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양장) 새움 세계문학
조지 오웰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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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를 처음 읽었던 10년 전에도) '빅 브라더'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우리는 텔레스크린이 곳곳에 부착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그러니까 '1984'에 묘사된 세계보다 조금은 더 나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컴퓨터에도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핸드폰, 태블릿, 텔레비전, CCTV 등등의 것들은 모두 빅 브라더의 눈을 하고 있다. 나의 자유의지로 그 기기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어떤 차원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의심하고, 그에 반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을 보면서는 더 그랬다. 우리에게는 '빅 브라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빅 브라더는 그의 눈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한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는 것이 미쳤다는 것의 신호였다. 오늘날은, 과거가 변경할 수 없는 거라고 믿는 것이 미쳤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고, 만약 혼자라면, 그때는 미치광이인 것이다. 그러나 미치광이가 된다는 생각이 그를 크게 힘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공포는 그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130쪽)

과거의 신문 기사를 조작하고 수정하던 윈스턴은 현 체제에 강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구어와 신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매년 단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신어는 구어를 번역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어로 적힌 내용이 어떤 기술적 과정이거나 매우 단순한 일상이거나, 또는 당에서 행하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 한, 실제로 이것은 '당의 출현' 이전에 쓰인 책은 전체적으로 번역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혁명 이전의 생각들은 전달될 수 없었다. 그것을 전달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제한된 언어는 사고의 확장을 방해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신어'가 유일한 언어인 어린이들은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은 당의 훈육에 저항할 줄 몰랐다. 아니, 사실은- 당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2 더하기 2가 5라고 하면 5였고, 그다음 주에 2 더하기 2가 3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노래들, 행진, 깃발, 슬로건을 연호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일종의 영광스러운 게임처럼 여겨졌다. ... 당의 통제는 무서웠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당연해졌고, 그럴수록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새하얗게 지워졌다.

자유는 2 더하기 2는 4를 만든다고 말하는 자유이다.

만약 그것이 인정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따라온다.

본문 중에서, 132쪽

윈스턴이 노트에 2 더하기 2는 4라고 쓸 때, 나도 같은 메모를 끄적여보았다.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은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절대 명제이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 설명해보려니 쉽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는 2 더하기 2가 4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거기에는 수많은 사회적 합의와 약속이 내재되어 있었다. 빅브라더의 세계에서는 그 합의와 약속들이 통용되지 않았으므로, 2 더하기 2가 5일 수도, 3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계를, 또 시대를 특정 짓는 모든 믿음, 관습, 취향, 감정, 정신 자세는 그런 것이었다. 1984의 세계는 당의 신비감을 유지하고,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들이 감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때문에 반란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결론 내렸으므로, 당이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세상이 지금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힘도 없이, 세기에서 세기에 걸쳐 대대로 노동하고, 번식하고,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84'의 세계는 절망적인가. 소설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는 윈스턴이 당 체제에 굴복했음을, 그리하야 우리에게 회복의 희망은 없음을 의미하는가. 마지막 세 문장을 읽는 사이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음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다시 한번- 투쟁하는 마음과 분노와 안타까움 같은 끓는 감정들을 식혀두고 에세이처럼 뒤따라 붙은 '신어의 원리'를 읽는다. 철저하게 '과거형'으로만 쓰인 그것은 구어와 신어의 차이를 담담하게, 또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어의 원리를 읽는 동안 더욱 또렷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을 때는 투쟁의 진짜 끝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신어의 쓰임새가 과거형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심지어 표준 영어로!), 구어라 불린 표준 영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완전히 사라졌을 것만 같던 '자유'의 수많은 의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되어- 한동안 그것이 굉장히 한정적으로만 쓰였음을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빅 브라더' 이전에 통용되었던 사회의 약속들과 도덕적 질서도 회복되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된다. 돌은 단단하고, 물은 축축하고, 지지되지 않은 물체는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고. 우리 생각의 많은 부분들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 어떤 것들은 절대적이며, 불변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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