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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제도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0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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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다와다 요코가 쓴 Hiruko 여행 3부작 <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를 읽기 전 나는 작가로서의 이력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기 전에 하는 나만의 작은 습관 같은 것인데, 작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나면 작품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의 놀이성과 혼종성에 기반해 독창적 신화를 펼쳐온 작가라는 소개에 이어 그녀가 지금까지 저술했던 작품 목록을 눈으로 읽어나갈 때 나는 잠깐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와다 요코 작가가 고 서경식 선생과 함께 썼던 <경계에서 춤추다> 책을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출판사마다 외국어를 적는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이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다와다 요코’가 ‘타와다 요오꼬’였고 그때문에 처음 ‘다와다 요코’라는 이름을 보고는 엇 처음 접하는 작가구나, 라고 생각했던 셈이다.



다와다 요코 작가가 2010년 고 서경식 선생과 함께 공저했던 <경계에서 춤추다>는 말 그대로 이쪽 혹은 저쪽의 명확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두 작가가 서로에게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고 서경식 선생은 잘 알려진 것처럼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인, 한국인, 그렇다고 그의 부모의 국적이었던 조선인(일제강점기 이전의 조선) 중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도 온전히 구속되지 않았고 때문에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일생에 걸쳐 고뇌하고 탐구했다. 다와다 요코 작가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나 1982년 독일로 건너가 지금까지 40년 넘게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두 작가는 태어나 익힌 모어(母語)에서 벗어나는 삶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모어(母語)는 주어진 것, 어렵지 않게 체화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만약에 나의 모어가 나의 정체성과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를 떠올려보자.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도 존재할 것이고, 영어로 읽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미국인이기 때문에 이민자 2세 자신의 정체성도 미국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 그의 부모의 국적, 부모의 정체성은 모두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그것이며,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 역시 모어는 어디까지나 부모의 언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미국인인데 나의 뿌리가 규정하는 나는 미국인이 아닌 것이다. 이른바 국어와 모어가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서 많은 이민자 2세가 혼란스러워하고 고뇌하며 결국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완전히 미국인 사회로 동화되거나, 혹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궁금해하며 미국인이 아닌 나의 정체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다와다 요코가 쓴 Hiruko 여행 3부작 <지구에 아로새겨진>, <별에 어른거리는>, <태양제도>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뿌리의 정체성과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정체성이 대립하는 군상을 그려낸다. 주인공 Hiruko는 섬나라로 묘사되는 자신의 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북유럽 언어를 조합해서 만든 판스카라는 인공언어를 사용한다. Hiruko의 친구 아카슈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그는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며 그에 맞게 옷을 입는다. 나누크는 아예 인종의 혼란을 선택한다. 그는 그린란드에 이누이트족으로 태어났으나 동양인을 닮은 외모 때문에 종종 섬나라 민족으로 오해를 받는데, 그런 오해를 애써 불식시키려하지 않고 섬나라 태생의 초밥을 잘 만드는 사람으로 위장한다. 어차피 북유럽 사람이 초밥에 대해 얼마나 알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언어, 성(性), 인종, 그리고 그외의 다양한 지점에서 Hiruko 여행 3부작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에게 원래 주어졌던 것을 무시하거나 애써 배제하려 들지 않는다. Hiruko는 자신이 만든 인공언어 판스카를 사용하지만 섬나라 출신인 Susanoo를 만났을 때는 고향의 언어로 세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카슈는 남성에서 여성이 되고 싶은 사람이지만 남성은 불행, 여성은 행복이라고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정체성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것이고 때로는 저것이며, 이것과 저것은 행복과 불행 중 하나의 측면에만 영원히 고정된 것도 아니다. 다와다 요코가 타와다 요오꼬였을 무렵 고 서경식 선생과 함께 그랬던 것처럼, Hiruko 여행 3부작에 등장 인물도 경계에서 계속해서 춤을 춘다.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경계를 넘나들며 춤을 추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유랑하며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나다운 나,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일생동안 반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 하나의 정체성에 다다랐을 때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나며 그 여정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선형적이거나 혹은 이쪽에서만 계속 맴돌며 나선형의 움직임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경계에서 춤을 추는 이들의 여정은 긴 원을 그린다. Hiruko와 친구들이 코펜하겐에서 시작해 발트해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가 러시아 영토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자 항로를 바꾸어 다시 발트해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은 길고 느린 원에 가깝다. “발트해 동쪽으로 가려면 (코판하겐에서) 남쪽으로 우선 가야해.” 