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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역사 - 개정판
하인리히 E. 야콥 지음, 박은영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커피 하우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 이슬람, 유럽, 한국의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
0. 커피가 여행했던 길 따라가기
1. 이슬람의 카프베: 종교
2. 유럽 (영국․프랑스 )의 커피 하우스:정치
3. 우리 나라의 다방: 문학
커피하우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커피하우스의 간단한 전경 스케치
커피하우스가 당 시대에 끼친 영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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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생각하기 :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고 탈레랑은 말했다.
한국, 일본, 중동과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세계 어디서나 사랑 받는 커피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아침 식사시간에, 베두인의 텐트 속에서, 사무실의 복도에서,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는 만남과 대화를 제공한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커피하우스에서는 단순히 커피만을 마신 것이 아니라, 커피 안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들의 사고와 감정을 같이 녹여 마셨다. 그 결과, 커피는 지적인 자극제로, 이성을 깨우는 신비의 약이 되어 당 시대에 다양한 방면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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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커피가 여행했던 길을 아시나요?
아프리카 → 이슬람 → 유럽 → 인도, 동남아시아 → 중남미 → 한국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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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커피는 석유 다음으로 가장 교류가 많은 상품이다. 아침에는 산뜻한 모닝 커피로, 점심때는 졸음을 깨우는 약으로 마시며 친구와 수다 떨 때도 우리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듯, 커피는 우리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친근한 음료가 되었고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메신저가 되었다. 우리가 커피하우스 안을 잘 보기 위해서 먼저 커피가 어떻게 전 세계의 음료가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 지금부터, 커피가 각 나라에 처음 전래된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커피가 여행했던 길을 같이 따라 가보자.
커피는 아프리카 동부 에디오피아 카파 지방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커피를 최초로 먹었던 사람은 카파 지방의 염소 치기 목동이다. 처음 커피는 유목 민족들이 철마다 이동할 때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재료 중의 하나로, 스프나 즙으로 먹기도 하고 생과일처럼 씹어 먹었다고 한다.
다음 글은 커피를 처음으로 발견한 칼디라는 목동의 이야기이다. 이를 읽고 커피가 어떻게 처음으로 발견되었는지 알아보자.
서기 850년 전후에, 염소 치기 목동 칼디가 가뭄이 계속되자 평소 가지 않던 먼 곳까지 염소 떼를 몰고 갔다. 염소를 풀어놓고 한가로이 거닐던 칼디는 그의 염소들이 길길이 뛰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아픈 줄 알았지만 며칠이 지나다 보니 이들이 어떤 나무의 열매(딸기류)를 먹고 난 후 그런 다는 것을 알고는 칼디도 그것을 먹어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칼디는 이를 수도원 원장에게 물었다. 원장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끓여 먹어 보니 기분이 매우 유쾌하고 잠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에 놀란 원장은 밤에 기도할 때 앉아서 조는 제자들에게도 마시게 했더니 과연 효과가 컸다. 그래서 신도들이 졸지 않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졸지 않는 수도원>이란 소문이 각지에 전해져 이 마법의 나무 열매는 여러 왕국에서 구하게 되었다.
후에 이슬람 세계로 초대된 이 음료는 빠르게 이슬람 문화권에 정착하게 된다. 졸음을 쫓아주는 효과는 이슬람교도들이 밤 새워 기도할 때 졸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고, 이슬람 사회에서 금지되고 있던 알코올 음료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 역할을 담당해주었기 때문이다. 곧, 커피는 반바쿠스적인 ‘이슬람의 음료’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아래는 이슬람으로 커피가 들어가게 된 경로를 알려주는 2개의 일화이다.
기도하는 이슬람교도
1.에디오피아에서 예멘으로 커피가 건너가게 된 이야기 중 하나는 수단 출신 흑인 노예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사라센으로 가는 길에 생존에 대한 방편으로 몸에 지녔다는 것이다. 즉 오랜 여정 중에 죽지 않도록 커피 열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가져 왔는데 이런 방법으로 커피 종자가 사라센의 예멘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2. 사라센의 한 탁발승이 에디오피아를 방문했는데 그 곳 사람들이 커피를 먹고 잠자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고국에 올 때 원두 몇 개를 가지고 와 그 커피로 몸의 통증을 치료했다. 이에 이슬람의 수도승들과 순례자들에 의해 커피는 급속도로 널리 퍼졌다. 그들은 이 커피를 신비롭고 성스러운 것, 신이 내린 소중한 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슬람 성직자들은 에디오피아의 야생 커피나무를 예멘의 아덴으로 이식해 와 대량 경작을 시도했다.
16세기에 유럽은 상업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스파이를 통해서 들어온 이 커피의 진가를 곧 알아보고 수입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처음 접한 유럽국가는 이탈리아로 십자군 전쟁 때에 커피를 처음 보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교도의 음료라고 싫어하다가, 15세기 에 커피를 마셔본 다음,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부 나라에서는 초기에 커피를 박해의 대상으로 보기도 했지만, 로마 교황 클리멘트 8세는 이 음료를 크리스쳔 음료로 승인했다. 그 후로 커피는 전 유럽에 걸쳐 인기 있는 음료가 되어갔다.
다음 글은 유럽 각국이 처음 커피를 접하게 된 이야기들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국가로 커피가 어떤 경로로 들어갔는지 살펴보자.
1. 이탈리아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왕국의 토대를 다진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이탈리아와 동지중해 상권을 놓고 대립과 교역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1480년에 남이탈리아를 원정하여 오트란트까지 진출했으나 마호메트 2세가 죽자 회군하여 다시 원정을 재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동 지중해의 상권을 놓고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 특히 베네치아와의 항쟁을 계속했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의 커피는 밀무역의 형태로 이탈리아의 신흥도시들에 조금씩 유입되었고 1580년에는 커피가 이탈리아 산마르코에 전해졌다.
