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법 - 스스로 묻고 해결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땅콩문고
윌리엄 고드윈 지음, 박민정 옮김 / 유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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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품는 일은 중요하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궁금한 것이 있다는 것.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알고 싶은 마음을 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질문을 하는가, 또 '누구에게' 질문을 하는가 역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어떤 질문을 하는가는 곧 질문하는 자의 생각 한가운데를 읽는 일일 테고, 누구에게 질문하는가는 질문하는 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쁜 질문'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좋은 질문'은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질문이 나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책은 '질문하는 법'보다는, '질문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한 방법'에 대해 쓰고 있었다. 상상했던 방향과는 결이 달랐지만, 200년 전에 사회와 교육에 대해 고민했던 사상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가는 200년 후의 오늘을 사는 내게도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이 책 <질문하는 법>의 저자 고드윈은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당시 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흥미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어른이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아놓은) 커리큘럼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산업화와 기계화를 생생하게 경험하며 교육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계층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하고 경쟁하던 그때에- 진정한 배움을 이야기했던 고드윈은 누군가의 마음을 뜨겁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같은 방식으로 내 마음을 달군다.

아이를 키우고, 유아교육을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지점 역시 바로 이런 부분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해결하는 아이로 키워내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하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것. 아이마다 기질과 환경이 다르고, 부모나 교사 역시 기질과 환경이 다르므로- 그들 사이에 시너지가 나는 방법 역시 제각각이다. 그러니 특정 부모-아이의 경험을 서술한 육아서나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두루뭉술한 이론들은 모두 뜬구름같게만 느껴졌던 것. 그런 고민을 하는 내게, 저자는 아이를 좀 더 믿어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책을 둔다.

아이들은 책을 통해 수천 가지의 새롭고 훌륭한 조합을 만들어 낸다. 무수히 많은 장면을 상상하고, 용기를 시험하고, 독창성을 과제로 삼으며 서서히 인생의 다채로운 사건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그는 자신이 읽은 수많은 책에 조언을 구하고, 인류를 위한 미래의 가르침과 즐거움을 위해 다음 독서를 계획한다.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 사람의 과거를 추측하고, 그들의 지혜나 어리석음, 미덕이나 악덕, 만족이나 불행을 머릿속에 피상적으로 그린다. 마주치는 모든 것이 그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본문 중에서, 40쪽) 책은 무수한 방법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자극한다.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재촉한다. 그렇다면 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가장 좋은 촉매제 아닐까.

아이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비단 학교의 커리큘럼만이 아닐 테다. '아동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잘 정리되고 적극적이고 배울 준비가 된 마음가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근면성과 관찰력을 길러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목적을 충족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기에 즐겁다. 살면서 쓸 일이 한 번도 없을지 모를 낯선 언어를 배우는 일도 재미있고, 기말고사의 부담감을 안게 되는 것마저 즐겁다. 욕망하는 공부야말로 진정한 활동임을 경험하면서, 아이에게 '이것만은 꼭 알아야 해'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공부할지 결정하면 안되는 걸까? 아이가 어떤 것의 가치를 알기 전에 그것을 꼭 배워야 할까? ... 고드윈의 이야기에 내내 동의했으면서도, 쉽게 '아니지!'하고 고개를 젓기는 어렵다. 정말이지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오랫동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

책이 좋은 매체라고 해서, 책에 쓰인 모든 내용이 옳은 것은 아니다. 독자로서 우리는 책의 내용들을 충분히 경계하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반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 과정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문장들에 완전히 공감하는 바이다.

독서가 불공평한 오명을 얻게 된 이유는 진정한 독서 방식을 충분히 고심해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는 태양의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흑점이 연료의 일종으로 타면서 찌꺼기를 배출하고, 머지않아 태양 자체를 이루는 물질로 바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독서에 있어서도 우리가 읽은 가설이 항상 머릿속에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채 이전과 똑같은 내용으로 덩어리째 남게 되면, 의심의 여지없이 사고를 기형적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태도로 책을 읽는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는 것에 자신의 성찰을 가미한다면, 작가의 생각과 주장을 분석한다면, 책의 각 부분을 비교해 오류를 찾아내고, 그 구성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충분히 훌륭한 부분은 받아들이고 마음속으로 그렇지 못한 부분에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설명한다면 말이다. (본문 중에서,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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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상냥한 지성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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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를 기쁘거나 슬프게 하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곰곰 생각해보았다. 사람들로부터의 더 좋은 평판, 책이 많은 것, 젊음이 아직 내 안에 있음이 느껴지는 순간들, 지혜, 사랑, 평온 같은 것들은 나를 안정되게 하고, 으쓱하게 했다. 반면 몸이 아플 때나 악몽을 꾸었을 때, 세상 모든 일이 압박처럼 느껴질 때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 표현에 한계를 느낄 때, 무례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어김없이 불행하다고 느꼈다. '좋은 것'이 왔을 때 들떴던 나는 '나쁜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좋은 것에 들썩였던 만큼, 나쁜 것에도 반응했다. 그것은 분명히 내 삶에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좋은 것에도, 나쁜 것에도 무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것은 좋은 것인 채로, 나쁜 것은 나쁜 것인 채로- 아무리 좋은 것도 내 곁에서 영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저 온 것을 누릴 수 있다면 누리고, 흘려보내야 한다면 흘려보낼 수 있는 넓은 마음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을 얼마나 둥글둥글하게 다듬어야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책을 골랐다.

