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숨이 턱에 찰 만큼, 오지도 않은 내일을 산다. 시작하지도 않은 일에 지치고, 만성적인 불안에 피로하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 인생인가 싶던 차에 요코 여사의 책을 봤다. 출판사나 독자들의 리뷰가 좋았던 것보다도, 오로지 제목 때문이었다. 작가가 40대 중반에 썼다는 에세이집은, 요즘 세상에 참으로 고마운 당당함으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한동안 골랐던 책들이 무겁고 진지한 것들이었기에, 비록 훌륭한 마음의 양식이 되어주었으나 끝까지 소화하지 못하고 중간에 접어두고 말아 책상은 엉망이던 참이어서, 이번엔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리란 기대로 책을 주문했더랬다. 

경쾌한 연푸른 바탕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힌 제목을 보는 순간, 더 이상은 무리라고 헐떡이며 널부러진 몸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숨 좀 돌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정작 저자 자신은 참으로 열심히, 억척같이 살았다.


연꽃밭에 연꽃이 피어 있었다.

함께 있던 아름다운 저명한 동화 작가가 "어머!" 하고 소녀같이 소리 질렀다.

우리는 연꽃밭에 쭈그리고 앉았다.

연꽃밭을 자세히 보니 '미나리'가 있다. 

'미나리'는 연꽃 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나는 "앗, 미나리다"하고 땅바닥에서 '미나리'를 떼어 냈다. 오늘 운이 좋구나, 이걸 따서 가져가면 어머니가 칭찬해 줄 거야. 먹을 수 있는 것을 가득 가득 가져가는 것은 인간의 임무, 당당한 국민이 된 것처럼 우쭐한 기분이었다. '미나리'를 따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칭찬 들은 것은 옛날 옛날의 일이다. 지금은 '미나리'를 따서 가져가도 칭찬해 줄 사람은 없다. 칭찬해 줄 사람이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땅바닥에 나 있으면, 그냥 있게 되지가 않는다. 

내가 양손 가득 '미나리'를 쥐고 일어섰을 때, 저명하고 아름다운 동화 작가는 연꽃 다발을 들고 연꽃밭 속에서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 있었다. 나는 양손에 '미나리'를 쥐고 귀환자의 자식 같이 서 있었다.

-"연꽃 밭에서" 중-


들판 가운데 양손 가득 미나리를 거머쥔 귀환자의 자식이 떠올라 머리가 징하니 울린다. 출판사의 책소개는 분명 "거침없는 솔직함으로 심각한 것도 가볍게 만드는 시크한 그녀가 왔다!" 라고 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연애 소설로 읽고, 영화를 보면 반드시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를 상상하는, 철부지 아줌마의 일상 이야기다. 그래서 잠시 방심하고 흥미진진하게 달리다 보면 반드시 쿵, 무방비한 심장을 멎게 만드는 문장들을 만난다. 


그러나 감기조차도 걸리지 않는 나는 오래도록 계속 사는 거다. 계속 살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잘 가오 신데렐라" 중-   

"산다는 건 뭘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한다는 거야. 별 대단한 거 안 해도 돼."

-"인격자와 우울증" 중-

(전략) 모든 것을 물러나게 하면, 나는 언제든 세계의 중심에 있는 거다. 

50억명 인류 하나 하나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눈알은 그런 식으로 달려 있다. 애리조나의 황야 속을 달리면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정말 온 몸으로 알게 된다. 그 넓은 곳에 오직 나 뿐이다. 넓다는 것은 자기중심에 홀연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야에 서면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중-


패전 후의 궁핍한 일본, 가난한 부모와 많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그닥 똑똑하거나 예쁘지도 않은 채 책 읽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딸아이로 어린 시절을 지내 온 작가는 일생동안 부유함과는 인연이 없었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홀몸으로 아들까지 키우면서 평생 연꽃 아래 엎드린 미나리처럼 씩씩하게 살아 왔다. 그 녹록치 않았을 삶의 여정에서 포기하지 않은 사람만이 얻을 수 있었던 통찰이, 마찬가지로 녹록치 않은 지금 우리들의 삶을 따스하게, 뭉클하게, 담담한 희망으로 맞이해 준다. 오렌지톤의 달콤 말랑한 희망이 아니라. 궁핍과 졸렬함, 인간의 한계, 비정상, 두려움과 실패, 수치심과 후회를 인생의 본모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데서 오는 체념의 희망이다.  


책을 사면서 내심 느슨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도 된단다' 종류의 감상을 기대했다. 하지만 '평범하게 치열했던' 그녀의 삶을 마주하면서 내 삶의 불안, 피로, 두려움이 무찔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덤까지 안고 가야하는 '살아있음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체념을 확인했다. 여전히 피곤하다.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고, 특별한 방법도 찾지 못했다. 다만, '왜 이럴까" 라는 질문이 '아, 그렇구나' 라고 바뀌었을 뿐.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내일을 맞이하는 마음이 달라졌으므로 조금은 가쁜 숨을 가다듬을 수 있지 않을까. 느슨한 일상의 평화로움이나 경쾌한 청량감에 대한 기대가 배신 당했으나, 이 책에, 그녀의 삶에, 별 다섯 개를 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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