2. 오스트리아
1529년 신성로마 제국 정벌에 나선 오스만 제국 군대는 수도 빈을 포위했다. 그 군대는 빈의 포위 기간 중 주민들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고 커피 마시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폴란드 출신 쿨시츠키라는 사람은 변장을 하고 국경을 넘나들면서 오스만 부대로 잠입해 오스만의 비밀정보들을 빈 당국에 알려줬다. 차가운 비와 눈에 시달리고 보급에 위험을 느낀 오스만 군대는 얼마 있다가 대량의 커피자루를 빈에 남긴채 철군했다. 오스만군대가 패배하여 철수한 이후, 빈 당국의 고위 관료는 쿨시츠키에게 포상으로 원하는 것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오스만이 남긴 커피를 원했고 1683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3. 네덜란드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 커피 농장에서 커피 종자 몇 개를 몰래 빼돌렸고 본국에 돌아온 1600년에 훔쳐온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카나타가에 뿌려 농장을 일궜다. 1616년 인도에 커피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인도로 밀파한다. 이 스파이는 인도에서 재배되고 있던 커피 원두와 묘목을 확인하고 이를 입수해 본국으로 밀반출 했고 네덜란드로 간 커피 묘목은 네덜란드 식물원에서 증식되었다.
4. 프랑스
루이 14세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접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시장은 1714년 루트레이트 조약의 기념으로 커피나무를 프랑스에 선물했다. 루이 14세는 이 나무를 파리왕립식물원에 이식한 후 전용 식물학자를 둘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면서 일반인들에게까지 커피를 마시는 유행이 번져나갔고 프랑스 카페시대가 개막되었다.
제국주의 시기에 유럽 국가들은 신대륙과 동남 아시아 등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커피를 이식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커피는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나 기후조건으로 인해 아라비아 땅 이외에는 커피가 자라지 않았고 이슬람인들의 커피 종자 유출 금지가 지속되어 뒷거래 형식으로 교역을 담당한 일부 이슬람 상인과 베네치아 상인들만이 커피 교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제국주의 시기가 되면서 기후 조건이 맞는 식민지 지역에 대규모 커피 플랜테이션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맞지 않는 자연조건으로 인해 실패를 하기도 한다.
다음 이야기를 읽으며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커피가 전래된 상황을 알아보자.
1. 인도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 커피 농장에서 커피 종자 몇 개를 몰래 빼돌렸고 본국에 돌아온 1600년에 훔쳐온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칙마갈거 지방의 카나타가에 뿌려 농장을 일궜다. 인도 커피 중 몬수닝이 매우 유명하다. 이 커피는 상품과 사람이 배로 운송되던 때 인도에서 유럽까지 배로 갈려면 몇 달이 걸렸는데, 이때 푸른색 원두가 황색으로 변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2. 스리랑카
네덜란드는 1658년 스리랑카에서 본격적인 커피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해외 플랜테이션에 대한 최초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670년에 스리랑카의 커피는 해충에 의해 떼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암스테르담의 시장이었던 니콜라스 위트손은 1693년에 말라바 섬의 제독 아드리안 반 옴멘에게 제독의 관할인 네덜란드 령 자바에 플렌데이션 조성을 의뢰했다. 그 즉각 암스테르담 식물원에서 새로이 증식된 에멘의 모카와 인도의 커피 교배 종자는 자바 섬의 바티비아 지방에 심어졌다. 그리하여 자바 섬은 첫 유럽인들의 농원이 조성되었고 1706년에 자바에서 생산된 커피와 커피나무의 첫 샘플이 아스테르담으로 보내졌다.
3. 필리핀
필리핀은 만다나오 섬을 발견한 스페인 장교가 당시 자국의 황태자 페리페 2세의 이름을 따 명한 이름인데, 18세기 초부터 커피가 스페인의 영향으로 재배되었고 1880년 무렵에는 세계에서 4번째 커피 수출국이 되었다. 그러나 스리랑카 커피 농장을 홍차 농장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된 커피 녹병균은 필리핀 농장까지 망쳐놓았다.
4. 베트남
베트남 최초의 커피는 1863년 선교사들에 의해 인도네시아로부터 도입, 통킹만 지역에 재배 되었으며 생산품목은 아라비카보다는 질이 낮고 값이 싼 로부스타종이 많다. 국가가 커피나무를 직접 소유하며, 베트남 전쟁 후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소수민족들에 의해 정책적으로 재배되기도 하였다. 돈 많은 일본이 베트남의 커피산업에 손을 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며 프랑스 또한 합작 플랜테이션을 하기도 하였다. 엄청난 생산량으로 베트남의 커피는 세계 커피 가격에 가격파괴를 불러 일으켜 심심치 않게 남미의 커피 산업을 흔들리게도 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기도 한다.
중남미로 이동 과정 역시 제국주의 정책과 관련이 깊다. 프랑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영국, 포르투갈, 에스파냐 등 17, 8세기에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 쟁탈에 온 힘을 기울인 나라들은 모두 커피 묘목을 이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전히 커피는 본국에서 인기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남미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조건이 생육기에는 날씨가 습윤하며 성숙기에는 건조하여 커피를 얻어내는데 최적의 토지들이 많아 대규모 흑인 노예 노동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커피 농업이 널리 행해졌다. 대표적인 산지로 브라질, 콜롬비아, 멕시코 등이 있는데, 이 지역의 커피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중 브라질은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커피 농원의 경영은 오히려 이 지역 경제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제국주의 시기에 단일경작 방식에 의해서 농업이 진행되다보니 이 지역 대부분 나라들이 커피 한 품종에만 매달리게 되었고, 농장주들의 무리한 커피 농장 확장 정책으로 커피가 과잉 생산되어 가격 폭락이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한 경기변동으로 인해 수확을 한 커피 작물을 그냥 바다 속에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 외에도 지력이 심하게 소모되며, 병충해 발생이 빈번하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소작지로 나누거나 벼, 목화, 과일, 사탕수수 등의 다각적 농업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기도 한다.
아래 이야기들은 중남미 지역에 커피가 처음 전래된 시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1. 미국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를 발견한 영국인 존 스미스 선장이 커피를 북미에 소개시킨 사람이라는 자료가 있다. 이때 커피는 꿀과 계피를 넣어 마셨다. 미국은 초기에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홍차를 즐기는 편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이 기호체계에 변화가 왔는데, 1773년 보스턴 차사건 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애국적인 행위라고 하면서 커피 판매가 급증했다.
