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품 범우문고 114
곽말약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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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품

 이 책에는 여덟 명의 영웅이 등장한다.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시황제, 항우, 사마천, 가의. 하지만 곽말약은 너무도 친절하게 이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과 경의와 환상을 일순간 노리개감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들에게 갖고 있던 환상을 여지도 주지 않고 모조리 갈아 엎는 대단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여덟명은 나름 역사를 만들어 주었고, 현재의 기틀을 제공한 인물들이었기에 말초적인 인간성보다 해탈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었건만 곽말약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작가의 고유 권한이라고는 하지만 장난 치고는 심보가 고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소품>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왜 저자는 이미 성인이고, 또 성인에 가깝고 영웅인 이들을 한낮 노리개 정도로 여기는 글을 썼을까를 생각했다. 그의 약력을 그저 한쪽으로 흘겨 보면 이렇다.

 의학을 전공한 그는 문학에 심취해 그의 문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920년대 이데올로기의 최절정에 달했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도 중국에서 도망자의 생활을 해야 했고, 급기야는 일본으로의 망명길에 오르지만 망명간 일본에서 다시금 탈출을 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기구한 운명이다. 불행중 다행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그의 인생은 안정궤도에 들어선다.

 격변기의 중심에 서 있던 저자가 역사를 만든 이 여덟 명의 영웅을 놀림감으로 선택한 이유는 역사를 미화시키지 말고 현실 직시적 시선으로 인물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비록 곽말약 자신은 말년을 주류의 자리에서 마감을 했지만, 그가 산 인생의 과정은 그야말로 질곡의 세월로 숨막히는 숨바꼭질을 반복적으로 해야 했던 것을 떠올렸으리라. 그리고 의과 공부를 하고 사회 지도층에 놓였던 자신이, 쫓고 쫓기는 인생을 살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성인이자 영웅들이 신격화 되어 떠받드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을 것이고 그들이 위선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에세이라는 문학적 형식을 빌어 밝히고 싶었으리라.

 따라서 잘못 이해하고 전달되어지고 있는 그들의 인격이 실랄한 조롱 섞인 비웃음으로 전달되어지고 있다 하겠다. 그들도 속세 안에서는 유치하고 졸렬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쓸데없는 공경은 오히려 망상을 불러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기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 말이다.

 왜 역사소품일까로 시작한 책 읽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사상이든 이외 무수히 많은 것조차) 그저 한낮 소품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듯이 남이 내 인생의 테두리 안에서 주인공 행세를 할 수 없음을 곽말약은 말해 주고 싶은 듯하다. 제 아무리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내 인생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면 오히려 그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소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여덟 명의 성인은 곽말약의 펜대에서 어떤 푸대접을 받았을까. 내용을 읽기 전에는 목차에서 풍기는 것만으로도 성인이었고 영웅이었던 그들의 품위에 금이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목차를 이렇게 뽑은 것도 곽말약의 계략으로 이 여덟 명을 철저하게 벗겨 놓으려는 계산일지도 모르겠다.

 첫 주자로 등장하는 노자 이야기에 대한 제목을 보자. "노자, 함곡관으로 돌아오다"다. 참으로 거창해 보인다. 깨달음을 얻고 금의환향하여 돌아오는 노자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상시키게끔 뽑은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제목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어떨까? 정반대다.

 노자는 자신이 천하 제일의 참된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사막을 택했(19쪽)지만, 노자가 상상한 사막과 현실적인 사막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20쪽)는 것이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자는 함곡관을 떠나 사막으로 뛰어들어가면 그것으로 나의 고결함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으리라고 여겼고, 그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24쪽)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경의 설파, 즉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쓴 노자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기로부터 배신 당한 장자의 이야기를 다룬 '장자, 송나라를 떠나다'

제자가 먼저 죽을 먹어 마음 상한 공자를 다루는 '공자, 죽을 먹게 되다'

처만 보면 음기가 발동하는 맹자를 다룬 '맹자, 처를 내쫓다'

간질병 환자이자 환관들의 놀이개감으로 전락한 시황제를 다룬 '시황제의 임종'

넓고 크게 보지 못하는 오직 자신만이 영웅임을 나타내려고 했던 항우를 다룬 '항우의 자살'

사마천이 왜 거세를 당하게 되었는지를 다룬 '사마천의 분노'

환상적 삶을 추종한 인물로 그린 '가의가 장사에서 통곡하다'

 이 여덟 편의 글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인물들의 새로운 모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다소 놀랍기도 하기 엉뚱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역설하고 있고, 이 땅에서의 삶은 이데아나 이상세계로는 채워질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는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른 권력에 아첨하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곽말약은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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