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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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을 그린 그림 중에 (아마도) 가장 유명한 그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고흐의 별 그림에는 종교적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고단했던 그의 삶에 밤하늘의 별은 단 하나의 편안한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 <그림 속 천문학>은 고흐의 밤하늘을 천문학적인 관점으로 다시 본다.

'별이 빛나는 밤' 그림 속의 달은 그믐달 단계에 있다. 달의 왼쪽 부분이 밝고 지평선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해가 뜨기 직전 새벽 시간대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그믐달이 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쪽 방향이며, 따라서 고흐는 동쪽을 향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새벽이라는 시간과 지평선에 가까운 그믐달의 위치로 볼 때, 사이프러스 나무 오른쪽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금성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에서 정확한 별들이나 별자리 이름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금성과 사이프러스 위의 별들은 대체로 양자리, 달 바로 왼쪽의 것들은 물고기자리로 추정된다.(309쪽)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림은 6월 18일경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천문학적으로 계산하면 실제로 이 날짜에는 그믐달이 아니라 상현을 지나 차오르는 달이어야 한다고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흐의 밤하늘은 자연을 관찰하고 묘사하되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내적 감성과 종교적인 느낌에 따라 각색해 표현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밤 하늘을 오래 관찰하고, 그대로 옮겨놓았던 예술가들도 있었을까? ... 당연히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엘스하이머의 '이집트로의 피신'. 이 그림은 31*41cm의 그다지 크지 않은 작품이지만, 그 세밀함과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그림의 놀라운 점은 별자리는 물론이고(무려 12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은하수, 달의 울퉁불퉁한 표면까지 묘사했다는 점이다. 이전의 화가들에게 달은 그저 수정같이 맑은 것이었다면, 엘스하이머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해 사실적으로 달의 표면을 표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갈릴레오와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의 연구 발표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갈릴레오의 책이 나온 시기보다 9개월 앞서 이 그림을 발표했다고 한다). 양극단에 있다고만 생각했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연현상과 종교가 한 캔버스 안에서 이렇게 만나는 것에 어떤 경이를 느꼈다.

엘스하이머는 하늘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 사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늘을 궁금해해왔다. 왜 해가 뜨고 지는지, 저 별은 무엇인지, 달의 모양은 왜 바뀌는 것인지- 끝없이 질문하고 설명해왔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모형으로 독창적인 천동설을 생각해냈고,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직접 고안한 망원경을 이용한 정밀한 천체 관측으로 지동설을 확신했다. 하지만 하늘을 들여다보고, 설명하려 했던 사람들이 비단 과학자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새삼 우리를 놀라게 한다. 단순히 동물 사냥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한 동굴 벽화에서 황도 12궁의 별자리가 발견되고, 중세 조토의 그림에서는 혜성을 만날 수 있다. 당시의 생활상과 더불어 달력과 별자리를 그린 랭부르 형제의 달력 그림은 우주의 순환과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수백 번, 수천 번 작은 경이를 느꼈다. 지금-여기의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그동안 올려다보지 않았던 밤하늘은, 사실 내가 겨우 내 그림자만을 내려다보는 사이에도 나의 우주를 단단하게 만들어두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지구라는 공간적 한계를 초월해 우주적 차원으로 인식을 확장하고 궁금해하며,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비밀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은 발견의 연속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과정들은 그래서 빛났다.

책을 읽고 보니, 신화도 조금은 달리 보이고, 익숙했던 그림도 새로운 시각에서 읽어보고자 애쓰게 된다.

