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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제학 - 왜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는가
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 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평점 :
(이건 좀 다른 얘긴가 싶지만)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가 인형 유모차를 갖고 싶다고 해서(그걸 사고 싶지 않은 마음에;ㅁ;) 처음으로 보상 제도를 해 봤다. 하루에 해야 할 워크북의 양을 정해두고, 그걸 열흘 동안 하면(스티커 열 개를 받으면) 유모차를 사주겠다는 거였다. 사실 워크북은 올해 들어 계속하던 것이었고(보상 없이 즐겁게 하던 것), 보상만 새로이 추가된 것이었는데-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아이가 대뜸 "이제 세 번만 더 하면 유모차 살 수 있겠다. 그치? 그럼 이제 워크북 안 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보상 제도 이전에는 먼저 워크북을 하자던 아이였기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센티브가 있으면 목적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즐겁던 것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당장 유모차를 샀다. 그리고 워크북은 스티커 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 책 <도덕경제학>을 읽으면서 도덕과 인센티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고민했다. 인센티브가 우리 안의 이타심을 무너트리는 다양한 사례를 마주하면서, 명쾌한 경제 논리 이전에 '사람'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자본주의의 시작도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개념을 제시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이전에 <도덕감정론>을 썼다. 대개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여섯 글자만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시장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윤추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윤추구나 사적 이익이 궁극적 목적이 아닌 '수단'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 시장은 사회 자원의 적절한 배분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처음 디자인됐던 자본주의의 모습은 잘 사는 사람을 더 잘 살게 하고, 못 사는 사람은 더 못살게 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 다 잘 사는 세상, 다시 말해 복지사회를 만드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늘의 많은 물음표들이 느낌표로 바뀐다. 병원 문을 닫고 대구로 내려간 의료진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면 마스크를 만든 할머니의 손길, 시키지 않아도 돼지 저금통을 깨서 기부하는 아이들.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모습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보기에는 퍽이나 이상한 장면들이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는 늘 그랬다. 경쟁하는 마음, 조금 더 갖고 싶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함께 먼저 일어나자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게, 이 장면이- 이 책 <도덕경제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바라고 서로를 도왔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이타심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들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면? 아이가 즐겁게 하던 워크북도 스티커를 받자 멈추려 했던 것처럼- 그들의 선의도 멈추었을지 모를 일이다. 책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센티브는 선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를 통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자의) 목적이 너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대상이 되는 사람은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내가 수행해야 할 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상황, 모든 종류의 인센티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처벌과 보상은 긍정적인 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사람임을,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하는 것임을 먼저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