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무척 재미있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한때,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왜 안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를 통해 우리의 냉정한 현실을, 루츠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통해 세계의 냉정함을 알게 되었어요. 

왜 이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통해 찾았습니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지리적 운.명.이 근본적인 원인이더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았던 과거 전통방식 사회에 답이 있다구요. 

절망스러웠습니다. 

과거 전통방식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않는 한, 부족.군락을 이루게 되고, 이렇게 집단이 되면 조직과 서열이 나타납니다.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권력과 서열은 인간적이 되며,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권력은 비.인.간.적이 됩니다. (현대의 가장 큰 인간집단은 국가가 되겠네요.) 

농경사회로의 정착과 농경개선은 인구 증가를 불러왔고 차차 경제력등 사회.물적자본 확충으로 이어졌습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 간 사회.경제적 차이는 점점 극대화됐습니다. 

왜 이럴까요. 

이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종의 생존을 위해 필요할 수 있지만, 지나치기 쉬워집니다. 

못 가진 자, 가진 자..... 모두 쉽게 탐욕스러워 집니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으며 절망한 것은, 존 러스킨 뿐 아니라 옳고 옳은 말을 한 옛 성현 가르침에도 불구, 현실은 왜 이렇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게는 우리나라의 늘어나는 빈부격차로부터,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원전쟁을 벌이는 미국, 

추격자 중국.인도, 그리고 무수히 많은 빈국과 빈민, 난민들.... 

 

이는 모두 각자 살아야 하는 생존법칙에 따른 것이란 생각입니다. 

우리가 미국같은 강대국이 되면, 우리도 미국처럼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존법칙을 여유있게 만들려면 지금 지구의 인구는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과거의 비참했던 대중보다 분명 나아졌다고들 합니다. 

인정하는 부분,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기대하는 시간과 실제 개선되는 시간의 속도가 엄청 다르기 때문에요.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고도 싶습니다. 

노력해서 삶이 개선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비.중.에 변화가 있었나 싶은 거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구 차원에서요. 

이렇게 된 데에는 중산층이 급격히 무너진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지배자, 권력자가 있어도 서로 상생하며 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한정된 밀림에서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소수 부족 인생이 멋진 삶일 수도 있을텐데..... 

현실의 대다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과거와 현재 대비 착취 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궁금해지는데요, 여기서 제 호기심이 멈췄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대안으로 '정치'가 종종 언급되곤 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각자의 가치관 문제인데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으로 쉬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근에 찾은 또 다른 대안은 북유럽입니다. 

 

 

 

북유럽은 1800년대 후반 ~ 1900년대 초, 국민대합의로 복지국가가 됐다는군요. 

 

그리고 2007년 세계금융위기에도 끄덕없는 다양한 북유럽의 사례를 <세계금융위기 이후>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은 정치도 어렵고 북유럽의 대합의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책도 등장하나 봅니다. 

 

 

 

 

 

 

사실, 오랜 인류 역사 동안 몇 차례 제노사이드(인종, 이념 대립 등의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가 있어 왔습니다. 그 외 불가항력적인 기상이변, 전염병 등에 의해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급기야 또 다른 <제노사이드>를 꿈꿔야 하는 지경까지 온 것일까요? 

※ 소설 <제노사이드> : 인류보다 진화한 종에 의해 현행 인류가 제노사이드 당할 가능성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이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억압. 핍박받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현실 개선을 위한 필요성도 못 느끼고 늘 그래왔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의 변화가 생긴다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박노규는, 그의 아들은 승리한 것이 됩니다. 

언제고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며.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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