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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 불능의 책
류수안 지음 / 문학아카데미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나선 한 구역. by 라라라.
땅, 섬, 바다, 사막, 산, 모래, 이스터 섬과 피라미드와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고대 유적지와 집, 신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무녀들, 파랑과 황금과 빨강, 시간과 밤과 낮, 어둠과 빛, 사자와 표범과 소와 호랑이와 고양이와 늑대, 소리와 말과 침묵과 음악, 달과 태양, 공간과 건축, 죽음, 배, 장미, 돌과 보석, 사람, 지향…………………………. 이런 키워드들이 나선형을 이루면서 어떤 곳을 향해 가고 또 먼 곳으로부터 되돌아온다. 무언가를 실어 나른다.
<판독불능의 책> 표지에 있는, ‘환상으로 봉인된 108편의 엽편소설’이라는 문구는 이 책의 장르를 규정해주는데, 나는 신화와 형이상학, 상상력이 교통한 류수안 시인의 아니무스가 들려주는 사상을 접한다. 겉으로 보기엔 재미없고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5분을 읽어도 마치 50분을 읽는 것처럼, 시간이 정지하고 영원에 머문다. 그리고 어떤 따뜻한, 존재를 스미는 심원한 재미. 인식의 단맛이 난다. 나는 한 편씩 읽을 적마다 자주 괘종시계를 쳐다보곤 하였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고작 몇 분만이 지났을 뿐인 신비. 이 사람, 시간을 이렇게 부리다니, 능력이 대단한데? 나는 자주 겉날개 안쪽을 펼쳐 류수안 시인의 사진 속 얼굴에 눈길을 두고 그녀를 망연히 들여다보곤 했다. 수원에 살면서 날마다 시립도서관에 방문해 책을 읽는다지? 이런 저런 저서들을 독파하고, 눈을 내리깔아 허공에 명상하듯 머물고 걸으며, 비록처럼 우주를 담아 한 땀 한 땀 기록했겠지? 108 번뇌를 탈하듯 108편의 경을. 이 책의 장르를 두고 저자는 ‘미니픽션’이라고 칭했으나, 시, 희곡의 형태를 갖춘 글들도 함께 실려 있다. 목소리는 장르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낳고 그것을 휘돌아 거쳐 간다.
목소리에 몰입하다가 나는 두어 번 놀란 적이 있다. 어느 순간, 문자 너머에서, 공기가 기하학적으로 구겨지고, 어떤 이미지에서는 똑똑 물방울이 육체에 떨어지는 선득함을 체험한 것이다. 잎사귀처럼 돋아 공간을 점유하는 무음의 음. 에테르에서 벌어지는 일일까? 그것을 혼의 종이접기와 실험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아주 오랜만에 문 열리는 대면과 소통. 나는 문자가 들려주는 내용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그 문자를 타고 오는 파동을 통해 문자가 저 스스로 지워지면서 혼과 닿을 때 나직하게 행복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혼연이다.
……그녀에게서는 현실에 다가가는 데 어떤 머뭇거림과 주저함이 감지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어떤 불안한, 연속적인 불연속성과 거리. 하지만 그녀에게 여성은 감청색과 파란 색 치마를 입고 지상에 온 범속하면서 신성한 절대이기도 하다. 낮에, 사체로, 만천하에 충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해도, 인류가 늘 기억하고 매혹되는 원시적인 창조주의 현현으로서. 또 살아서는, 성적인 대상물인 냥 남성들의 시선과 그 시선으로부터 무시된 그러나 주목 받고 싶은 여성들의 질시를 받더라도, 적나라하게 알몸으로 자유의 화신으로서 유유하게 만찬의 중심에 앉는다. 숲, 대낮에! 아마도, 이 모든 광경은 만다라일 것이다.
그녀의 발화는 뚝뚝 걷다 멈추는 절름발이 같다. 어쩌면 판독불능인 그것을 말과 침묵으로 이중창 하느라 그저 지나가는 리듬과 단속하고, 혹은 시에서 시적인 산문의 세계로 이주하느라 과도기적으로 어설퍼서인지도. 그러나 돌이자 뼈인 보석들이 반쯤 지상에 돌출하는 것을 목격할 적마다, 우뚝 멈춰 서, 그 빛을 빤히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죽을 때마다 무한의 뼈마디 한 척씩 생을 띠며 융기하는 거. 결국, 서로 못 알아듣고 어긋나는 시간 안에서, 진흙 속에서, 이웃과 땅과 친화하며, 온몸으로 뒹굴면서, 의사소통하는 법을 탐구한다.
이 책에서 불만족스러운 점은, 책 만드는 사람들의 노고와 현실, 진정성을 존중하면서도, 편집과 디자인, 삽화가 단조롭고, 교정이 더 온전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뛰어난 작품이 그 본연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시각적인 장치가 뒷받침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글 내부만으로 한정하면, 과연 그 어떤 형상이 이 심연, 이 우주에 어울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