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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R 21
김언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평점 :
달걀 속에서 /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 엄청나게 큰 고기만두를 먹는다 / 운동장만 한 접시 위 / 잘린 닭발들이 트랙을 돌고 있다 / 도저히 돌아누울 수 없는 1인용 석쇠 / 한쪽 뺨이 다 타버린다 / 진물 흐르는 문둥이가 된다 / (중략) / 정화조로 가는 길은 / 변기 구멍밖에 / 없을까…… 변기 속에서 나는 / 젖은 티슈처럼 풀어진다 비명도 / 고통도 없다 나는 / 포기한다 고로 / 나는 / 존재한다 // 할는지도 / 모른다
- <달걀 속에서 주르륵> 부분 -
많은 사람들이 김언희 시인을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읽는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 이미지가 다루어지는 전복적인 방식 때문일 것이다. 좁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꽉 막힌 출퇴근 도로 위에서 핸들을 으스러지게 쥐고 있을 때, 종일 단내나게 뛰어 다녔어도 어김없이 야근이 기다릴 때, 단물 빠진 껌처럼 되어 퇴근을 해도 쉴 수 없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거나 적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관행이라는 이유로 권리를 박탈 당할 때, 태어난 것 말고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기회조차 얻지 못할 때, 약자라서 맞을 때, 웃음도 안 나올 때, 그런 때에, 이 모든 짓이 내일도 똑같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은 때에, 도망칠 수 없을 때에, 그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을 말로 표현해 주는 시가 이 시인의 시라고 생각한다.
앉아 있는 기계가 되고 / 똥 만드는 기계가 되고 믿기 어려운 / 믿을 수 없는 기계가 되고 / 망상에 끄달리는 기계가 되고 미쳐버리고 싶은 / 미쳐지지 않는 기계가 되고 헛소리 헛소리 / 헛소리로 조작되는 기계가 되고
- <990412> 부분 -
비가 내리고 / 정신없이 / 칼을 / 찾고 있지 비가 / 내리고 투명한 벌레들이 / 실실이 내리고 손아귀에 칼이 / 돋아 있지 유리창에 / 벌레들이 / 주르르 / 미끄러져 내리고 정신없이 / 정신없이 칼 / 버릴 데를 / 찾고 있지
- <FA> 부분 -
세상이 내게 침을 뱉는데 싸워봤자 이길 리가 만무하다 싶은 날이 있다. 바보짓을 강요당하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되는 날. 다 포기하고 싶은 날. 왜 태어났나 싶은 날.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혼자 그러안고 불면하는 날이 있다. 나 자신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이대로 두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 싶은 날이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있다. 정확하게 그런 감정을 이해하고, 나를 대신해 세상에 빅엿을 날려주는 시가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간이 흘러도 인간 세상의 '개같음'은 변하지 않는다. 무려 26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복간되는 시집의 힘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 개는 나를 / 제 개라고 / 소개한다 길에서 만난 개에게 // 한 손에 꽃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 한 번 웃고 한 번 우는 / 오늘의 운세"
- <피치카토> 부분 -
"거울의 / 집요한 농담 / 거울의 꽉 잠긴 웃음소리 / 면도날을 갈아 끼우며 아침마다 그것이 / 그것의 낯가죽을 벗긴다 / 낯가죽 아래 / 낯가죽은 / 자꾸 / 생긴다"
- <그것을 누르면> 부분 -
시를 어떻게 읽느냐는 각자의 몫인 바, 내게 이 시들은 어떤 이즘(-ism)으로도 해석 불가능하며, 해석 자체가 무용한 듯하다. 그저 읽고, 느끼고, 어느 싯구에선가 걸려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다음, 정신이 번쩍 든 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게 전부다. "길러서는 안 되는 짐승을 기르면서, 으적으적 // 대가리부터 씹히면서, 환희의 / 피눈물을 흘리면서,"(<밀롱가 2> 中) 웃고 있는 사람처럼, 말해져선 안 되는 주문을 들어버린 사람처럼,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신경을 기타 줄처럼 튕기는 데 맛들인 것처럼, 이 미끌거리고 난자하고 흥건한 칼춤의 현장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집의 해제를 맡은 평론가가 결국 해설에 실패하고 말았음을 고백하는 말로 글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소리를 전부 빨아 먹는다
이 책이 비명을 전부 빨아 먹는다
이 책이 피를 전부 빨아 먹는다 - P43
아침마다 그것은 냄새나는 구두 속에서 태어난다 아침마다 그것은 뱃속을 구긴 신문지로 채운다 아침마다 그것은 그것이 어제 죽인 것을 복도에서 만난다 아침마다 그것들은 서로의 면상에 침을 뱉어 아침 인사를 나눈다 - P58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어떤 여자를 속여 갈가리 찢은 다음 그 여자의 껍질을 둘렀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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