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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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트하우스>의 화자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마땅한 직업 없이 어머니의 집에 얹혀산다. 한때는 기타 연주로 돈을 벌기도 했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지난여름, 오랜 친구였던(하지만 적어도 10년은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마주친 이후다. 어린 시절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크누텐이 떠나버렸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크누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그게 계기였을까. '나'는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소설은 그래서 쓰였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이 소설을 만들었다.

소설은 '나'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에게 중요한 이미지와 문장은 끝없이 반복되어 읽는 이를 찾아온다. 때문에 어떤 장면('나'가 크누텐과 그의 가족을 마주치는 장면 같은)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게 읽히지 않는 어떤 사건들이 '나'와 크누텐을 멀어지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크누텐의 아내가 끼어들면서 불안감과 상실감은 증폭된다. 놀라운 점은, 모르는 사이 화자가 '크누텐'으로 옮겨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화자가 '크누텐'으로 옮겨졌다는 것 역시 '나'의 불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불안함은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의 소설이 주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타고 진행되는 서사를 기대했다면, 이 소설은 읽기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는 내내 화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기에, 행간을 읽어내려 부단히도 애썼지만- 결국 독자인 내게 남은 것은 '불안함을 마주하는 불안함'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때로는 손이 떨리기도 했다. 무려 30년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불안감을 타자기에 쏟아냈을 '나'의 맥박이 전해졌다는 데서 나는 이 소설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새삼, 문학의 힘을 느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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