제목과 목차만으로 충분히 끌렸던 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은 14세기에 라틴어로 쓰인 고전이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스스로 신앙인이면서도 중세의 초경험적 가치관에 반대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찬양했었다고 한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던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던 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았다. 삶의 기쁨과 희망에 동요하지 않기 위하여, 또 고통과 두려움에 좌절하지 않기 위하여- 찬찬히 모든 감정들과 상황들을 '다시' 읽어낸 것이다.

기쁨: 난 책이 엄청나게 많아. 내겐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높은 총서가 있어.

이성: 철학자를 서적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취향이야. 내 말을 믿게. 이건 글로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 정신을 압도해 아무것도 맛보지 못하고 그저 욕심만 내게 함으로써, 자료의 무게 아래 정신을 깔아뭉개고 파묻는 셈이자 물이 넘치는데도 갈증을 채우지 못해 죽은 탄탈로스가 당한 것과 비슷한 고문을 정신에 가하는 셈이네.

기쁨: 우리 집에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책이 있어. ... (중략)

이성: 책이 장애물이 되지 않게 조심하게. 때론 병사가 너무 많아도 승리에 해롭듯 공부할 때 책이 너무 많아도 방해가 되곤 하네. 그러니까 과유불급인 경우도 생기는 거야. 물론 책을 너무 많이 버려서는 안 되고, 따로 두고 가장 좋은 책만 참조해야지. 그렇게 하면 책을 함부로 보지 않게 될 거야. 책은 때맞춰 읽으면 아주 유용할 수 있거든. (중략)

또 책에서 영광을 끌어내고 싶다면 다른 길을 가야 하네. 책의 내용을 알아야지 소유만 하면 뭘 하나. 책을 서가보다는 기억 속에 정리해 놓게. 책장보다는 뇌에 넣어 놓으란 말이야. 내 말이 틀렸다면, 숱한 책이 꽂힌 책장이나 많은 책을 파는 서적상이 누구보다 유명해야 하지 않겠나? (본문 중에서, 59-64쪽)

책은 이성과 정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과 대화를 나누는 수많은 정념들은 이성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설득 앞에서 번번이 사그라들고 만다. 우리를 기쁘게, 또 슬프게 했던 모든 감정들이 사실은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임을, 그것이 우리를 동요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자 일순간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판단을 지배하고 감각을 다스리는 우리의 생각은 결국 우리 의지의 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라면, 불행도 불행이 아닐 수 있고, 잠깐의 행운에 온몸을 들썩일 필요도 없게 된다.

한층 고요해진 마음으로 책을 덮고 보니, 새삼 이 책이 14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로 다가왔다. 700년 전 사람들도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것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또 아득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책은 영원한 처세술을 담은 책일지 모르겠다. 그때그때 상황만을 잘 넘기는, 그때-그 상황에만 해당하는 임기응변식 가벼운 처세서가 아니라 우리를 쥐락펴락하는 '운명'에 대해서, '불운'과 '행운'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또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매우 근본적으로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은 수백 년간 유명한 '셀프헬프 self-help'책이었다고)

다시 또 삶이 흔들리는 순간에, 그가 던졌던 정념과 이성의 대화를 기억해야겠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하는 말들이 조금 무책임하게 느껴졌다면, 나를 뒤흔드는 정념의 실체를 페트라르카와 함께 파고 들어가 보는 것도 답을 찾는 또 다른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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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이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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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아파트 7층 자택에서 주목받는 작가 플로라 콘웨이가 세 살짜리 딸 캐리를 잃어버렸다. 분명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술래가 된 플로라는 집 안을 샅샅이 뒤져도 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출입문과 창문에도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캐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고, 언론은 사라진 캐리의 행방과 남겨진 플로라의 행보에 주목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캐리는 없었고, 플로라는 술래였다.