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유영하며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 여정에는 고정된 정체성도 없고 끊임없이 자신이 믿었던 것을 의심하고 버리게 만드는 새로운 경험과 문법이 등장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는 거다. 참다운 나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나를 일깨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런 여행이라면 “Hiruko와 친구들은 응답한다. 더 멀고 높고 깊은 곳을 향하는 일직선적 진보와 확장의 욕망 없이, 따지고 뒤섞고 넘나들고 헝클고 엮으며 사랑과 우정의 세계로 움직이고 옮아 갈 수 있다고.” 말한 윤경희 작가의 평은 이 3부작을 완성하는 훌륭한 문장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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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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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입문 -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메이야수, 하먼, 라뤼엘까지 인생을 바꾸는 철학 Philos 시리즈 19
지바 마사야 지음, 김상운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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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무렵 게이오기주쿠대학 다카쿠와 가즈미 교수의 <철학으로 저항하기>를 읽으며 느낀 것이란, 일본 철학자 내지 사상가만의 갖는 일종의 특징이 있다는 점이었다. 가령 현대철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매우 쉽고 친절하게 철학 사상을 소개하는 경향이라거나,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주장에 강요당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점 등이 그렇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데, 우선 나쁜 점이라고 한다면 뭔가 책을 읽을 때는 친절한 손짓에 이끌려 내용을 아는 것 같지만 책을 덮고 나면 막상 남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책을 뚫고 들려오는 저자만의 박력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반면, 반대로 세밀하고 꼼꼼하면서도 친절한 접근이 일본 철학 사상서가 갖는 장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기질의 차이는 책을 쓰는 입장에서도 묻어나는 것일까?


리츠메이칸대학 지바 마사야 교수가 펴낸 <현대사상 입문>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 삼인방,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과거로는 자크 라캉을 연결시키고 현재로는 20세기 후반 등장한 사변적 실재론을 연결시킨다. 군데군데 일본 작가 특유의 겸손한 자기 업적 소개가 등장하는데 2018년에 현우와 함께 읽었던 <공부의 철학>의 작가라는 점을 알고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꽤 놀라기도 했다. 놀람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7년 전에 <공부의 철학>을 읽고 나서는 크게 남는 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현대사상 입문>을 읽으면서는 포스트 구조주의를 개념의 탈구축, 존재의 탈구축, 사회의 탈구축으로 압축시키며 설명하는 글솜씨가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차이가 비교되어 놀랐던 것 같다. 참고로 1978년생인 지바 마사야 교수가 <공부의 철학> 책을 펴낸 것이 2017년으로 그가 갓 마흔 살이 되었을 때이고, 이번에 <현대사상 입문>을 펴낸 것이 2023년이니 6년 동안 사상의 깊이와 글을 쓰는 힘이 더 갖추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덧붙이게 된다.


두 번째로 놀란 지점은 책 말미에 실린 옮긴이 후기다. 보통 철학 책에 옮긴이의 후기가 실린 것을 본적이 없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단순히 번역 후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바 마사야 교수의 의견을 옹호하거나 보충 의견을 덧붙이는 것을 보고, 옮긴이 김상운은 누구인가 궁금했다. 여기서 잠깐, 시간 순서에 따라 나의 놀람 감정을 서술하자면, 옮긴이 후기를 읽기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변적 실재론, 말라부, 메이야수 등의 이론은 다소 생소하던 차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멀티튜드’라는 개인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외국의 철학 논문 또는 뉴스를 직접 번역해서 포스팅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매월 <월간 멀티튜드>라는 것을 직접 발간하기도 하는데 번역자 김상운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 정도로 그 이름을 기억했는데, 책 말미에 옮긴이 후기를 읽다가 이 책의 번역자 이름을 찾아보니 역시 같은 이름이라는 점을 발견하고는 무척 신기하면서도 옮긴이의 진심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다. (참고로 김상운 번역가는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연구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10년도 훨씬 이전에 현대철학, 포스트구조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2012년의 기록을 살펴보니 나는 기본적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개괄하는 책을 몇 번 읽었고 이어 기본적으로 미학이라는 장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이유로 박정자 상명대학교 명예교수가 펴낸 책을 거의 다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박정자 교수의 정치적인 성향을 나중에 확인하고 기분이 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박정자 저자가 쓴 책의 수준은 높았다고 기억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이력 때문인지 박정자 작가의 책을 읽으며 미셸 푸코와 포스트구조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다음 해인 2013년 봄까지는 이와 관련한 책을 여럿 읽었다. 최근 읽어보려고 했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도 이미 이 시기에 읽었던 모양이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현대사상 입문>에 대한 소감은 저자가 책에서 살짝 언급한, 독서의 방향이랄까 방법이랄까, 그것과 연결해서 마무리하게 된다. 너무 진지하지 않게 그러나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얇은 레이어를 여러 층 깔 듯 그렇게 책을 읽으라고 저자는 말한다. 20대 후반의 나와 40대 초반의 나는 다시 연결되어 포스트구조주의나 현대사상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읽었지만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레이어들을 바탕으로 나는 <현대사상 입문>을 생각보다 꽤 이해하며 읽었다. 라캉의 상상계-상징계-현실계도 칸트의 감성-오성-물자체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것이라는 내용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게 된다. 독서 경험의 레이어를 계속해서 얇게 여러 겹 쌓아나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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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의 노래
