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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융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영성가의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BOOKULOVE(북유럽)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은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로 독자를 완전히 압도한다. 이 책도 그렇다. <헤세와 융>이라는 제목,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가르침'이라는 부제, 무엇보다 검은 바탕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사진이 그렇다. (표지에서부터 완전히 넋을 놓았다는 얘기'ㅅ'...) 헤세와 융은 동시대를 살았던 거장이다. 헤세는 <데미안>, <유리알유희>, <싯다르타>등의 걸작을 남겼고, 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말년의 두 거장을 만난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구엘 세라노는 칠레 출신의 작가이자 외교관, 정치가다. 1951년, 미구엘이 34살 되던 해- 스위스에서 말년의 헤세와 융을 만났더랬다. 당시 헤세가 74살이었으니 조용히 노년의 삶을 살고 있던 헤세와 융에게 젊은 청년이 문을 두드렸던 셈이다. 이후로 헤세와 미구엘, 융과 미구엘은 몇 차례의 만남을 더 가지게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진한 존경과 사랑이 담긴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평화로웠고, 고요했다. 그 사이 헤세와 융은 청년 미구엘이 품고 있던 물음표를 지워주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그림의 뒷면에 '헤르만 헤세에게, 상징의 세계로부터'라고 썼다. 그 구절을 가리키며 헤세에게 말했다. "제가 이렇게 쓴 것은 선생님께서 상징과 허구 속에 사시면서 그것들을 작품 속에서 발전시키고 확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39쪽)
좋았던 것은 미구엘이 헤세나 융 앞에서도 작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상당한 지식을 품고 있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가 품고 있었던 생각과 질문들은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철학과 작품, 사상을 해석하는 눈도 깊었다.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즐거울 수 있었고, 잦은 만남을 갖지 못했음에도 헤세와 융은 그를 '비밀 클럽' 회원이라거나, '오랜 친구'로 여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시간에, 이런 청년을 만나 몇 시간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겠는가)
그렇게 책은 저자의 발걸음과 기억을 따라 헤세와 융 사이를 오간다.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유희> 등 헤세의 주옥같은 작품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되었고, <데미안>을 융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확연하게 느껴지는 헤세와 융의 차이는 흥미를 더했다. 헤세와의 시간이 차분하고, 짙고, 깊은 홍차의 맛과 비슷하다면- 융과의 만남은 산미가 감도는 커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고,
그런 뒤에는 이미 얻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채식 호랑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연히 제대로 된 호랑이가 아니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인간도 똑같이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190쪽)
융의 분석심리학은 아직 내게 너무 어려운 개념이라- 손에 잡힐 듯 쉽게 읽히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분석심리학을 몰라도 큰 울림을 주었던 <데미안>을 읽었을 때와 같이 이 텍스트들을 따라 걷는 길은 내적인 힘을 채워 넣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하고 있는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더랬다. 선생님과의 시간은 늘 유쾌했는데, 그 안에는 늘 '아하!'의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배우곤 했다. 열심히 읽었으나 완전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 여전히 아우라로 가득 찬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나서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만으로 오늘은 웃는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선생님께 전화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