생각 끝에, 플로라는 스스로를 '집 안에 유폐 중인 포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몇 달째 아파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느 때의 자기 모습과 꼭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집 안에 가두고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통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실체를 찾아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설가.

그는 소설가였다. 플로라는 스스로가 어느 작가가 쓴 소설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그녀의 삶이 소설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그녀가 뭔가를 보여줄 차례였다. 그렇게 그녀는 소설 밖 세상을 만났다. 동굴에 오래도록 갇혀 있었던 탓에 동굴 벽에 그려지는 그림자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녀가 동굴 밖으로 나와 빛을 마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설 <인생은 소설이다>는 의도적으로 현실과 가상세계를 뒤섞었다. 현실의 작가는 가상세계의 작가를 만들어내고, 가상세계의 작가는 또 하나의 가상세계와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가상세계의 작가가 불쑥, 현실의 작가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내 삶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는 거냐고' 되묻는다. 모든 것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던 현실 세계의 작가는 가상세계의 생명성에 몸을 뒤로 물리고 만다.

아무리 작가가 결정권자의 지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오롯이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등장인물들에게도 고유의 권한이 주어지니까요.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본성과 정체성, 은밀한 삶의 이력에 위배되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죠.

개연성 없는 소설은 가치를 잃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본문 중에서, 195쪽

작가는 등장인물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그게 바로 등장인물들에게 부여된 고유의 몫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플로라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다. 작가인 로맹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등장인물인 플로라 자신의 의지로 어떤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의 '개연성'을 만들어낸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일 수 있는 것은 그 자유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온전히 내가 만들었다고 믿는 세계도 나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 세계라 믿는 이 세계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인다. (로맹 역시 기욤 뮈소가 만들어 낸 가상세계의 작가일 뿐이므로)

소설이 만들어낸 이 점층법 때문에 소설은 동심원처럼 점점 확대되어 가기도 하고, 더 깊이, 더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쯤에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됐다.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또,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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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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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말고 자꾸 표지를 문질러보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은데 자꾸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는 걸 보면- 우아한 매력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촉감은 또 얼마나 좋은지, 부드럽고 따뜻하다. 책을 받쳐 든 왼손은 표지의 질감에 감복해 책장을 넘기는 오른손을 재촉한다. 그렇게, 케이크를 오븐에 넣어두고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나에게 베이킹이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과정이 즐거운 일이다. 내가 베이킹을 전문가에게 배워볼 생각이 나 자격증 같은 걸 딸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 없이 그저 사랑과 동경만으로 시작한 일.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한 채 하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쳐 시작했으나 남들이 능숙해지도록 혼자 여전히 서툴고 쩔쩔매는 일. 남들 앞에 선보여야 할 때면 늘 자신감이 없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그만둘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게 소설 쓰기와 베이킹은 어쩌면 똑 닮은 작업. (본문 중에서, 18쪽)

베이킹과 소설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다 소설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그녀이지만, 여전히 베이킹은 그녀 삶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어주었다. 해서 책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그러니까 책과 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쪽 다 절대 놓칠 수 없는 큰 즐거움이기에, 그녀에게 책은 곧 빵이 되고, 빵은 곧 책이 되어 돌아왔다. 어느 빵을 먹으면 어떤 책의 어떤 이야기가 자연스레 따라나서고, 어느 책을 읽을 때면 어떤 빵의 질감과 향이 입안을 메운다. 그 모든 일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빵도, 아직 읽지 못한 소설도 왠지 그 빵과, 그 책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덜컥, 믿어버리게 된 것은 아마도 빵과 책에 대한 작가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 아닐까.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는 소설 속 한 문장(책 속에서 작가가 인용한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 중 한 문장)을 노트에 옮겨 쓰며, 작가가 언젠가 오스트리아에 가서 먹어보고 싶다는 '자허토르테'를 먹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에곤쉴레가 클림트를 만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는 오래된 카페에서 이름도 어렵고 긴 커피와 자허토르테 세트를 먹었던 순간은 그저 그것만으로 황홀해 오래도록 기억을 맴돈다. 그때 내 가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있었더라. ... 곰곰 생각했는데도 끝내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쉽다. (작가가 책에서 했던 것처럼, 나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빵과 책을 한 세트 묶어두고 싶었는데!)