한편,미국은 인스턴트 커피로 유명하다. 그러나 처음 이 커피는 혹평을 면치 못했으나 전쟁과 함께 간편한 커피가 선호되면서 이후 대량생산되었다. 특히 한국전쟁과 맞춰 크게 번성했고 이는 한국의 커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커피나무를 옮기고 있는 가브리엘 마티유 드 클리외
2. 마르티니크
1714년 네덜란드로부터 선물로 들어온 프랑스의 커피나무는 파리 왕립식물원인 자뎅 드 플랑트에서 잘 자라고 잇었다. 이때 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군도인 마르티니크로 발령 받은 해군 장교 가브리엘 마티유 드 클리외는 임지로 가기에 앞서 기념으로 가져 갈 것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친구와 함께 야밤에 식물원에 들어가 커피나무를 갖고 나왔다. 그는 나무를 유리 박스에 넣어 잘 보관함으로써 항해 중 소금기로 인해 나무가 죽는 것을 예방했고 자신의 식수까지 부어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1732년 커피나무를 안전하게 마르티니크로 운반하는데 성공했고 1726년에 첫 열매를 맺었다. 이 묘목은 다시 아이티와 산토도밍고 과델로프, 자메이카 등지로 보내졌고 다시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중남미 전역으로 확산되어 이 지역의 커피는 중남미 커피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수리남
수리남은 브라질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남미 커피가 뿌리내려졌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 국왕뿐만 아니라 몇 그루를 를랜더스 해적에게 선물했다. 이 해적은 네덜란드령 가이아나로 가져가 심었는데 프랑스 도독이었던 모제스가 이곳의 커피나무를 훔쳐 프랑스령 가이아나 총독에게 이 커피묘목을 놓고 자신의 사면 및 프랑스로의 귀환을 흥정했다. 이 흥정으로 프랑스령 가이아나에는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했고 가이아나에 커피는 브라질로 밀반출되게 된다.
4. 브라질
17세기 말엽, 브라질과 수리남 사이의 국가 가이아나는 네덜란드령과 프랑스령으로 분리되었는데,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브라질 주지사는 이 분쟁을 중재하기 우해 프랜시스코 지 멜로라는 이름을 가진 육군 상사를 단장으로 한 특별 사절단을 기이아나에 파견하였다.
멜로 상사는 형식상으로는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사절대표였지만 실제의 비밀스런 임무는 기이아나에 있던 커피 나무의 모묙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기이아나에서는 네덜란드령에서 먼저 커피가 재배되었고 프랑스령에서 이 묘목을 훔쳐 심었는데, 프랑스령의 커피나무들이 훨씬 좋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큰 키와 잘생긴 용모를 지닌 멜로는 가이아나 총독을 만날때는 영토문제 해결에만 온통 신경을 쓰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저녁마다 열리는 파티 클럽에서는 음악과 식물에 조예와 관심이 많은 낭만적인 인물로 변신했다 멜로는 그 파티 클럽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늘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재치있고도 품위있게 처신해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명의 여자에게 관심을 끌고자 노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로부터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바로 가이아나 총독의 부인이었으며 두 사람은 곧 뜨거운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브라질에는 커피나무가 없어 무척 아쉽다고 총독부인에게 말하면서 귀국해서 부인이 생각날 때마다 커피나무를 바라보고 싶다고 몇그루 달라고 호소했다. 잘 생긴 애인이 커피나무를 보면서 자신과의 추억을 그리워하겠다는 데 감격한 부인은 남편인 총독이 내린 커피나무의 해외 반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몰래 멜로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멜로는 총독 부인이 건네준 꽃다발 속에 다섯 그루의 어린 묘목이 있음을 확인한 후 브라질로 귀환했다.
그럼 과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을까?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개화기인 1880년대에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문헌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인이 커피를 마셨다기보다는 프랑스나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병 속에 검은 액체를 넣어서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마셨다고 하는데, 이 검은 액체를 가배차라고 일컬었다. 문헌상, 커피를 공식적으로 먹은 사람은 고종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커피는 상류층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용되었다. 커피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1895년에 출간되면서부터이다. 그 책에는 커피 외에도 미국인들의 식생활과 예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당시의 하이칼라 계층들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게 되었고, 사교적인 모임이나 대화를 나눌 때는 어김없이 커피를 준비하곤 하였다.
1890년 우리 나라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을 비롯한 외국 관원들은 국내 유명인사를 접대할 때 커피를 선물하기도 하였고, 차츰 개화된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사람들은 커피를 천한 물건이라 하여 하인에게 던져 버리거나 선물을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다음은 커피와 관련된 고종 독살설에 관한 일화로 이 사건 이후 커피 음용이 일시적으로 주춤해졌다.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공식적인 역사는 1895년 (고종 32년)에 을미사변 (아관파천시)때 러시아 공사가 커피 나무의 열매를 한국에 가져 오면서부터였다. 러시아 공사는 가지고 온 커피 열매를 건조하여 잘 으깬 다음 끓인 물을 놓고 맛있게 만들어서 고종황제에게 진상하여 시음하게 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 고종은 세자(후에 순종)와 함께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마셨고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커피를 찾았다. 그때부터 커피는 궁중내의 기호 식품으로, 주로 벼슬아치들이 즐겨 마셨다. 바로 숭늉 문화에서 커피 문화로 가는 하나의 선구자 역할 노릇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커피를 좋아했던 고종은 그로 인해 독살될 뻔하기도 했다. 1889년 러시아 역관으로 세도를 부리던 김홍륙이 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또 러시아와의 통상에 거액을 착복한 사건이 들통나 흑산도 유배가 결정되자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김홍륙은 덕수궁에서 일하던 두 하사인을 매수, 고종의 생일에 독약을 탄 커피를 마시게 하려다 발각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종 황제를 사해하려고 했던 역관 김홍륙은 오히려 자신이 먼저 황천길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1. 커피, 카프베 그리고 이슬람교: 이슬람
♠ 아래의 글은 이슬람의 커피하우스인 카프베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들이다. 다음 글을 읽고 질문에 답해보시오.
