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의 기적
키아라 감베랄레 지음, 김효정 옮김 / 문학테라피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다. 서로 아주 다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지루해서 책을 읽고, 호기심 때문에 책을 읽고,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책을 읽고, 일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지식을 알고 싶거나 망각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머릿속을 파고드는 괴로운 생각을 완화하거나 털어 버리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 본문 p.156-

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문득 거울 속에 짙은 다크써클을 드리운 낯선 사람이 서 있을 때, 왕복 12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며, 출퇴근 만원 지하철 안에서, 저녁의 번화가 불빛 아래를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칠 때 우리는 책을 읽게 된다. 나를 알 수 없을 때, 너와 다른 유일무이한 나의 존재가 의심스러워 질 때, 나조차도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 때, 어떻게든 '나'라고 생각되던 것의 파편을 그러모아 재구성해야 할 때 책을 읽는다. 꼭 책의 주인공처럼, 인생에 호되게 꼬라박혀 혼미한 정신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어려울 때, 아침에 눈이 떠지면 눈 뜬 것이 후회될 때, 이 책을 읽었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 대도시 로마로 이주하자 마자 남편과의 이별과 갑작스런 실직이 36살의 주인공에게 찾아 온다. 남편은 출장지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전화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오래 기고하던 잡지사의 칼럼란은 TV쇼에 출연하는 유명인에게 뺏긴다. 불안, 두려움, 무기력과 슬픔, 분노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낯선 집안을 채운다. 

주인공은 상담을 받지만 별 차도가 없다. 그러다 의사의 새로운 처방을 받는다. 한 달 동안 매일 단 10분 간만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일을 해보라고. 


35년 동안 살아온 고향 마을을 떠나, 18살 이후로 줄곧 함께했던 남편과도 떨어진 채, 처음 경험하는 갑작스런 실직까지 이 모든 것이 이미 처음 겪어 보는, 예상한 적도 기대한 적도 없으며 대처 불가능한 변화인데.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에게 의사는 예상 밖의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첫 날,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미용실에 가 매니큐어를 바른다.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화려한 자홍색 매니큐어를. 신체의 일부를 낯설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무심해 지는 순간'의 기분이 나쁘지 않아 그녀는 이 게임을 계속해 보기로 결심한다. 


게임은 일상의 소소한 발견으로 채워진다. 누텔라를 바른 팬케이크 만들기, 길거리에서 뒤로 걷기, 힙합 춤추기, 씨앗 심기, 한 번도 궁금해 한 적 없던 엄마의 인생에 대해 질문하기......


게임이 계속되어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생기지 않는다. 남편은 돌아오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그녀와의 관계를 바라고, 새로 쓰기 시작한 소설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도 그대로이다. 친구들의 걱정과 관심이 아니라면 먹고 마시는 일조차 귀찮을 만큼의 끈적한 무기력과 피로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달이나 살아온 이 거리에 중국인 가게가 있고, 수예점과 꽃집이 있고, 생선 가게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중국인 가게 주인은 무뚝뚝하고 말이 서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수예점 할머니는 어릴 적 친할머니를 꼭 닮았으며, 꽃집에서는 고추씨와 상추씨를 팔며, 생선 가게에서는 모두가 크리스마스 만찬준비를 위해 모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뒤로 걸어도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세상에는 마법에 걸린 것 같은 팔다리로 멋지게 힙합을 추는 소녀가 있으며, 걸핏하면 쏟고 깨는 서투른 손으로도 맛있는 티라미수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그리고 변화에 몸을 맡기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가 현재를 얼마나 확고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지, 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바늘끝같은 확률로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배운다. 그럼에도 인생이 어떻게든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은 그 아슬아슬한 확률을 지속되도록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는 까닭임을 배운다.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안녕을 바라며, 만나러 와 준다는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그녀가 배우고, 내가 배운다. 

 

이 책은 지금 떠나고 있는 사람에게, 넘어진 사람에게, 쓰러져 울고 싶지만 자존심이 허락치 않거나, 전력으로 도망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 오늘이 두려운 사람에게, 인생의 맨 얼굴을 마주하고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에게,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신조차 낯설어질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들었으나 비인간적으로 과대망상에 빠진 것 같은(본문 p.224)' 지금 우리의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무 겁낼 필요 없다고, 10분 게임을 하듯이 매일을 채워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을 '인생'이라 부르는 순간 추상적이며 모호한 어떤 것으로 변해버리지만, 실은 이케아 매장에서 '팬케이크 만들 때 쓸 고무 냄비 손잡이(본문 p.225)'를 고르는 것만큼 단순하고 확실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 듯 모를 듯 그런 듯한 감이 들기 때문이다. 

알 듯 모를 듯 괜찮을 듯한.   


**참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오탈자가 제법 눈에 띄고,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있으므로 책 내용과 상관없이 별 4개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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