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마르게리트 꽃잎 동물 공화국 1
자비에 도리슨 지음, 펠릭스 들렙 그림, 김미선 옮김 / 산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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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동지들, 우리들의 삶의 본질은 무엇이겠소? 우리 그것을 직시합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되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단지 우리 몸에 숨이 붙어 있을 만큼의 음식이 주어졌고, 우리 중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일하도록 강제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용성이 다한 바로 그 순간 끝이 찾아오고 우리는 끔찍한 잔학행위로 도살당하는 것이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이정서 역, 새움, 13쪽 중에서)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소설 중 하나이자, 세기의 금서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장원 농장에 소속되어 있었던 동물들은 그들 삶을 억누르는 모든 패악이 인간들의 폭압에서 비롯되는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해서, 인간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인간만 제거하면 노동의 모든 생산품은 그들 자신의 것이 될 테고, 금세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억압 속에 살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선택한' 억압이었다. 그래도 이건 우리가 선택했으니, 이전에 받던 억압보다야 좀 나은 것 아닌가, 싶다가도 혁명 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생활에 동물들은 어리둥절해하고, 당황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무력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책 <동물 공화국: 흩날리는 마르게리트 꽃잎>은 <동물농장>을 오마주한 그래픽 노블이다. 인물 설정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물이 주인인 동물들만의 사회이며, <동물농장>이 그랬듯이 분명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뉜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수소인 실비오.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화제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에는 진짜 공화국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들은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물들을 다스린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공포'를 이용했고, 공포를 퍼트리기 위해 무고한 동물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학살했다. 무엇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감히 그들에게 부당함을 이야기할 수 없도록 공포의 크기를 날로 키워나갔다.



그 라이터 갖고 싶다 했나? ... 라이터를 손에 넣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 나한테서 훔치든가. 사든가, 달라고 사정하든가. 아니면 내 친구가 되든가 말이야. 뭐가 좋겠나? ... 어떤 경우에라도 이건 자네 것이 되겠지만 말이야. 도둑질, 구매, 자선, 선물은 달라. 그래도 똑같은 라이터라고 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53쪽)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는 그것에 맞서기로 한다. 똑바로 쳐다보았고, 눈빛을 나누었고, 맞잡은 손아귀 안에서 함께의 힘을 느꼈고, 행동하기로 했다. 단번에 실비오가 구축해놓은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 어렵겠지만, 그것에 작은 돌이라도 던져보기로 한다. 심지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비폭력 저항! (지배계층의 물리적인 힘이 너무 세서 애초에 그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저항할 수 없기도 했다만) 거위 마르게리트가 처형당한 장소에 마르게리트 꽃 한 송이를 그려두는 것이었다. 이후에 '마르게리트' 꽃은 저항의 상징이자, 무고한 존재들의 희생을 의미했다.



그렇게 예술은 또 한 번- 무기가 되었다. 떠돌이 어릿광대 쥐 아젤라르의 무대처럼, 무고한 존재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복지를 돌려달라는 봉기의 목소리처럼 마르게리트는 이곳, 저곳에서 피어났다. 그렇게 피어난 꽃은 억압하고 금지시킨다고 쉬이 저물지 않았다. 흩날리는 나뭇잎 속 마르게리트에도 실비오와 지배계층들은 흔들렸고,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직은 거기까지. 이제 막 흩날리기 시작한 마르게리트 꽃잎은 동물 공화국을 뒤흔든 사건임에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유를 되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동물들도 행동하게 될 것이다. 마르게리트 꽃잎은 모두의 마음속에 굳어있던 자유의지를 깨웠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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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예술가들 - 남다른 아이디어로 성공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에 대하여
윌 곰퍼츠 지음, 강나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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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에서 처음 마주했건, 마르셀 뒤샹의 '샘'은 적지 않은 충격을 안긴다. (전시회장이든 미술사 책이든, 어디든) 저게 왜 여기에 있어? 저건 그냥 변기잖아. 변기도 예술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술가겠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변기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냐고. 심지어 특정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하는 건 좀 심하잖아. 그냥 갖다 둔 것뿐인데. 이후로도 투덜거림은 한동안 이어진다. 이는 뒤샹의 '샘'이 (어떤 의미로든) 충격을 안겼음을 반증한다. 충격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뒤샹의 '샘'은 유명해졌다. 이로써 뒤샹은 미술사에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개념을 써넣었다. (동시에 현대 미술을 아주 복잡하고, 난해하고,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레디메이드가 미술의 한 장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꽤나 철학적인 질문들이 쏟아지게 마련이니까)



'샘'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17년이었다.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추상미술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샘'을 전시하기는 했으나 커튼 뒤에 가려두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벌써 1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변기 자체가 예술인가라는 질문에는 물음표가 남는다. 하지만 뒤샹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감을 썼다. 물감이 공산품이라면, 변기와 다를 바 없었다. 또 예술이 어떤 대상을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라면, 뒤샹 역시 변기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였으므로 그 과정 역시 예술의 일부라 할만하다. 뒤샹의 '샘'에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사고의 전복이 녹아 있었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예술가의 '창조성'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랴.