관점의 전환.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오늘의 내게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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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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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이야기에 매료된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는 당연했고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웠던 불의에 맞서는 이야기, 작은 실수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이야기. 이야기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른 무대 위에서 우리의 시선을 앗아간다. 그런데 문득,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에, 처음 보는 상황인데- 이토록 강렬한 기시감은 무엇일까? 이 책 <이야기의 탄생>은 그 기시감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에 공통으로 주어지는 원칙, 그리고 그 원칙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찍이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를 분석했다.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야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를 분석하고,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힘을 가지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플롯을 나누어 각자의 방식대로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 선생님은 세상 모든 이야기를 '가족이 되는 이야기'와 '가족이 해체되는 이야기'로 설명하시곤 했다. 이 책에서 크리스토퍼 부커는 괴물 이기기, 거지에서 부자 되기, 위대한 여정, 여행과 귀한, 거듭나기, 희극과 비극으로 나누었다.(본문 242쪽 참조)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나누었느냐, 그래서 누구의 구분이 더 합당한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뭔가 기준을 세워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야기에는 어떤 정형화된 면모가 있다는 것.

이는 무려 2,500년 전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희극과 비극의 역사, 플롯과 캐릭터, 스토리의 크기 등 스토리텔링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역시나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물이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실수로 불행에 빠질 때,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 책 <이야기의 탄생>은 '시학'에 뇌과학과 심리학을 덧붙여 (이야기에서) '인물'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을 깊게 탐구한다. 극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인물에 더 집중한다. 이는 낯선 마음으로 떠나게 되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인물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성공했기 때문에, 혹은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함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일도 그에게는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는 어떤 '사건'이 되는 것도 바로 그 결함 때문일 것이다. 사건에 부딪혀 마음에 파도가 철썩, 차오른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자신도 답을 모른 채 어디론가 이끌려간다.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런 그를 따라가본다. 관객이자 시청자이자 독자인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에, 어쩌면 조금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가설을 세워보면서, 그의 도덕적 신념을 정당화하면서, 그 순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에 빠지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어쩌면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심지어 가상의 인물인 그들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그들 사이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그들에게 던졌던 숱한 질문들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어떤 부분이 이야기를 통해서 수면 위로 남실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에 대한 치료법이 바로 이야기다. (서문 중에서)

 

우리 뇌는 희망에 가득 찬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성취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놓인 냉혹한 상황을 직면하지 않게 해준다. 또 이야기는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서, 삶의 혹독한 진실을 외면하게도 해준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알 수 없음'이기에 두렵고 답답하다면, 이야기 속의 '알 수 없음'은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임을 전제하기에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약속은 감질나게 불편한 가운데 초조한 마음을 기분 좋게 불쾌한 상태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 더 쉽게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 같은 것이다.

잘 짜여진 한 편의 이야기는 나를 완전히 녹인다.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경험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콘텐츠의 시대'라 불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무려 2,5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나는 좀 더 들떴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 돌이켜보면 힘들어하는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한 것도 이야기였고, 용기 낼 수 있게 한 것도,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사람들을 만나게 한 것도 모두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질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동의한다면, 어쩌면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광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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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한글 쓰기 1~2 세트 - 전2권 해결! 쓰기
이도 한글학습 연구회 지음, 민병권 그림 / 해결책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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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개월이 된 아이는 지난해 은근슬쩍 한글을 뗐다. 아이가 막힘없이 한글을 술술 읽는 것을 보고 나니,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확, 들었더랬다) 한글을 읽을 수 있다고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험약관, 판결문 등 분명 한글이지만 읽히지 않았던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글보다 중요한 것은 독해력! 한글을 뗐다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글'로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니, '한글을 일찍 뗐다'라는 점을 어떻게든 활용(?) 해주고 싶었다.

 

해서, 두 달여 전부터 매일 하던 '아무 단어 3개 써보기'. 종합장을 두 번 크게 접어, 생각나는 아무 단어나 써본다. 오늘 읽었던 그림책의 재미있는 단어일 때도 있었고, 어휘 워크북 아무 페이지를 펼쳐 눈에 띄는 단어를 써볼 때도 있었다. (많은 경우, 엄마(아빠, 친구 이름) 사랑해를 쓰겠다고 했다) 엄마의 목적은 오로지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 글로 기록하고,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말과는 또 다른 힘을 지니기에 그 맛(?)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던 중- 서점 나들이에서 이 책을 만났다.