이슬람 카프베 읽기 자료
1. 이집트의 카프베 폐쇄령.
1517년 이집트 술탄은 메카에 새로운 총독을 임명했다. 카이르 베이라는 이 청년은 자존심이 강하고 야망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카프베에 모인 사람들이 정치를 비판하고 그를 비방하는 글귀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밤늦도록 카프베에 앉아 빛을 밝히며 이야기를 즐겼다. 성직자들조차 모스크 열주 아래에서, 그들만의 카프베에 앉아 과감하게 카사르 베이의 정치를 비판했다. 곧바로 카이르 베이는 성서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커피 음용 금지, 카프베 폐쇄, 위반자는 추방이라는 법을 공포하려고 했다. 그리고 술탄에게 이 사태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술탄 역시 모든 백성들이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고 있는 상황에서 커피 금지령을 승인하기 모호하다고 하며 오히려 금지령을 취소시키라고 명했다. 그 결과 카이르 베이는 커피와의 전쟁에서 실패했고 이 소식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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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르베이라는 총독이 카프베 폐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카이르베이는 카프베 폐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3. 이집트 술탄이 카이르베이의 요청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4. 카프베를 폐쇄하려고 하는 카이르베이는 종교적 이유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 당시 승려들 중 많은 이들이 커피 애용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종교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친구들과 함께 토론해봅시다.
coffee zone: 커피는 북위 25-남위 25 사이에서만 성장하고 여기의 커피 99.9%가 전세계 커피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 다음장 연결
2. 오스만 제국의 카프베 금지령
오스만제국의 술탄(황제) 무라트 4세는 모두 평복으로 갈아입은 호위무사 두 명을 거느린 채 이스탄불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술탄이 이렇게 평복으로 갈아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민심을 알아보거나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오스만제국의 백성들에게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술탄이 싫어하는 두 가지를 백성들에게 강제로 금지시키기 때문이었다. 술탄이 싫어하는 것은 많은 백성들이 즐기는 커피와 담배였다. 술이야 어차피 이슬람 율법이 금지시키는 것이었지만 커피와 담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술탄은 카피와 담배가 경건한 정신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쓸데없는 불만이나 토론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커피를 파는 카프베(카페)에서는 이런 저런 모임이 형성되고 있었다. 또, 억압이야 말로 종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커피는 사람을 취하게 하고 코란이 금하고 있는 것” 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커피를 즐겨 마시던 수도승을 모스크에서 쫓아냈다. 그러던 것이 커피와 담배를 금지시키는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만드는 계기가 생겼다. 이스탄불에서 대 화재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이었다.
“이는 담뱃불과 커피를 끓일 때 쓰는 불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포고하건데 앞으로 모든 카프베의 문을 닫게 할 것이며 흡연은 금지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하겠노라!"
술탄의 이런 포고를 들은 오스만제국의 백성들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카프베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우리 생활의 일부다. 코란에 그러지 말라고 쓰여있나? 어이없는 규제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도처에 있던 카프베는 헐리기 시작했고 커피를 마시는 모임은 뿔뿔이 흩어졌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으며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정도면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없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어야 할 테지만 오히려 백성들의 반발심은 높아져만 갔다. 심지어는 단속을 나온 관리들조차 커피와 담배를 즐기다가 체포될 지경이었다.
술탄은 크게 화를 내며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단속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밤이면 술탄은 평복을 하고 칼을 찬 채 담배를 가지고 아무에게나 권하곤 했다. 담배를 받아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당장 끝나는 것이었다. 이런 암행순시가 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심은 더욱더 나빠지고 커피와 담배는 점점 은밀하게 보급되었으며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즐겼다.
오늘 술탄이 찾아가는 곳은 비밀 카프베가 있다는 장소였다. 궁정시위가 흡연혐의로 처형당한 이후 술탄은 커피와 담배에 관한 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탄이 찾아간 비밀 카프베에선 여기저기서 풍겨 나오는 커피 향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술탄은 호위무사에게 군인들을 부를 것을 몰래 지시한 후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양을 들어볼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카프베 구석에 가 앉았다. 작은 컵에 담긴 커피 한잔이 술탄 앞에 놓였다. 한 사내가 딱히 누구 에라고도 할 것 없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거 말이야, 취향의 문제를 강요한다는 게 말이나 돼? 커피와 담배는 우리 생활의 일부야. 지금 술탄은 미쳤어, 미쳤다고."
술탄은 머리부터 피가 거꾸로 내려가는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그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목숨걸고 그런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수? 커피나 담배가 없어도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애초 알라께서 커피나 담배가 생활의 일부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커피만 하더라도 경건한 예배에는 방해가 된다고 금지한 성자도 있었고, 담배는 기독교인들이 들여온 부산물이요." 사내는 "우리가 커피와 담배가 미치도록 좋아서 이럽니까? 말도 안 되는 법을 제정해 금지시키고 억압하니 반발심에 더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비록 담배나 커피를 즐기지 않아도 심적으로 동조해 나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기 처음 오나요?"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분이네."
사람들이 술탄을 의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카프베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술탄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이토록 커피와 담배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희들은 어리석구나."
그러자 그 사내는 눈을 부릅뜬 채 대답했다.
"우리는 타율에 의해 보편적인 생활까지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셔서 앞으로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난 너희를 이해하지 않는다. 너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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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탄 무라트 4세가 야행을 나갔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오스만제국의 술탄(황제) 무라트 4세가 싫어했던 3가지는?
3. 무라트 4세가 카프베를 금지시키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4. 당시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커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5. 무라트 4세의 카프베 금지령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도는 어땠나요?