뒤샹이 무엇에 영감을 받아 '샘'을 선보였는지는 몰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을 테고, 그것은 그의 시선을 '달리 보게'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창조적인 사고 과정이 일어났을 테고, 뇌는 문제 해결 모드가 되었겠지. 이는 곧 생각했다는 것이며, 생각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감은 그때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아이디어가 생성되는 과정이다. 낯선 결합에서,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을 섞는 방식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세상에 선보일 때는 긴장하게 된다. 자신감 있어 보일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확신에 찬 사람은 없다.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기꺼이 감수해내야 한다. 불확실한 것은 보다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애매모호한 것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선택한 것 중에는 옳은 것도 있겠지만 틀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설령 뒤로 돌아가서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야 할지라도- 일단은 저질러 볼 것! 그러니까 창조성이란, 일종의 용기일지도 모른다.



셰릴: 갓 구운 케이크를 드시겠어요?


나: 네, 좋아요.


셰릴: (싱크대 위 선반에 세로로 수납해 둔 접시를 가리키며) 하나 고르세요.


나: 네?


셰릴: 접시를 하나 고르시라고요. 저는 접시를 수집하고 있는데, 같은 종류의 접시는 하나만 사요. 그리고 손님이 오면 어떤 접시를 사용할지 직접 결정하도록 하죠. 우리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의견이 있을 때 인생은 훨씬 재미있는 법이죠. (본문 중에서, 228쪽)



책을 읽으며 만난 작은 에피소드에 무릎을 탁, 하고 쳤다. 맞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고, 모두에게는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우리의 삶은 보다 풍성해진다. ... 일전에 모든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창조성'이 왜 어른들에게는 발견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아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라도 들어줄 부모가 있기 때문이라는 데서도 비슷한 '아하!'의 순간을 맛봤더랬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는 태도로 누군가의 선택을 들어줄 때 우리 사회는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곧 그것은 우리 모두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약간의 용기를 품고, 시도해볼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채도를 한 뼘쯤 높여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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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기분
박연준 지음 / 현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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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띠지에 있는 문장, "나는 읽을 때 묶여있다가 쓸 때 해방된다."에 강렬하게 끌려 이 책을 받아들었는데, 막상 나를 오랫동안 흔든 것은 띠지에 있던 또 다른 문장, "시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당신은 자신할 수 있나요?"였다. 그 문장을 마주한 이래로 나는 이따금씩 시와 나의 거리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대개의 순간 나는 시와 가깝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영역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언제나 이성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시를 필사하거나, 소설을 읽을 때, 어느 날 눈이 마주친 그림 한 점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때면 말랑하면서도 물컹거리는 무엇이 내 안에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도 됐다. ... 시와 나의 거리라는 게, 애초에 구할 수 없는 값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골몰하는 것도 그랬다. 아, 이렇게 나는 또 뭔가를 '구하려고' 하고 있구나. 수학과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이럴 때만 꼭.



2. 박연준 시인을 좋아한다. <소란>의 따뜻함은 지인에게 여럿 선물하기도 했다. <모월모일>은 제주의 작은 책방에서 사 왔다. 덕분에 제주의 풍경이 한 뼘쯤 더 예뻐 보였더랬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이 책 <쓰는 기분>이 제일 좋다. 읽는 시간이면 늘 플래그와 함께하지만, 플래그 붙이는 데 야박한 편인 나도- 이번만큼은 '졌다!'고 생각하며 플래그를 마구 붙였다. (앞 장과 뒷장에 연이어 플래그를 붙이기도 했다. 이럴 거면 플래그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고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둘 다 놓칠 수 없는데, 어쩌라고ㅠㅠ!) 이 책이 유독 좋았던 것은, '쓰는 일'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실컷 들을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여기에 더해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들에 '오해'가 잔뜩 끼어있다는 것도 발견하고 슥슥 먼지를 털어낼 수도 있었다. 두루뭉술하게 한 칸에 섞여있던 개념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세상에! 이 모든 것들이 단 몇 페이지로 해결되었다니) 그랬더니- 상당히 개운해졌다. 말개진 기분은 아무런 편견 없이, 구속 없이 무엇인가를 그것, 아니 그 이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3. 시인은 '시 쓰는 방법을 가르칠 방법은 없다'고 했지만, 시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다정한 선생님이셨다) 동시에, 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도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시를 써보는 것은 고사하고- 한 편 읽어보는 일도 버거운 우리에게 이 책은 '시'가 얼마나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었던지, '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시'가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그러니까 어떻게 가까워지면 좋을지를 이야기한다.



