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분필을 빠는 것처럼, 담배가 잘 빨리지 않았다. 바로 이순간 래종은 분필이 된다. 분필은 분노의 대상이 된다. 훌륭한 행진곡의 진수는 언제나 분노를 촉진시키고 고양시키고 분출시키는 데 있다. 하지만 억압되어진 분노는 모두 달 빛 속으로 승화된다. 그래서 아마도 달이라는 창공의 물질은 역사상 수많은 슬픔들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이다. 달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은.

하지만 분노란 얼마나 진실한가. 감정의 날 것. 살아 숨쉬는 , 펄떡이는 분노. 유치함, 메스꺼움, 경멸. 어른다운 세련됨이 결여된 것. 우아한 낮짝을 소유하지 못한 것. 모자른 것. 바보같은 것. 종합하여 말해서 배출시키지 못하고 승화시키지 못하는 어떤 것. 즉 이름하여 미성숙의 상태. 그래서 작가는 미성숙이란 진실한 무엇이라고 말한다. 좀 더 미성숙한 낮짝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내겐 네가 필요하다고. 왜냐하면 나는 나를 알 수가 없으니까. 나라는 존재는 너로 인해 완성되어지고 끈임없이 변형되어질테니까. 이쯤되면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 담론'이 생각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분위기는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소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다. 소설 속엔 두 개의 또 다른 단편이 섞여 있고 그래서 더 난장판이다. 일부러 그렇다. 헌데 난장판도 이 정도로 일관되어 지면 전혀 난장판이 아니다. 그래서 매우 잘 읽히고 어지럽지 않으며 재미도 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픈 핵심은 의외로 제4장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하여간 곰브로비치는 통쾌하다. 곰브로비치의 분노는 통쾌하다. 허나 아쉬운 건 통쾌한 분노 만큼이나 진실하고 아름다운 낮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튼 달은 지금도 젖어있고, 태양은 언제나 무섭다. 잔인하다. 태양 앞에선 세련된 낮짝이 아니면 끝장난다. 예쁜 낮짝엔 열광하지만 아름다운 낮짝은 쉽게 끝장나지 않는가. 바로 태양의 가공할 힘앞에서.  하지만

나는 태양에겐 아무런 유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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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4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오셨어요 ㅎㅎ

사막에서의낮잠 2007-10-05 04:49   좋아요 0 | URL
대파가 팔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