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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평점 :
오늘도 우리는 이야기에 매료된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는 당연했고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웠던 불의에 맞서는 이야기, 작은 실수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이야기. 이야기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른 무대 위에서 우리의 시선을 앗아간다. 그런데 문득,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에, 처음 보는 상황인데- 이토록 강렬한 기시감은 무엇일까? 이 책 <이야기의 탄생>은 그 기시감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에 공통으로 주어지는 원칙, 그리고 그 원칙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찍이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를 분석했다.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야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를 분석하고,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힘을 가지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플롯을 나누어 각자의 방식대로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 선생님은 세상 모든 이야기를 '가족이 되는 이야기'와 '가족이 해체되는 이야기'로 설명하시곤 했다. 이 책에서 크리스토퍼 부커는 괴물 이기기, 거지에서 부자 되기, 위대한 여정, 여행과 귀한, 거듭나기, 희극과 비극으로 나누었다.(본문 242쪽 참조)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나누었느냐, 그래서 누구의 구분이 더 합당한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뭔가 기준을 세워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야기에는 어떤 정형화된 면모가 있다는 것.
이는 무려 2,500년 전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희극과 비극의 역사, 플롯과 캐릭터, 스토리의 크기 등 스토리텔링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역시나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물이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실수로 불행에 빠질 때,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 책 <이야기의 탄생>은 '시학'에 뇌과학과 심리학을 덧붙여 (이야기에서) '인물'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을 깊게 탐구한다. 극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인물에 더 집중한다. 이는 낯선 마음으로 떠나게 되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인물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성공했기 때문에, 혹은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함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일도 그에게는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는 어떤 '사건'이 되는 것도 바로 그 결함 때문일 것이다. 사건에 부딪혀 마음에 파도가 철썩, 차오른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자신도 답을 모른 채 어디론가 이끌려간다.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런 그를 따라가본다. 관객이자 시청자이자 독자인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에, 어쩌면 조금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가설을 세워보면서, 그의 도덕적 신념을 정당화하면서, 그 순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에 빠지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어쩌면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심지어 가상의 인물인 그들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그들 사이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그들에게 던졌던 숱한 질문들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어떤 부분이 이야기를 통해서 수면 위로 남실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에 대한 치료법이 바로 이야기다. (서문 중에서)
우리 뇌는 희망에 가득 찬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성취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놓인 냉혹한 상황을 직면하지 않게 해준다. 또 이야기는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서, 삶의 혹독한 진실을 외면하게도 해준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알 수 없음'이기에 두렵고 답답하다면, 이야기 속의 '알 수 없음'은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임을 전제하기에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약속은 감질나게 불편한 가운데 초조한 마음을 기분 좋게 불쾌한 상태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 더 쉽게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 같은 것이다.
잘 짜여진 한 편의 이야기는 나를 완전히 녹인다.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경험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콘텐츠의 시대'라 불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무려 2,5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나는 좀 더 들떴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 돌이켜보면 힘들어하는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한 것도 이야기였고, 용기 낼 수 있게 한 것도,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사람들을 만나게 한 것도 모두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질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동의한다면, 어쩌면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광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