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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김지영
김지영 씨의 삶이 내가 경험한 것과 너무 비슷해서 마음이 아렸다.
특히 결혼 년도, 임신 년도, 출산과 육아를 위해 퇴직을 한 년도...
너무 비슷해서 많은 부분에서 내 얘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지영 씨의 삶보다 내 삶이 조금 더 고달팠 던 것 같다.
공무원 아버지, 딸들을 지지해주는 생각이 트인 엄마..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대학 학비 걱정없이 대학을 나온 김지영 씨.
그런 지영 씨도 아기를 낳아 육아를 하며 자신의 진로를 다시 고민해야 했고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을 보며 나도 지영 씨처럼 내 딸이 살 사회에는 아이를 낳아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지영씨와 같은 고민을 했었고, 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어려움이 있고...
또 주위의 많은 아이 엄마들이 또 다른 김지영 일 것 같다.
소설이지만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설같지 않은 82년생 김지영.
밑줄긋기.ㅡ
49.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였다.
여기 서울 좀 봐. 그냥 점이야, 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점 안에서 복작복작하면서 살고 있다는 거다. 다 가 보진 못하더라도 알고는 살라고. 세상이 이렇게나 넓다.
97.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나면 잘나서 안되고, 그 가운데면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 싸움이 의미없다고 생각한 선배는 항의를 멈추었고, 연말에 치러진 공체에 합격했다.
우와 멋지다. 그래서 지금 회사 잘 다닌대?
아니 6개월인가 다니다 그만뒀대.
어느 날 문득 사무실을 둘러보았는데 부장급 이상으로는 여자가 거의 없더란다.
이 회사는 육아휴직이 몇 년이냐고 물었더니 같은 데이블에서 밥을 먹던 과장부터 사원까지 다섯 명 모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단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고, 고민 끝에 사직서를 냈고,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선배는 여자를 자꾸 안 되게 만드니까 이러는 거라고 대답했다.
104. 윤혜진 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김지영 씨에게도 함께 공부하자고 했는데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자신 있는 유형의 시험이 아니고, 이제 와 또 시간을 투자해 공부했는데 만약 시험에 계속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나이는 먹고, 경력은 없고, 그때는 정말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108. 깜깜해진 하늘 위로 공평한 선물처럼 드문드문 일정하게 눈이 내렸고, 바람이 한 번씩 두서없이 불면 눈송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성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119. 김지영 씨의 일상도 전쟁이었고 긴장을 놓으면 당장 피투성이가 될 순간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서운함은 냉장고 위나 욕실 선반 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계속 무심히 내버려두게 되는 먼지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쌓여 갔다.
...이미 바짝 말라 버석이는 묵은 감정의 먼지들 위로 작은 불씨가 떨어졌다. 가장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그렇게 허망하게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123.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145.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김지영 씨가 회사를 그만둔 2014년, 대한민국 기혼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결혼, 임신, 출산, 어린 자녀의 육아와 교육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147. 아기가 너무 예뻐서 김지영 씨는 진통할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하지만 예쁜 아기는 안아주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울기만 했고, 김지영 씨는 아기를 안은 채 집안일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자야 했다. 아기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이면서, 그래서 두 시간이상 잠을 자지 못하면서,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집을 청소하고, 아기의 옷과 수건들을 빨고, 젖이 잘 나오도록 자신의 밥도 열심히 챙겨 먹으며 김지영 씨는 태어나 가장 많이 울었다. 무엇보다 몸이 아팠다.
손목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김지영 씨는 집 앞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할아버지 의사는 염증이 있기는 한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며 손목쓰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말하자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을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 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