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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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새벽 1시.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집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쳤다. 


1930년 4월 13일

나는 항상 타인들과의 공감대 형성이 극심하게 부족한데, 그것은 대다수의 타인들이 느낌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나는 생각으로 느낀다는 차이에 기인한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느낌은 산다는 것이고, 생각은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이 삶이고, 느낌은 생각을 위한 영양분과도 같다. 

그나마 내가 가진 극히 부족한 감동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놀랍게도 대개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지, 나와 유사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은 절대 아니다. 

(하략)


우연의 일치일 뿐인데도, 마치 보란 듯이 펼쳐진 글이 자신의 일기장 한 페이지인 것만 같아서 손가락이 멈춘다. 사변적 삶의 고독에 대한 긍정, 긴 호흡에도 흐트러짐없는 맥락,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는 낱말들, 행간을 흐르는 누렇게 빛바랜 피로와 권태의 향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공허와 나약함의 에너지. 그리고 번역가 배수아. 외딴 끈기, 용맹한 고독에 통달한 그녀라는 필터를 통했기에 이런 문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누군가 나와 다르면 다를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보인다." 라는 문장을 읽는다. 좁은 다락방 뿌연 창문 앞 책상에 등을 구부리고 방금 막 "그가 나의 주관성에 그만큼 덜 의존하기 때문이다."를 끝낸 소아레스(페소아의 페르소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스스로의 삶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만큼, 나와 다를 수록 현실성을 획득한다. 넌덜머리 날만큼 가짜인 주관성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만큼이나 가짜인 것이겠지. 그가 '범속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며 또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을 대상으로 세심한 관찰을 계속하는 것'은 '그들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서 이다. '회화 속에서 환상적으로 묘사된 풍경'처럼 아름답지만 내 마음의 지형으로부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곳, 절대로 닿을 수 없기에 증오하고 그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을 줄곧 관찰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실체를 결코 느끼고 싶지 않기에 그들을 즐겨 관찰한다. 회화 속에서 환상적으로 묘사된 풍경이 편안한 침대인 경우란, 거의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건 아마도 절반의 진실일 것이다. 그 실체에 가 닿고 싶고, 느끼고 싶고, 이루고 싶으나 어쩌면 그런 욕망조차 자각할 수 없을 만큼 그럴 수 없으리란 확신. 그 아래서 찬란하게 현실적으로 보이는 반대편의 풍경 역시 직접 겪는 입장에서는 편안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것일까.


페소아 자신은 이 책을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 기록한다.

상호 어떤 연관성도 없고 연관성을 구축하고 싶다는 소망조차 배제된 인상만을 이용하여, 나는 사실 없는 내 자서전, 삶 없는 내 인생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내 고백이다. 

내가 고백 속에서 아무 것도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건 털어놓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 텍스트 12 


발문에서 김소연 시인은 이 책을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이 책은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가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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