생각하며 읽을 내용 : 카프베는 이슬람 세계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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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람 세계에 커피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커피전문점인 카프베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1475년 <키바 한>은 최초의 카프베가 되었고, 16세기 말에 이르면, 작은 카프베의 숫자는 600여개가 넘게 되었다. 초기의 카프베는 주로 대상들이 지나가는 휴게소에 출현해 주로 마을이나 시장 가운데 있었고,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된 카프베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의 여인숙 역할도 했다. 그러다가 16세기가 되면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널리 만들어져 항상 손님들이 붐볐다. 일반적으로 카프베 내부는 아주 큰 주전자에 손님들을 위해 커피가 끓고 있었고, 플룻이나 바이올린 연주, 가수들이 공연을 했다. 또 남성들에게 제한되기는 했지만, 카프베는 모든 계층 사람들의 휴식 장소로서 애용되었다. 이 곳에서 지식인들은 종교나 학문에 대해 논쟁했고 한가로운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며 장기나 체스 등을 즐겼다. 또, 음유시인들은 문예를 논하면서 시를 읽는 멋진 장소로 활용했다. 만담이나 그림자 연극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또, 구석에 이발소를 만들어 사람들이 면도를 하거나 머리를 다듬기 위해 이발소를 가는 수고를 줄일 수도 있었다.
이슬람의 카프베 안
1. 이
2. 커피와 카프베의 확산은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생활 그리고 정치에도 많은 변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카프베는 누구나 모여 이야기를 하고 체스를 두면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교장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뜻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면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공적인 이야기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술탄이나 총독들의 잘못을 논쟁과 토론을 통해 비판을 하는 곳으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이곳이 정치적 불온분자의 온상이라고 판단하여 폐쇄 명령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카프베를 폐쇄하는 표면적인 이유를 코란의 교리에서 찾았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커피는 사탄의 음료로, 잠을 깨우게 하고 취하게 하여 밤을 환락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엄숙한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 겉으로는 알라의 뜻에 맞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곳곳에서 커피를 신성화하고 있어 근본적으로 코란에 위배되는 인류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또, 억압이야말로 종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 때문에 커피 금지는 사람들의 종교열을 더 불태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커피 음용을 주장하는 이들은 커피는 피로와 긴장감을 느끼지 않고 밤새도록 깨워 주기 때문에 예배 때마다 항상 먹어야 하는 음료라는 것이다. 이슬람 사회에 커피가 손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밤 기도 때 예배자들의 졸음을 깨워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약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또,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힘이 쇠하지 않도록 이 음료를 발명하게 했고 이 덕택에 마호메트는 적들을 쉽게 무찌를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사람들은 알라의 위대함, 영예, 그리고 예언자 마호메트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절차와 함께 커피를 음용하여 종교 생활을 더욱 독실하게 할 수 있었다. 이런 종교적인 신앙 생활은 커피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게 했고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음료로 만들었다. 그 결과, 지도자들의 금지령은 많은 저항을 받게 되었고 마지막은 항상 카프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지금도 카프베는 “지혜의 학교” 혹은 “ 문화의 학교”라고 불리며 학문적인 대화나 지적인 놀이, 정치적인 토론과 논쟁을 즐기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고 있고, 경건한 종교 생활에 많은 활력소를 주는 대단한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카프베에서 예의만 지키면 커피 한잔은 공짜?
카프베에는 커피를 추출하고 마시는 예절과 법도가 있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 절을 하고 상대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많이 했다. 커피는 친절함과 환대의 표시로 손님에게 제공되었고, 주인과 함께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결례로 생각되었다. 누구든 카프베에 앉아 있다가 아는 사람이 들어오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관례로 이는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을 위해 카페를 대접하겠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사람은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카페에서는 서로 커피를 사겠다며 다투는 일이 예사여서 작은 마을의 카프베에서 옆자리의 낯선 사람이 보낸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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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피하우스와 정치 :영국․프랑스
♠다음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에 관련된 일화들이다. 읽고 난 후, 아래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유럽의 커피 하우스 읽기 자료
1, 영국의 커피 하우스 금지령
17세기 말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는 치안 방해의 온상이자 게으른 자와 정나미 떨어지는 자들의 아지트라고 비난하며 커피하우스 폐쇄를 주장했다. 커피하우스는 정치인들이 악의에 차서 수치스러운 행위를 한다는 소문이 확산되고 국왕의 위엄과 그 치세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포프(영국의 시인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커피는 정치가들을 현명하게 만들지. 또한 눈을 반쯤 감고도 모든 걸 꿰뚫어 보게 하지”
2. 영국 여성들의 커피 금지 탄원서
많은 이들이 대부분 시간을 커피하우스에 소요하는 것에 대해 여성들과 주류 판매상들이 커피 하우스에 대해 공격을 했다.
먼저 여성들은 1674년에 “이 불기한 열매가 수입된 뒤로 남자들이 그 열매가 생산되는 사막처럼 불모의 몸이 되어 가고 있으며, 강건한 선조들의 후손은 원숭이나 돼지처럼 멸종일로에 있다.” 고 불만을 토로하며 정부에 커피 금지 청원을 냈다
또, 주류 판매상들은 “ 커피하우스는 산업에 커다란 방해물이 되었다. 과거에 신망 높았던 유능한 신사와 상인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커피하우스를 연다. 이들은 커피하우스 한 켠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보통 서너 시간을 소비하는데. 이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들을 불러내기가 다반사이므로 결국 수많은 남자들이 여섯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나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게 된다”고 하면서 커피 하우스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3. 프랑스 혁명 직전의 커피하우스
역사학자 미슐레는 커피를 18세기 지적인 삶의 대폭발이라고 표현했다.
“ 반세기 전 우리 젊은이들이 와인통과 술독에 빠져있던 선술집 시대는 지나갔다. 한밤중에 술에 취해 빠져 있던 사람도 사라졌고 시궁창에 처박힌 점잖은 양반들도 사라졌다. 정신을 맑게 하는 커피는 술과 달리 뇌에 영양을 공급하고 머리를 맑게 해주어 진리의 밝은 빛으로 현실을 비추고 성욕을 억제하여 성적인 자극 대신 마음을 자극시킨다. ... 뷔퐁, 디드로, 루소가 마시는 강한 산토도밍고 커피는 뜨거운 영혼을 두 배나 달구었다. 카페에 매일 모여들던 선각자들은 커피를 마시며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혁명의 꿈을 키웠다. ”
4. 프랑스 혁명기의 커피하우스
7월 14일 <팔레 르와이얄 카페 >뜰에서는 항구적인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이 인민재판이 벌어져 파리 시장 플레셀이 최초로 처형되었다. 마찬가지 포고가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또 죽은 사람들의 목을 <카페 카보>에 가져온 사람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
8월 30일 흥분한 군중이 생튀뤼그의 선동에 따라 <카페 드 포아>에서 국민의회를 향해 데모행진을 했다. 새로운 시당국은 이같은 정보를 빨리 입수하여 국민들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케 했다. 루스탈로와 데물랭(선동정치가)은 이에 대항해 무기를 들라고 봉기했다. 국민군의 사령관인 라파이에트 후작이 몇몇 봉기자들을 체포한 후 무장한 병사들을 <카페 드 포아> 안으로 들여보냈고 그 결과 카페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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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찰스 2세가 커피 하우스 폐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슬람의 카프베와 함께 생각해봅시다.