바르고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결! 한글 쓰기>는 반짝반짝 보석 같은 텍스트로 아이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꼭 네모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이 책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책은 받침 없는 글자로 1권, 받침 있는 글자로 1권-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 모임 글자, 세로 모임 글자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는데 한글의 짜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쓰기'가 중점인 워크북이지만 내내 쓰기만 하지 않고 미로 찾기를 통해 글자 구분하는 연습을 했던 것도 아이의 흥미를 지속시키기에 좋았다. 또 제시된 단어를 따라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는 글자나 받아쓰기 부분도 있어- '아무 단어 3개 써보기'를 하던 나의 쓰기 교육 맥락과도 맞아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글꼴! 이제까지 보았던 쓰기 책에서는 명조체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 책은 고운한글돋움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명조체나 궁서체가 정자체라고 인식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한자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붓글씨'를 쓰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네모틀에 맞게 디자인되어 자연스러운 손글씨 학습에 적합하지 않은 고딕체(돋움체) 대신 고운한글돋움체를 적용했다는 데서 무릎을 탁 쳤다. 연필로 또박또박 쓴 손글씨 정체의 특징을 반영한 이 서체는 꺾어 쓰지 않았고, 흔히 보던 명조체와 돋움체 사이 어디쯤 되는 정갈함과 단정함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두 권을 모두 연습했을 때, 과연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올까? 아이의 성장이 기대되는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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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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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지금은 오전 6시 15분, 디팍이 5번가 12번지에 들어서던 시각이다. 그는 익숙한 자태로 계단을 이용해 지하실에 있는 창고로 향할 것이다. 입고 온 색 바랜 스웨터를 걸어두고 흰 셔츠와 플란넬 바지로 갈아입은 뒤, 가슴 부분에 금실로 건물 주소를 수놓은 프록코트를 걸친다. 매끈하게 머리를 가다듬어 뒤로 넘긴 다음 모자를 쓸 때는 무사한 오늘 하루에 대한 안도감, 기대감 같은 것들이 조용히 섞였으리라.

이 책의 주인공(중 한 명인) 디팍은 맨해튼의 엘리베이터 승무원이다. 몇 대 남아 있지 않은 수동식 엘리베이터는 주민들을 위해 오늘도 성실히 오르내린다. 요즘 같은 때에 수동식 엘리베이터라니! 유물 같은 그것은 어서 치워버리고, 효율적이면서도 합리적인 현대식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5번가 12번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가면서 나누는 인사와 경청해 주는 배려는 금전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정한 말로 아침을 열어주고, 생일을 기억해 주고, 혼자 밤을 보낼 때는 로비에 자기가 있다며 안심시켜주는 든든함, 그 가치는 어떤 것으로도 평가될 수 없다. 디팍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과 고마움은 디팍의 일을 조금 더 빛나게 한다. 맞다. 그러니까 그 엘리베이터는- 서로를 조금씩 더 빛나게 해주는 마법 같은 곳이었다.

소설은 엘리베이터를 현대식 엘리베이터로 바꾸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하지만, 사실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 엘리베이터 내부의 목재와 구리 핸들에 왁스를 칠하고 광을 내는 디팍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건물을 지키던 리베라, 하반신 장애를 가진 9층 아가씨 클로이와 그녀의 아버지인 경제학 교수 브론슈타인. 매일같이 오페라를 보고 늘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고상한 알콜중독자와 소문난 프랑스인 잉꼬부부, 뭄바이에서 날아온 디팍의 조카 산지와 디팍의 아내이자 산지의 고모인 랄리까지. 소설은 놀랍게도 이들 모두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다.

"다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코미디"라는 프랑스 어느 잡지의 한 줄 평처럼, 소설은 세상의 모든 편견과 문화, 계급과 인종 차이를 초월하는 어떤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직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는 그 힘 안에는 오랜 세월 쌓여온 서로에 대한 신뢰, 운명적인 만남(당연히 로맨스도 있다), 다정한 유머 같은 것들이 녹아있다. 그것들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5번가 12번지를 들썩들썩하게 하지는 못했지만(엘리베이터 교체 이슈가 없었다면, 그들에게는 무슨 이야기가 남았을까?), 건물을 감싸주는 따뜻한 어떤 공기로서 편안함과 포근함 같은 것들을 주었다. 바로 그것, '여기라면 우리는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그 마법 같은 공기에 우리는 긴장을 풀어버리고 만다.

