연구실의 편안한 손님이 되어 간다.

소설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보조 요리사 후지마루의 짝사랑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따라 마쓰다 연구실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그곳은 애기장대의 유전자 변형이라든지, 선인장의 가시를 연구하는 곳.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식물의 유전자, 유전공학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식물학이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하는 학문일지 모른다. (재배와 관련된 부분은 농업이라, 식물학에서는 다루지 않는다고도 하고) 하지만 이마저도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은 아마도 후지마루의 순수한 마음에 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보통의 연애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왠지 어려운데, 싶은 초반의 애기장대 연구를 버티고 나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게 된다.

예정대로 실험을 진행해서, 예정대로의 결과를 얻는다. 그런 실험이 뭐가 재미있나요? (본문 중에서, 357쪽)

 

모토무라는 깜빡 실수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선입견 없이 잘 관찰하고, 성실하고도 공정하게 계속 사실을 기록한다.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생각을 거듭해서, 이 세계의 이치에 조금씩 다가가려 애쓴다. 끊임없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답하거나 당황하면서, 또 다른 연구를 진행해나간다. 그것은 비단 식물을 연구하는 모토무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재료를 연구하고, 불의 세기나 소스의 맛을 탐미하면서 자기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나가는 후지마루에게도, 각자의 몫을 해나가며 그 분야에서 조금씩 깊어지고 짙어지는 우리에게도 마쓰다 교수의 한 마디는 짜릿한 무엇이 된다. 자기 분야를 향한 열정,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응원하려는 마음, 상대에 대한 배려- 그런 모든 마음들이 한데 뭉쳐 이야기는 따뜻하고 뭉근한 한 그릇의 수프가 된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열정의 씨앗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에너지바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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