2. 여성들과 주류 판매업자들이 초기에 커피 하우스를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커피하우스가 선술집이나 목로주점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당시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요?
3. 프랑스 혁명 당시, 커피 하우스는 혁명과 관련하여 어떤 장소로 활용되었나요?
생각하며 읽을 내용: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어떤 장소로 활용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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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커피라는 음료뿐만 아니라 카프베 문화까지 함께 수입하였다. 그래서 17세기 런던과 파리에는 많은 커피하우스가 세워졌다. 런던에는 1700년경 3천 개에 가까운 커피하우스가 있었고 프랑스 역시 1700년대에 이르자 수많은 커피하우스들이 앞다투며 문을 열었다. 특히, 1689년 파리에 세워진 카페 프로코페는 이미 조그만 컵에 담긴 커피를 팔고 있었는데, 카페 곳곳에 장식된 거울, 대리석, 벨벳 등은 프랑스의 커피 문화를 짐작케 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
1.
처음 커피가 유럽에 들어왔을 때 궁궐에서 먼저 마시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부르조아지, 서민층을 거쳐 모든 계급이 맥주나 와인 대신 커피를 음료로 선택하였다. 그 동안 깨끗한 물과 신선한 우유를 접할 수 없었던 곳에서는 독한 소다수, 맥주, 와인이 음료의 전부였기 때문에 커피는 빠른 시일 내에 인기 있는 음료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맥주를 마시며 일하던 예전에 비해 커피 등장 이후 노동자들은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작업 능률도 훨씬 향상되었다. 또, 사업가들은 선술집에서 커피하우스로 재 단장한 곳에 앉아 맑은 정신으로 일하며 사교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 커피하우스
런던의
고급 커피하우스
커피하우스 안은 일반적으로 수수했다. 유리 랜턴이 가게 앞면을 비추고 있고 아름다운 철제 간판으로 커피 하우스의 위치를 알렸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일층과 상층에 개인용 방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한 방에서 즐겼다. 벽에는 그림과 더불어 준수사항이 걸려 있다. 준수사항의 주 내용은 “과음과 좋지 못한 술버릇 등에 효능이 있습니다. ”라는 표현과 같은 커피의 효능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그리고 커피하우스에 들어오는 손님은 1페니 정도의 자리 값만 내놓으면 어디든지 앉을 수 있었고 누구도 이곳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실내는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 뭔가 쓰는 사람, 지껄여대는 사람, 마시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 말다툼하는 사람 등 다양했으며 보통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단, 여성의 출입은 제한된 남성만의 공간이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커피하우스는 남녀구분이 없었고 귀족들이 사용하는 고급커피하우스와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커피하우스의 구분이 있었다. 고급 커피하우스는 사교장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으며 의자나 타불렛에는 빌로드나 명주천이 씌워져 있었고 그밖에 대리석 테이블, 샹들리에, 그리고 깨끗이 닦여진 거울이 있었다. 사람들은 장기나 도미노, 트릭트랙을 즐겼다. 이에 비해 일반인들은 이곳에서 도박을 하면서 체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한편, 정치인, 법률가, 문학가 등 커피하우스를 찾는 사람들은 각자의 단골집이 있어서 기호에 맞는 곳을 찾아다녔다.
2. 유럽인에게 커피하우스는 단순한 커피 마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커피 하우스는 시민들의 정신적 근원이자, 쉼터 역할을 하면서 삶의 형태와 본질을 변화시켰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고 1페니만 지불하면 누구나 마음대로 그리고 매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찾으려면 그 사람의 주소를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어느 커피하우스에 다니느냐?"고 묻는 것이 훨씬 찾기 쉬웠다는 표현은 이 당시 커피 하우스가 완전히 정착하여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단순히 소수의 지식인들의 담론장이었던 곳이 점차 눈을 뜬 민중들이 찾는 곳으로 변화되어 이 곳에 모인 이들은 정치와 유행에 관한 세상의 모든 소식을 듣고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신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론의 형성이나 정보 교환의 큰 역할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1676년 영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불만이 많은 이들이 모여 비판만을 한다는 이유로 커피 하우스 출입을 폐쇄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커피하우스는 이미 정당의 사무실이나 당원 선발을 위한 접대실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폐쇄를 하다면 정치를 해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나중에 파악한 정부는 커피하우스와 타협을 하게 되는데, 선동적인 연설을 행하지 않고 책, 전단지 등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을 한 후 커피 하우스 문을 다시 열게 했다. 프랑스에서도 커피하우스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18세기 전후로 커피 하우스를 찾는 사람들은 귀족과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주로 제 3계급인 평민들이 단골로 드나들면서 생활에 대한 불만을 커피 한잔을 놓고 드러냈다. 이들과 함께 한쪽 구석에는 언론인, 작가 등 글을 쓰는 사람들이 커피하우스 안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던 사회적, 경제적 비참함과 불만들을 각종 연설과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커피하우스는 당시 여론, 즉 비평과 정치적 열정을 만들어 내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면서도 폐쇄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커피 하우스에서 바치는 세금은 당시 국가 재정 적자를 메꾸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프랑스 커피 하우스는 이런 세력들이 집합하여 앙시앵 레짐 직후 혁명 모의 장소로 최적지가 되었다. 또, 프랑스 혁명 중에도 커피하우스는 여론의 중심에 있었고 실천장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동 정치가였던 데물랭은 커피 하우스 앞에서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호소를 했고, 급진파 지식인들은 왕정 붕괴를 위해 커피를 사이에 두고 온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커피하우스를 미워하는 그룹은 정부 뿐만이 아니었다. 커피하우스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영국의 청교도주의자들과 커피 때문에 주류 판매가 저조해졌다고 생각하던 선술집 주인들, 그리고 커피하우스에 남편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여성들 역시 커피하우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커피하우스를 폐쇄해 줄 것을 정부에 청원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로는 커피하우스에 들어간 남편들이 해가 져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3-4시간은 기본이고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하루종일 그 안에 죽치고 나올 줄을 몰랐다. 이에 여성들은 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남성들은 이 탄원서가 여성들의 억지스런 요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거세게 커피 하우스 출입을 하며 여성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이 청원서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은 출입이 제한되었던 영국의 커피하우스의 여성 출입 금지령을 해제시켰다. 즉, 특정 분야의 남녀평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 이후로 커피하우스는 여성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내부 장식 등 품위나 청결함에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3. 다방과 고뇌에 찬 문학: 한국1910-1960
