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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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을 말하는 오늘, 소설은 '사랑 없는 세계'를 제목으로 내걸었다. 곱씹을수록 으스스한가 싶지만, 생명력 가득한 책의 표지가 이 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맞다. 이 소설 <사랑 없는 세계>에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사랑이 녹아있다.

소설은 정감 넘치는 동네의 작은 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시작된다. 어쩌다 보조 요리사로 채용된 후지마루는 이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엔푸쿠테이에는 T 대학 학생들이 자주 오는데, 그중에서도 식물학을 연구하는 마쓰다 교수의 연구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이야기가 한층 깊어진다. 후지마루는 연구실로 점심 식사를 배달하다가 대학원생 모토무라에게 반한다. 무엇이 계기인지는 정확하게 몰라도, 어느 순간 그녀에게 빠져버렸고- 그녀에 대한 마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식물학의 세계로 이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편견 없이 식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에게 감탄하면서도 마음을 쉬이 내어주지 않는다. 무언가 단 하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면, 그건 어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식물을 향한, 연구를 향한 사랑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본문 중에서, 96쪽)

 

모토무라는 식물이라는 은하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같은 시간, 후지마루는 요리의 맛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두 사람이 매진하고 있는 분야는 어쩌면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청춘들이 어떤 한 분야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마음껏 써보겠다고 결심하고, 또 애쓰는 그 모습만큼은 놀라우리만큼 겹쳐 보인다. 때문에 후지마루는 오늘도 '사랑 없는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모토마루를 바라본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쓰다 연구실의 편안한 손님이 되어 간다.

소설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보조 요리사 후지마루의 짝사랑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따라 마쓰다 연구실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그곳은 애기장대의 유전자 변형이라든지, 선인장의 가시를 연구하는 곳.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식물의 유전자, 유전공학에 대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식물학이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끌지 못하는 학문일지 모른다. (재배와 관련된 부분은 농업이라, 식물학에서는 다루지 않는다고도 하고) 하지만 이마저도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은 아마도 후지마루의 순수한 마음에 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보통의 연애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왠지 어려운데, 싶은 초반의 애기장대 연구를 버티고 나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게 된다.

예정대로 실험을 진행해서, 예정대로의 결과를 얻는다. 그런 실험이 뭐가 재미있나요? (본문 중에서, 357쪽)

 

모토무라는 깜빡 실수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선입견 없이 잘 관찰하고, 성실하고도 공정하게 계속 사실을 기록한다.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생각을 거듭해서, 이 세계의 이치에 조금씩 다가가려 애쓴다. 끊임없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답하거나 당황하면서, 또 다른 연구를 진행해나간다. 그것은 비단 식물을 연구하는 모토무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재료를 연구하고, 불의 세기나 소스의 맛을 탐미하면서 자기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나가는 후지마루에게도, 각자의 몫을 해나가며 그 분야에서 조금씩 깊어지고 짙어지는 우리에게도 마쓰다 교수의 한 마디는 짜릿한 무엇이 된다. 자기 분야를 향한 열정,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응원하려는 마음, 상대에 대한 배려- 그런 모든 마음들이 한데 뭉쳐 이야기는 따뜻하고 뭉근한 한 그릇의 수프가 된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열정의 씨앗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에너지바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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