나의 알고리즘은 기존의 다른 것들과는 작동하는 방식이 좀 다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보가 아니라 각자의 사고방식에 힘을 실어주는 정보를 전달하거든요. 정확히는 처음에만 그렇습니다. 그러다 차츰 다양한 관점, 코멘트, 여러 감정들을 제시하면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죠. 나의 소셜 플랫폼은 가상 관계보다 진짜 인간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자주 가는 장소의 사진이나 좋아하는 작품 같은 게시물을 올릴 때 이용자는 자신의 개인 정보 파라미터를 선택할 수 있고 프라이버시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이 서로 비난하는 대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회가 된다고 상상해보세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알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시야를 넓혀 무지에서 자라난 증오의 불길을 끄는 방법을 깨우쳐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본문 중에서, 247쪽)

 

어쩌면 산지가 사업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던 세상도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갑자기 엘리베이터 승무원 역할(?)을 하게 됐지만, 사실 디팍의 조카 산지는 대단한 자산을 상속받은 젊은 사업가다). 서로를 알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아는 곳. 사람들 간에 자연스럽게 신뢰가 쌓이고, 나의 사적 영역은 사적인 채로 보존되는 곳. 내가 '나'이면서 '우리'이기도 함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곳 말이다.

서로의 삶을 끌어안은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을 용기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그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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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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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품이나 아이디어는 세상을 한순간에 뒤바꾼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제품이나 아이디어는 그저 노트 위에서 흩어지거나, 사무실 한구석에서 시제품인 채로 쌓인다. 분명, 세상을 바꾼 그 아이디어도 누군가의 노트 위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끝은 어째서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이 책 <룬샷>은 그 비밀을 물리학과 경영학을 통해 설명한다.

룬샷loonshot대부분의 과학자나 사업가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혹은 성공하더라도 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말한다. 다수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다 보니, 대개 무시당하고 홀대된다. 하지만 이 룬샷이 때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시장의 판세를 뒤엎어버리기도 한다. 당뇨병 환자를 췌장 추출물로 치료했던 '인슐린'의 사례가 그랬고, 로켓 추진력을 미사일에 이용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이 그랬다. 사실 이런 사례는 숱하게 많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룬샷'을 홀대하고, 무시하는 것일까?

책은 그것을 '상전이'의 물리학적 개념을 빌려와 설명하고 있다. 상전이란, 하나 이상의 제어 변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벌어지는 시스템 행동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말한다. 물의 온도가 내려가면 고체가 된다거나, 풍속이 증가하면 국지적 산불이 통제 불가의 큰 불로 바뀌는 것처럼- 어떤 '결정적 순간'을 넘어서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책은 '기업 규모가 커지면 관심의 초점이 룬샷에서 경력으로 바뀐다'고 쓰고 있다. (이게 이 책의 핵심! 밑줄 쫙쫙!)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쏟아낸다. 아무래도 회사 분위기도 수평적인 경우가 많고, 때문에 작은 아이디어에도 서로 귀 기울여 듣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보다는 짜여진 체계에 맞추어 일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업무가 상대적으로 분업화되어 있을 테고, 조직 역시 관리라는 미명하에 수직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찾아내야 할 것은,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 큰 규모의 조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그 순간의 임계점을 찾아낸다면 조직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면서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룬샷과 그것을 이미 성공시킨 프랜차이즈의 길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정적이고 지극히 헌신적인 사람들이 필요하다. 서로 아주 다른 역량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즉 예술가와 병사가 필요하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도, 팀도, 하는 일도 모두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 책 <룬샷>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꽤나 보편적인 어떤 지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정 온도 이하에서는 '늘' 얼어붙는 물처럼, 조직은 왜 '늘' 특정 규모를 넘어서면 다른 조직이 되어버리는지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안에서 '룬샷'이 어떻게 탄생하는가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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