읽기 자료
1920년대 다방의 모습
다방 '아네모네'의 마담으로 있는 영숙은 매일 이 다방을 찾아와서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신청하는 학생이 기다려진다. 그 학생은 얼굴이 창백하고 언제나 우수에 젖어 있는 듯했다. 영숙이 그 학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보이를 통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한 장 특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받은 뒤부터였다. 그 사각모를 쓴 학생은 말없이 신청한 곡을 듣고 갈 뿐, 한 마디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학생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 끝에 그녀는 귀걸이를 달게 되었다. 그 학생은 미완성 교향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마담 영숙이 앉아 있는 쪽을 가끔씩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학생이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찾아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함께 왔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그 친구는 어느 교수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병으로 죽게 되자 거의 미쳐 버린 것"이라며 대신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들었던 것도 그 부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으며, 또 그가 가끔씩 마담 쪽을 바라본 것도 마담이 앉아 있는 카운터 뒷벽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마담 영숙은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지고 고적해졌다. 그 뒤 다방 '아네모네'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미완성 교향곡이 아닌 재즈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담의 귀에는 자랑스러운 귀걸이도 보이지 않았다.
-주요한의 아네모네의 마담-
1930년대 다방의 성행
이상은 무려 네번이나 다방을 열고 닫았던 문학가이다. 종로네거리의 신신백화점 위에 있던 제비 다방, 인사동에 낸 쓰루(학을 뜻하는 일본말), 문 열기 2,3일 전에 허가 취소된 69다방, 명동의 무기(보리를 뜻하는 일본말) 다방이 그가 탄생시킨 것이다. 그가 처음 시작한 제비 다방은 동거하는 기생 금홍이와 함께 경영하던 서울의 명물이었다. 하지만 1935년 9월에 문을 닫고 만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 차를 구비해 놓지 못했고 손님이 없어 장사가 되지 않아, 결국 다방의 월세가 밀린 까닭으로 집주인에게 쫓겨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인사동에 쓰루 다방을 냈지만 얼마 가지 못하였고, 또 네번째의 무기 다방도 곧 간판을 내렸다. 한편 세번째 시도한 69다방은 문을 열어보지도 못하는 비운을 맞았으니. 인사동에서 광교로 건너온 이상은 69다방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종로 경찰서의 허가를 받은 상태, 그래서 식스 나인이라 쓰로 69의 도안을 그린 간판을 걸어 두었다. 그런데 다방을 열기 2,3일전 종로 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가 보니 경찰은 다방 허가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슨 "풍기문란죄." 식스 나인이란 말은 아주 선정적이어서 당시 풍기문란죄에 걸리는 말이었지만, 경찰이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처음에 허가를 내주었다가 어느 시민의 항의를 받고 뒷북을 쳤던 것.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날짜만을 기다리는데, 이것을 보고 말 뜻을 아는 사람은 속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모르는 사람은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시민이 "이렇게 풍기문란한 다방 이름을 어떻게 허가할 수 있느냐."는 항의를 듣고 뒤늦게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때 이상은 속으로 '이놈 들' 하고 비웃으며 경찰 골린 일을 재미있어 했다는데.. 그 뒤로는 종로 경찰서 관내에서 영업허가를 얻을 수 없게 되어 명동으로 진출, 그때 낸 다방이 무기이다 - 이상의 커피 편력-
1950년대 문인들의 다방
1951년 10월 하순 경향신문사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경향신문 기자였던 박인환도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박인환 뿐만 아니라 여타 문인들도 피난민들 틈에 끼어 임시 수도 부산으로 몰려 들었다. 좁고 기다란 항구 도시, 그 음습한 피난의 공간에 수많은 유랑민들이 넘쳐 흘렀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 그 자체가 삶의 목표였기에 추위와 허기,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쓰러질 듯한 바라크 지붕 밑에서 꿀꿀이 죽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도 예술인들은 그들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신적 귀족으로 남고자 했다. 싸구려 비짓국을 안주 삼아 "낙동강" 소주를 마시더라도 줄리엣 그레꼬의 샹송을 흥얼거리고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에 심취했다. 그야말로 예술인의 "밀다원 시대" 가 열렸던 것이다. 밀다원은 문인들이 주로 찾던 찻집이었다. 문인들은 자주 가는 찻집별로 나뉘어져 밀다원파 (김동리,황순원,조연현, 김발봉)/ 금강다방파 (박인환, 김경린, 이봉래, 김규동) 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주로 밀다원파는 문총파 중심의 기성 문인들이고, 금강파는 신진시인들 특히 박인환 중심의 "후반기" 동인들의 집합소였다. 이렇게 찻집에 몰려들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며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곤 했던 것이다. 혼자 있으면 불안한 시절, 함께 모여야만 위안이 되는 그야말로 혈거 부족의 시대였다.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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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을 읽고 물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1920년대 다방 안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문장을 표시해보세요.
2. 이상이 다방을 열고 닫은 것은 몇번인가요? 1930년대 다방을 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었나요?