각설하고, 비밀을 말씀드릴게요. 시는 '소리 내어' 읽을 때 자기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이 혼자 방에 앉아, 소리 내어 읽을 때, 시는 얼굴을 보여줄 겁니다. 시인 로르카 역시 이렇게 말한 적 있어요. "시는 입으로 읊는 것, 책 속의 시는 죽은 것." 그러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시집 속 글자들, 책 속에 못 박혀있는 글자들은 잠자거나, 죽은 척하는 말들입니다. 시인이 시를 쓰던 당시엔 펄펄 살아 날뛰던 글자들이었겠지요. 종이에 인쇄된 후 납작하게 눌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글자들을, 소리들을, 아니 음악을 깨워보세요. 깨우려면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입술, 목소리, 숨결로 글자들을 데려가보세요.(본문 중에서, 56-57쪽)



몇 주 전 관람했던 전시의 어느 작품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책 속에 가만 누워있는 글은 쓰이던 때- 쓰는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였다고. 책이든, 신문이든, 잡지든 무엇이든- 매체를 타고 전해져 온 텍스트가 독자에게 와서 또 하나의 생명을 얻을 때는 독자가 텍스트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러니 그 위에서 실컷 뛰어놀고, 밟아도 보고, 가만히 누워 쉬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느끼고, 대화하고, 사유하는 태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4. 그러고 보면 시는- 눈으로 읽는 것과, 필사하며 읽는 것과, 낭독하며 읽을 때 달랐다. 눈으로 읽을 때 잡지의 가십거리 같았던 시도 손끝으로 읽으면 달리 보였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낭독하며 읽으면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냈다. 시인이 경험에 이스트를 넣고 기다린 뒤,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면- 시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태도가 필요한 것 아닐까. 시가 끝날 때까지는 시인도 이 시가 어떻게 끝날지, 어디로 갈지, 어떤 힘을 담을지 알 수 없다는데- 그 시가 내게 닿아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지, 어떤 위로를 안길지, 어떤 에너지를 던져줄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할 테다. 다만, '쓰는 기분'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의 '읽는 기분'에도 그것이 조금은 반영되지 않을까. 반죽이 건강하게 발효되기를 바라는 마음, 정성스레 빚는 마음, 오븐에 넣고 기다리는 마음을 더해 서문의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쓸 때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내가 아니면서 온통 나인 것, 온통 나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나인 것.


쓸 때 나는 기분이 전부인 상태가 된다.


현실에서 만질 수 없는 '나'들을 모아 종이 위에 심어두는 기분.


심어둔 '나'는 공기와 흙, 당신의 눈길을 받고 자랄 것이다.


내가 나 아닌 곳에서 자라다니!



쓸 때 나는 나를 사용한다.


나를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건 나를 분사해, 허공에서 입자로 날아가는 기분.



나를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러 가는 기분.


나를 비처럼 맞은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살피러 가는 기분.


입자로 떠돌며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


그게 다가 아니지.


당신이 쓴다면, 서서 내 쪽으로 보내온다면 나는 당신을 뒤집어써야 할 게다.


그건 읽을 때의 기분.


당신을 뒤집어쓸 때의 기분.


시를 쓸 땐,


날개를 떨구면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든다.


날개를 버려도 내가 나일 수 있다니, 내가 날 수 있다니!


