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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느낌 - 유전학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김재희 옮김 / 양문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당신은 풀밭을 거닐때 한 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면, 누구든 모든 생명체에게 오직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존엄함과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단, 이 책을 마지막 장('생명의 느낌')까지 다 읽었을 때 한해서 말이다. 중간 중간에 매클린톡의 생명에 대한 그녀만의 생각이 언급되어있긴 하지만, 전기문에 불과할 따름이고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야 드디어 이 책은 전기문 이상의 가치와 모든 사람들이 읽어 마땅할 책으로 급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 과학자가 당시대에서 겪어야 했던 고충과 아무리 증거가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고정관념과 아집이라는 큰 담을 쌓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온전치 못한 자세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초반부에서 주로 다루었던, 여성 과학자로서의 고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내가(나도 여자이니까) 별 다른 이유 없이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다면 이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어떻게 떠들든지 해서 마구 휘둘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굳이 매클린톡을 '여성 생물학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여성, 남성을 가리기 전에 내가 그동안 듣고 보아왔던 여느 성공한 과학자들 보다(거의 대부분 남자들이었지만...)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굳이 앞에 '여성'이라는 글자가 붙을 까닭이 없다. 왜 여성이 어쨌다는 건가.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이 이런 과업을 이루었다는 게 쉽지 않으므로, 아니면 남성들은 이런 일 한 경우가 많지만 여성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귀감이 될만한 일이기에'라는 뜻으로 여성생물학자라고 쓰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물론 저자도 여자지만).
게다가 나는 매클린톡을 '훌륭했다기 보다는 정상 궤도에 올라선 진정한 학자답다'라고 말하고 싶다. 오직 지금까지 밝혀진 이론에 따라서, 자신이 직접 그 예외적인 실재하는 현상을 보고서도 자기 눈을 의심해 버리는 꼴이 잘못된 것이지, 매클린톡처럼 차분히 그 생명체가 자신의 비밀을 일러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그 현상을 이해하는 건 훌륭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드디어 정상적이게 사물을 본 일 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아는 것 만큼 본다'라고 했다. 이 말은, 이성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듯이 많이 안다고 다가 아니라 많이 알되, 매클린톡 처럼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안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아느냐에 따라 이 대단한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아예 잘못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풀 밭을 거닐 땐,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나는 한때 예민했을 땐 풀 밭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걸어도 어떤 작은 생명체가 내 고무 발바닥에 깔려죽지나 않을 까봐, 발바닥이 후끈거거렸더랬다. 아마, 티벳의 승려들이 길을 걸을 때, 비질을 하며 걷던(내가 걷는 동안 내 발 밑의 작은 생명체 조차도 존귀하므로 함부로 살생을 금하히라는 불가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장면을 본 후에 그렇게 됐던 것 같다.
'자리바꿈 현상', 이 얼마나 역동적인 생명의 '표상'이 아닌가. 지금도 일부 분자생물학계에서 오해하는 DNA라는 분자 자체가 유전 현상의 다 인양 착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 거의 확정시 됐던, 다윈적 진화론에 얽매인 사람들 사이에서 매클린톡은 몇 십년 동안 그야말로 온 몸을 바쳐 그들의 오점을 인식시켜 주고야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자적 환원주의로는 생명체를 절대 다,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잠깐 덧 붙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생명'이란 이런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무엇인지이다. 분자론적으로 보면,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분자론적 시각이 절대론적 시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읽고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