싯다르타 무케르지 외 지음 / 까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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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학자이자 칼럼니스트 존 서덜랜드는 그의 책 <문학의 역사(소소의책, 2023)>에서 “우리는 문학에 관한 한 치즈 속의 구더기들” 이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남긴다. 이 구절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문학의 세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문학을 사랑하고 그를 읽는 독자들은 마치 게걸스럽게 치즈를 먹어대는 구더기와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구더기가 치즈를 먹으며 만들어내는 치즈 터널의 모습과 경로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문학을 읽는 것 역시 정해진 하나의 모습과 경로가 있는 것 없이 모두 각자만의 문학 읽기 경험을 쫓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문학을 일반 책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은 무한정 많지만 현실적으로 한 명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유한하며, 결국 각자의 독서 경험은 한정되며 독특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사상을 접목해보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2015년 펴낸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절대적인 하나의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형이상학과,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개별적인 존재만 가능하다고 믿는 구성주의 모두를 비판하며 신실재론을 언급한다. 신실재론 사상 속에서 존재란 “특수한 대상영역 혹은 의미장(Sinnfelder)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떠한 특정 맥락 속에서 하나의 현상이 등장하여 이해될 때 존재라는 것이 여러 의미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손을 높이 들었을 때 몸 이라는 의미장에서 손은 내 신체의 일부이지만, 사회적 저항이라는 의미장에서 손은 무언가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의사 표시 혹은 용기라는 존재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대상 또는 사물은 여러 의미장에서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서라는 치즈 속의 구더기가 만들어내는 책의 통로는 언뜻 보기에는 하나의 단선적인 길로 보이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 길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층적인 여러 길로 나뉘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층적인 의미장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서점에서 책을 분류하는 카테고리다. 인문, 사회과학, 예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장에서 나의 독서 경험, 혹은 그 경험을 하는 주체인 나는 다양한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언급한 의미장이라는 단어를 접하기 전에도 나는 이러한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 존재하는 데 문학적 레이어, 사회학적 레이어, 생물학적 레이어 이 세 가지 종류의 레이어가 나를 정의하며 그 레이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책을 읽어가겠다…… 라고 뒤늦게 생각한 것이 몇 년 전이었다.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싯다르타 무케르지 컬럼비아 의대 교수가 Covid-19를 겪으며 저술한 신작 <세포의 노래(The Song of the Cell)>는, 다층적인 의미장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존재와 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고, 동일한 의미의 종착역을 향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세포에 대해 다룬다. 세포가 무엇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과거부터 현대까지 세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의료인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세포의 비밀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 다양한 책을 읽으며 파편처럼 이해되었던 지식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유레카처럼 느꼈다. 물리학에서 정의하는 기본입자 중 하나인 쿼크에서 시작한다. 업쿼크와 다운쿼크가 모이면 양성자와 중성자가 되고, 그것들이 기본입자 중 하나인 전자와 결합하면 원자가 된다. 다수의 원자는 분자를 구성한다. 그런데 세포의 핵심 구성요소인 세포핵에 들어있는 염색체, 염색체 속의 DNA, DNA를 구성하는 염기는 곧 C,N,O 따위의 원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분자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본입자(쿼크, 전자) - 양성자/중성자 - 원자- 염기(분자) - 뉴클레오타이드 - DNA - 유전자 - 염색체 - 세포 - 조직 - 기관 - 개체(종) – 종속과목강문계…… 이렇게 물리학, 화학, 생물학 또는 생명과학은 연결된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서로 다른 의미장이고, 그들이 조명하는 대상은 서로 다른 의미장에 출현하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대상은 대상끼리 의미장은 의미장끼리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놀라우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지구라는 공간에 종속된 이 대상과 의미장을 우주로 넓히면 어떻게 될까. 종속과문강문계로 대표되는 생물 분류 체계는 지구에 통용되는 것인데 그러한 생명의 존재가 외계에서도 가능한 것인지 1977년 보이저1호 이후 무수히 많은 탐사선이 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우주로 나선 것이다. 지구라는 대상영역에서 존재하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라는 의미가 다른 대상영역에서도 존재 가능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쉽게 말해 모든 과학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러한 연결은 과학에 그치지 않고 철학, 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모든 영역에 걸쳐 서로 연결되고 중첩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횡으로 또는 종으로 서로 병렬하여 정렬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의미장들은 마치 뉴런이 서로 끝없이 연결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서로에게 가지치기를 한다. 이것이 <세포의 노래>가 말하는 첫 번째 연결이다.