('서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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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바꾸는 생각들 - 유발 하라리부터 조던 피터슨까지 이 시대 대표 지성 134인과의 가장 지적인 대화
비카스 샤 지음, 임경은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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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 처음 접속했을 때, 나는 그들의 의도에 찬탄하면서도 이 플랫폼이 잘 운영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전 세계의 지성을 한곳에 모아보자는 상상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던 것이었으나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지식을 구성하고, 나누고, 수정하게 함으로써 이용자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보 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반대로 정보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키피디아'의 등장은 우리로 하여금 '집단지성'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우리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똑똑하다.'는 집단지성의 명제는 생각에 생각을 모으는 과정이 한 개체의 능력 범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후 TED, youtube, 대학의 공개강의, 지식인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서 오랜 시간 연구실 안에서만 논의되던 것들이 세상 밖으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고, 환호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럽게 쏟아져내리는 지식과 정보에 갈길을 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좁고 깊은'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은 만들 수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 로봇이 인간 사회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교실안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상황에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지만, 기후 이상이라든지, 세계 경제 흐름에 대해서는 깜깜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 모두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아주 좁은 부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머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시대와 사회는, 결국 오늘을 사는 우리의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이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우리의 생각은 아주 좁은 데서 그치고야 만다. 그러니 위키디피아가 시도했던 것처럼- 보다 다양한 맥락을 짚어줄 넓은 세계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더 정확하고, 안전하고, 믿을만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 <생각을 바꾸는 생각들>은 저자인 비카스 샤의 블로그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는 세계적 지성들의 생각을 집대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시대 대표 지성들과 인터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체성, 문화, 리더십, 기업가정신, 차별, 갈등, 민주주의라는 여섯 개 테마로 묶고 각각 예닐곱 개의 소제목을 구성해 인터뷰를 재배치했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지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커다란 테마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각자 다른 분야의 전문가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여기'의 세계이므로 결국 유발 하라리의 질문에 한스 짐머가 답했다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읽는 우리로 하여금 사고와 영감을 일깨워 더 깊은 차원을 경험하게 한다.


모든 물질적 개체의 속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직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됩니다. 이 관점에 보면 인간 역시 거대한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조각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는 각기 뚜렷한 속성을 지닌 개별적 주체가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그 개별적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정보들이 공유되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졌습니다. (카를로 로벨리: 본문 중에서, 55쪽)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대단한 만남들이 그저 '전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 단순하고 명료한 저자의 대답이 오늘의 나에게 커다란 느낌표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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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융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영성가의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BOOKULOVE(북유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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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로 독자를 완전히 압도한다. 이 책도 그렇다. <헤세와 융>이라는 제목,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가르침'이라는 부제, 무엇보다 검은 바탕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사진이 그렇다. (표지에서부터 완전히 넋을 놓았다는 얘기'ㅅ'...) 헤세와 융은 동시대를 살았던 거장이다. 헤세는 <데미안>, <유리알유희>, <싯다르타>등의 걸작을 남겼고, 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말년의 두 거장을 만난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구엘 세라노는 칠레 출신의 작가이자 외교관, 정치가다. 1951년, 미구엘이 34살 되던 해- 스위스에서 말년의 헤세와 융을 만났더랬다. 당시 헤세가 74살이었으니 조용히 노년의 삶을 살고 있던 헤세와 융에게 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던 셈이다. 이후로 헤세와 미구엘, 융과 미구엘은 몇 차례의 만남을 더 가지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진한 존경과 사랑이 담긴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평화로웠고, 고요했다. 그 사이 헤세와 융은 청년 미구엘이 품고 있던 물음표를 지워주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그림의 뒷면에 '헤르만 헤세에게, 상징의 세계로부터'라고 썼다. 그 구절을 가리키며 헤세에게 말했다. "제가 이렇게 쓴 것은 선생님께서 상징과 허구 속에 사시면서 그것들을 작품 속에서 발전시키고 확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39쪽)



좋았던 것은 미구엘이 헤세나 융 앞에서도 작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상당한 지식을 품고 있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가 품고 있었던 생각과 질문들은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철학과 작품, 사상을 해석하는 눈도 깊었다.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즐거울 수 있었고, 잦은 만남을 갖지 못했음에도 헤세와 융은 그를 '비밀 클럽' 회원이라거나, '오랜 친구'로 여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시간에, 이런 청년을 만나 몇 시간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겠는가)



그렇게 책은 저자의 발걸음과 기억을 따라 헤세와 융 사이를 오간다.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유희> 등 헤세의 주옥같은 작품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되었고, <데미안>을 융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확연하게 느껴지는 헤세와 융의 차이는 흥미를 더했다. 헤세와의 시간이 차분하고, 짙고, 깊은 홍차의 맛과 비슷하다면- 융과의 만남은 산미가 감도는 커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고,


그런 뒤에는 이미 얻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채식 호랑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연히 제대로 된 호랑이가 아니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인간도 똑같이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190쪽)


융의 분석심리학은 아직 내게 너무 어려운 개념이라- 손에 잡힐 듯 쉽게 읽히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을 몰라도 큰 울림을 주었던 <데미안>을 읽었을 때와 같이 이 텍스트들을 따라 걷는 길은 내적인 힘을 채워 넣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하고 있는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더랬다. 선생님과의 시간은 늘 유쾌했는데, 그 안에는 늘 '아하!'의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배우곤 했다. 열심히 읽었으나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 여전히 아우라로 가득 찬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나서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만으로 오늘은 웃는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선생님께 전화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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