빵과 책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참으로 이상하고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일었다. 빵은 향을 내는 것, 입안으로 들어가 꼭꼭 씹어 삼켜지는 것, 몸속 소화기가 소화해내는 것. 반면 책은 향도 없고, 맛도 없고, 때때로 읽으면서도 전혀 소화가 되지 않는다. 책과 빵은 이견 없이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그러고 보니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네-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잘 어울리는 건가. 서로에게 없는 것을 꾹꾹 채워줘서.

작가가 소개한 책들 중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메모하고, 좋아하는 카페가 마침! 내놓은 슈톨렌 쿠키를 주문했다. 12월의 첫날 읽은 달콤하고 고소한 빵과 책들이 올해를 든든하게 채워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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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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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를 처음 읽었던 10년 전에도) '빅 브라더'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우리는 텔레스크린이 곳곳에 부착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그러니까 '1984'에 묘사된 세계보다 조금은 더 나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컴퓨터에도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핸드폰, 태블릿, 텔레비전, CCTV 등등의 것들은 모두 빅 브라더의 눈을 하고 있다. 나의 자유의지로 그 기기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어떤 차원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의심하고, 그에 반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을 보면서는 더 그랬다. 우리에게는 '빅 브라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빅 브라더는 그의 눈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한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는 것이 미쳤다는 것의 신호였다. 오늘날은, 과거가 변경할 수 없는 거라고 믿는 것이 미쳤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고, 만약 혼자라면, 그때는 미치광이인 것이다. 그러나 미치광이가 된다는 생각이 그를 크게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공포는 그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130쪽)

과거의 신문 기사를 조작하고 수정하던 윈스턴은 현 체제에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구어와 신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매년 단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신어는 구어를 번역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어로 적힌 내용이 어떤 기술적 과정이거나 매우 단순한 일상이거나, 또는 당에서 행하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 한, 실제로 이것은 '당의 출현' 이전에 쓰인 책은 전체적으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혁명 이전의 생각들은 전달될 수 없었다. 그것을 전달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제한된 언어는 사고의 확장을 방해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신어'가 유일한 언어인 어린이들은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은 당의 훈육에 저항할 줄 몰랐다. 아니, 사실은- 당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2 더하기 2가 5라고 하면 5였고, 그다음 주에 2 더하기 2가 3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노래들, 행진, 깃발, 슬로건을 연호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일종의 영광스러운 게임처럼 여겨졌다. ... 당의 통제는 무서웠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당연해졌고, 그럴수록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새하얗게 지워졌다.

자유는 2 더하기 2는 4를 만든다고 말하는 자유이다.

만약 그것이 인정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따라온다.

본문 중에서, 132쪽

윈스턴이 노트에 2 더하기 2는 4라고 쓸 때, 나도 같은 메모를 끄적여보았다.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은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절대 명제이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 설명해보려니 쉽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는 2 더하기 2가 4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거기에는 수많은 사회적 합의와 약속이 내재되어 있었다. 빅브라더의 세계에서는 그 합의와 약속들이 통용되지 않았으므로, 2 더하기 2가 5일 수도, 3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계를, 또 시대를 특정 짓는 모든 믿음, 관습, 취향, 감정, 정신 자세는 그런 것이었다. 1984의 세계는 당의 신비감을 유지하고,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들이 감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때문에 반란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결론 내렸으므로, 당이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세상이 지금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힘도 없이, 세기에서 세기에 걸쳐 대대로 노동하고, 번식하고,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84'의 세계는 절망적인가. 소설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는 윈스턴이 당 체제에 굴복했음을, 그리하야 우리에게 회복의 희망은 없음을 의미하는가. 마지막 세 문장을 읽는 사이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투쟁하는 마음과 분노와 안타까움 같은 끓는 감정들을 식혀두고 에세이처럼 뒤따라 붙은 '신어의 원리'를 읽는다. 철저하게 '과거형'으로만 쓰인 그것은 구어와 신어의 차이를 담담하게, 또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어의 원리를 읽는 동안 더욱 또렷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을 때는 투쟁의 진짜 끝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신어의 쓰임새가 과거형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심지어 표준 영어로!), 구어라 불린 표준 영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완전히 사라졌을 것만 같던 '자유'의 수많은 의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되어- 한동안 그것이 굉장히 한정적으로만 쓰였음을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빅 브라더' 이전에 통용되었던 사회의 약속들과 도덕적 질서도 회복되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된다. 돌은 단단하고, 물은 축축하고, 지지되지 않은 물체는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고. 우리 생각의 많은 부분들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 어떤 것들은 절대적이며, 불변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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