<세포의 노래>가 말하는 두 번째 의미의 연결은 책 말미에 그가 마이클 샌델 교수를 언급하면서 등장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은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 펴냄, 20200>에서, 그는 능력은 애초에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고 결함을 메우기 위한 끝없는 경쟁을 지양할 것을 주장한다. 결함이 메우기 위해 경쟁할 때 우리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한계와 우연의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것에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가치를 현대인들은 잊어버리고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싯다르타 무케르지 교수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싯다르타 무케르지 교수는 세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어떻게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여러 질병을 개선하고 그를 극복할 수 있는지 희망의 단초를 세포에서 발견한다. 결함과 결손을 메우는 것은 끝없는 경쟁을 위한 자기 최면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의 삶 측면에서 결함을 메우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장에서 읽힌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 교수와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윤리학이라는 같은 의미장 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에 모든 논의와 의미는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의미장에서 출현하는 다층적인 존재들은 상호 연결될 수 있고, 수없이 많은 연결들은 끝내 하나의 단일한 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단일한 점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이 두 가지 의미의 연결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특별한 한 의미장에서 출현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그토록 다양한 층위의 영역에서의 의미를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마지막 의미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마지막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질문들에 공감하며 흥미를 느끼는지는 알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 <바른 행복>을 읽으며,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으며, 뤼트허르 브레히트의 <휴먼카인드>를 읽으며 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의사결정체계를 존중하는 윤리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그 책들은, 그 책에 담긴 저자의 사상들은 비록 철학, 심리학, 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장에서 출현하여 내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윤리학의 종착점으로 다같이 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대상영역의 다양한 나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수렴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노래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보편적인 노래'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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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애리얼리 부의 감각 - 개정판
댄 애리얼리 외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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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 책을 포함해서 행동경제학을 다룬 책을 그 동안 꾸준히 읽어왔던 것 같다. 처음에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는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세계 경제구조가 운영되는 원리가 학부 때 배운 미시경제와 거시경제의 정밀한 이론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비합리적 본성에 기인한다는 점이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포착한다고 여겨졌다. 이론으로서 경제원론은 경직되었고 행동경제학은 삶의 표면을 따라 유동적으로 흐르는 듯했다.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바로 옆 듀크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댄 애리얼리 교수의 <부의 감각>은 전반적으로 행동경제학의 주요 이론을 경쾌하게 소개하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돈에 대하 어떤 감각을 지녀야 하는지 언급한다. 아마 이 마지막 부분 때문에 자산 증식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은 듯 싶다. 물론 책으로 배운 감각이 본성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거다. 무엇이 합리적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합리적으로 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돈에 대한 감각 또는 돈에 대한 본성이라는 말을 한 단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돈을 버는 것과 관련한 감각, 즉 돈 냄새 맡는 재주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돈이라는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나는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지각하는 재주는 없지만, 후자 관련해서 나름대로 돈에 대해 어디까지는 안달복달하며 끌려가고 또 어느 부분부터는 초연하게 절연하는지 나름의 경계선은 분명 있다.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갖는 돈에 대한 감각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좀 더 궁금한 건 이 감각이라는 것이 과연 후천적으로 변하거나 학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또 지금 우리가 저마다 갖고 있는 돈에 대한 감각은 선천적으로 자라난 환경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주었는지 그런 점도 따로 고민해 볼만하다. 그것이 돈이든 아니면 특정한 사물이든 과도한 집착은 욕망을 부르고 지나친 욕망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점에서 내가 가진 돈에 대한 감각과 관념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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