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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지음 / 포럼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늘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지금까지 읽지 못한 책이 있다. 바로 공자의 논어다.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탓인지 아직까지 책을 사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이런 와중에 논어를 뛰어넘는 논어 바로 알리기 취지의 <논어는 진보다>라는 책을 먼저 만났다.
그동안 논어를 읽지 못했던 이유가 여럿 있었지만 그 중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마음이 컸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을 읽은 지금은 어떨까? 많이 달라졌다. 읽어봄직도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지적되어진 잘못된 해석들을 곱씹으면서 읽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논어 바로 알리기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아니 필사적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그동안 잘못 해석되어지고 오역되어진 논어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근거자료를 제시해 가며 바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저자의 고민과 흔적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 그리고 그 노력들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준비한 자료들. 이러한 것들에서 반드시 밝히고 말겠다는 저자의 뚝심이 보였다. 일단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앞으로 읽어야 할 논어를 비틀어 읽을 수 있게 분위기를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시종일관 강한 어조로 논어의 바른 해석을 위해 열을 올렸을까? 그것도 450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족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공자의 철학적 사상과 배치背馳되는 논어의 해석과 4대 성인聖人에 들어가는 공자가 처세가로 팔려다니는 현실 상황에서 공자가 잘못 알려지고 상당히 왜곡되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이 책 표지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해를 돕고 많은 도움을 주었던 책이 있다. 바로 풍몽룡의 <열국지>(전12권)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특히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의 정치 상황과 주변 상황을 다루고 있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많은 부담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공자의 사상인 '인仁'을 놓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공자의 인 사상을 알아야, 논어가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고, 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논어가 잘못 해석되어진 여러 가지 이유들을 지적해간다. 한자의 다의성 문제와 공자의 말투, 유교가들의 정치적 목적 등등이라는 것이다. 특히 스님의 선문답처럼 머리 자르고 꼬리 자르고 몸통만 툭 내뱉는 공자의 말투 때문에 논어가 공자의 사상과 반대되는 해석이 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직역하게 된 것이고,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후대의 철학자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자는 왜 선문답 식의 말투를 고집했을까? 그것은 공자의 사상적 핵심이 인仁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제자들에게 굳이 인을 자주 언급하며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의 단편들을 읽을 때 더욱 주의를 기울여 직역이 아닌 한자가 갖는 속뜻을 이해해야 하고 그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을 주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중심 사상에서 파생되는 덕치, 예, 의, 지 등도 대입시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논어의 해석에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공자의 제자들의 개별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공자의 제자 교육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비롯되었다고 한다. 바로 제자들과의 개별적 특성을 무시한 채 논어의 단편들을 읽으면 공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단편 하나하나를 바르게 해석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부분에 수긍이 간다. 그러다 문득 해석된 고서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관련 분야의 학자가 아닌 이상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공자였지만 정작 그 속으로 들어가 보니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자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맞겠다. 공자가 죽기까지 백성을 생각했고, 그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지배계층에게 끊임없이 인과 덕을 요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곧은 것을 굽은 것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나 굽은 것을 들어 곧은 것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백성들 편에 서서 지배 권력에 옳은 정치를 요구한 고대의 유일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공자의 사상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쉽지 않았던 시대에 공자가 끊임없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한결같았던 것은, 영웅호걸들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에 백성들의 삶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전쟁에 노출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은 폭정에도 시달려야 했던 것 역시 보았을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백성들이 가장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요,순시대와 문,무왕시대 그리고 탕왕시대를 찬하였다고 한다.
'천자라 하더라도 무도한 정치를 편다면 악하고, 대부라 하더라도 덕치를 편다면 선하다.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는 선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는 악하다.'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주문은 계속된다. 개인 안위의 차원에서 고민하지 말고 도덕의 차원에서 고민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고민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보면 유교적 권위에서 벗어난 현재가 오히려 공자의 진심에 가까운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그 시발점에 저자가 서 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에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느꼈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군자삼락에 대한 내용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에 따라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
저자는 '논어의 가장 첫 장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소위 군자삼락君子三으로 불리는 이 장 학이편이 상식화 되어 있는 것에 많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백과사전에도 올라 있는 이 문장을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는 것에 녹록치 않은 일'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단호히 말한다. '군자삼락'이 아니라 '군자일락'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학學'은 '배움'을 일컫지만 '습習'은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습習'의 진짜 듯은 '예'를 익힌다'는 것이다. 예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고 때에 따라 익히니'가 아니라 '인을 배우고, 때에 알맞은 예를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인을 배우고 때에 맞게 예를 실천하는 기쁨'을 공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지 격이 떨어지는 '공부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정의 즐거움'을 말한다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亦乎' 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저자는 우정의 기쁨은 군자뿐 아니라 소인, 심지어 무뢰한에게도 우정의 기쁨은 있다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정서라는 것이다. 군자에게만 해당하는 정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붕朋'은 친구가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동지同志'에 가까우며, 함께 인의 길을 가는 동지라는 것이다. 공자는 그 동지를 만나는 기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겸손의 즐거움'을 일컫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온'(넷상에 한자가 안 나오네요. 심방변(마음심)에 어질온이 결합된 한자입니다.)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을 배워서 때에 따라 예를 신천하는 것', '함께 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동지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잇는 사람이라면 군자라 할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기 때문에 '자신의 덕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할 뿐, 고독해하거나 섭섭해하지 말고 더욱 수양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란다.
즉 군자삼락이 아닌 군자일락은 아직 군자의 즐거움인 인의 즐거움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공자가 전하는 말이지, 세상을 향해 군자의 즐거움을 세 가지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자삼락은 잘못된 해석이며, 세 가지 즐거움이 아니라 한 가지 즐거움, 즉 인의 길을 가는 즐거움을 말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