3. 밀다원이라는 다방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4. 밀다원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모였나요?
5. 밀다원의 경쟁 다방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6. 밀다원과 금강다방에 모인 문인들이 주로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생각하며 읽어야 할 내용: 한국의 다방은 암울한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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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략 1890년 전후로, 이는 에디오피아의 양치기 소년 칼디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지 10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다. 당시는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이권 쟁탈전을 벌이던 때였으므로 외국의 상품들이 물밀듯 밀려 들어온 시기였다. 정식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지냈던 고종이라고 한다. 그 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미인계 전략으로 한국 사교계에 침투한 손탁이란 여자가 공사관 앞에서 <정동구락부>를 경영하였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다방으로 각종 다류와 양식을 선보인 곳이다. 한일합방 직후에는 명동에 긴샤텐(찻집을 뜻하는 일본어)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일부 고위층에 한정된 사람들만이 드나들던 곳으로 보통사람들에게는 아직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19년에 이르게 되자, 오사카에서 이름을 날리던 카페 <미인좌>가 충무로 2가에 지점을 내고 그 옆에 <사롱 아리랑>이 개업을 해 경쟁을 했다. 다방이 대중화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이며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었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이었다가 다음에는 다실, 찻집으로 불리워졌다. <명과>라는 다방은 초기에는 제과점으로 홍차나 커피를 함께 팔다가 차츰 커피 맛을 찾아 모여드는 손님 때문에 다방으로 변모하였다. 이 다방이 당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끌자 그 건넛집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다방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이고,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다방은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한 조각가 이순석이 조선 호텔 건너편에 문을 열었던 <낙랑팔러>가 최초였다. 이곳은 곧 문학가인 정인택, 이상, 박태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회 사람들, 화가, 영화인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바로 이 <낙랑팔러>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하나 둘씩 생겨났는데, 당시 유명 인사들이 경영하던 다방을 들면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류>, 정치가 이기붕의 <올림피아>, 문학가 이상의 <제베>, <쓰루>, <69>, <무기> 다방 등을 꼽을 수 있다.
손탁 호텔 전경
1. 우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시대를 지나 우리 민족은 8․15해방을 맞이했지만, 그 기쁨은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얼마가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은 커피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중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인스턴트 커피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전쟁 같은 비상시에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인스턴트 커피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암거래되었고, 여기에 막대한 외화 유출 현상이 나타나자 정부는 국내 커피업체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이는 커피가 나라 안에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다방의 인기를 더 높여 주었다.
2. 1930년대에 이르러, 다방의 범람현상이 나타나 골목마다 다방 간판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여급의 숫자는 70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경성 역의 티 룸이나 백화점의 옥외 카페 등도 이때 활발하게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다방 안은 모나리자 상과 같은 포스터가 걸린 벽과 낡은 목조계단, 그리고 빛 바랜 융단 의자의 내부장식, 동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축음기에서는 흘러나오는 노래로 설명될 수 있다. 축음기에서는 주로 째즈가 흘러나오거나 클래식이 나왔고 메뉴 판에는 가배라고 불렀던 커피나 깔피스(가루삐스)등이 적혀 있었다. 이 당시 커피는 숯 또는 탄불을 이용해 커피가루가 든 약탕기나 냄비 등으로 끓여낸 것이 대부분이다. 커피가 쓴맛의 대명사가 된 것도 끓이면 끓일수록 탄 맛과 쓴 맛 밖에 남지 않음을 몰랐던 무지의 탓이다. 손님은 젊은 인텔리 계층들이 모였으며 어떤 이들은 한잔에 10-15전 정도 하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앉아 있는 경우도 있어서 벽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1950년대에 서울거리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으나 전쟁 중에 들어온 인스턴트 커피의 등장으로 다방만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방은 안이 밝고, 유리창이 많았으며 한가운데는 드럼통 스토브가 열기를 뿜고 있고, 카운터 앞이나 구석에는 상록수가 한, 두 그루씩 놓여 있었으며 한 스무 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다방은 다방다운 시설이 없는 곳도 있어 시골 간이역 대합실 같은 곳도 있었다.
3. 1910-1960년대 다방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토론하고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의 사상과 종교, 그리고 유행과 취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관심이 표출된 곳이었다. 비록 일제 시대와 6.25전쟁이 주는 암울함이 함께 공존했으나, 다방은 당 시대의 아픔과 허무에 가슴 비빌 데 없던, 살아남은 젊은 문학예술 청년들이 모여 앉아 예술적인 모색을 활발히 추구하던 곳이었다. 즉, 제대로 클럽 같은 것을 갖지 못한 문인들은 대개 손쉬운 단골다방을 정해 놓고, 한담도 나누고 연락처로 활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에는 「날개」의 작가 이상이 주인이었던 <제비>, <학>, <무기>, <69>가 그런 역할을 하였고, 부산 피난 시절에는 약속이나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모여들던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노릇을 했던 <밀다원>, <금강>이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엔 <플라워>라는 다방에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며 출판기념회를 갖고 문임 모임도 자주 열었다. 휴전협정으로 포성이 그친 서울거리는 거의 폐허로 가득했지만 다방은 건재했다. 이 중 남대문로 2가 문예빌딩에 위치해 있던 <문예 싸롱>은 문예잡지인 [문예]를 함께 발간하기도 했다.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동에 <갈채다방>이 들어선다. 문학을 하는 사람 치고 갈채다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60년대만 해도 이 찻집은 문단의 명물이었다. 갈채다방이 다른 다방과 판이하게 달랐던 풍경은, 카운터 탁자에 언제나 증정본 잡지와 원고 청탁서 그리고 출판기념회 초청장 등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 경제적으로 궁색했던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지적인 풍족감을 만끽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한편, 다방은 커피 값 한잔의 수강료로 대학만큼이나 많은 것을 배우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세사람이 모이면 그 안에 스승 한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고,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학생”이란 말도 있는 걸 보면, 커피집 이야말로 썩 좋은 교실역할을 했다. 거기에서 모인 이들은 커피를 배우고, 사랑과 우정, 문학과 철학, 자유와 지성, 정의와 용기를 배웠다.
Tip 커피를 마시며
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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