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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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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시점이지만, 스토너의 내면적인 독백이라고 할만큼 스토너란 인물에 한정된 시각으로 쓰여졌다. 즉 1인칭 시점같은 '제한적'전지적 작가시점의 책이다. 세간의 평가와 달리 나는 이 소설을 매우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특히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런 인물이 각광받는 게 더 꺼림직하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완고하리만큼 원칙적이며 현실에 대해 조금 비껴선 미온적 태도를 가진 스토너란 인물의 시각을 통해서만 그가 부딪히는 인물들과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일견 악마적으로 보이는 이디스나 로맥스, 워커 같은 인물이 실제로는 평범한 선의를 가진 인물들이고, 한편으로 개인적 여건이나 당대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스토너의 성격적 결함때문에 고통받거나 왜곡된 인물이라고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로맥스는 왜 스토너와 달리 워커를 높이 평가했을까? 낭만주의 시인 셀리를 논문주제로 선택한 워커는 자신이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중세나 고대 문법같은 영문학 분야를 낮게 평가했던 것 같다. 워커는 성실성이 부족한 인물이기보다는, 치기어린 젊은 대학원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로맥스는 그를 나름 자기 분야에서는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학생이란 점에서 가능성을 보고 높이 평가했던 것 아닐까?
물론 이후 학과장이 된 로맥스가 스토너를 괴롭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좀 과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대목에서는 워커와 로맥스가 모두 장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좀더 복잡한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형식주의 비평가들의 비평서를 찢어던져버리며 학생들에게 시의 자유정신을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하는 독자들이 로맥스에 대해서는 단순히 악당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은 왜일까? 어떤 관점에서 작품 속 인물이 그려지느냐에 따라 같은 인물도 영웅이 되었다 악당이 되었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영웅과 악당은 한끝차이란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로맥스를 처음 만난 스토너는 젊은날 뛰어난 통찰을 가졌던 가장 유능한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를 떠올리는데, 두사람 캐릭터가 겹쳐질 만큼 비슷한 걸로 나온다. 그래서 로맥스와 갈등의 골이 계속 깊어질 때로차 스토너는 로맥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고 로맥스의 탁월함을 인정한다.
어찌 보면 문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에는 스토너보단 로맥스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너는 그이름처럼 돌처럼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한 인물이다. 물론 스토너와 같은 인물들의 낙숫물같은 묵묵한 성실성이 떠받치고 있는 게 인류사의 대부분일지도 모르겠으나... 한편으론 그런 인물들의 완고함이 그 인류사 속 개인을 옥죄는 고통을 만들어낸 점도 있지 않을까.
스토너가 다른 인물들을 혐오하는 것은, 겉으로 크게 싸우고 대립하진 않지만 소설을 통해 자신의 혐오를 공감하라고 치열하게 합리화해나가는 과정은 오히려 나서서 불같이 화내고 부딪히는 것보다 더 집요한 부정적 힘을 발휘한다.
캐서린과의 사랑도 별로 열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랑이 그저 자신과 전혀 대립할 점이 없는 여성 인격체를 만나 자기애를 표출처럼 밋밋한 독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스토너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안에 갇힌 이기적 존재일수는 있지만 스토너는 더욱 그러한것같다. 삶이 끝없는 타자와의 만남이고,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발견하는 과정임에도 스토너는 아예 자신과 다른 존재와 부딪혀 갈등조차 하려 않는다. 고고한 냉소와 경멸이 더 비겁하고 나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도 죽지 않고 종신교수직을 유지하며 가정도 끝까지 지켜내고 적당히 바람도 피우며 자신의 삶을 지켜낸 인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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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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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시점이지만, 스토너의 내면적인 독백이라고 할만큼 스토너란 인물에 제한적인 전지적 시각으로 쓰여졌다. 세간의 평가와 달리 나는 이 소설을 매우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특히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런 인물이 각광받는 게 과연 좋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완고하리만큼 원칙적이며 현실에 대해 조금 비껴선 미온적 태도를 가진 스토너란 인물의 시각을 통해서만 그가 부딪히는 인물들과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일견 악마적으로 보이는 이디스나 로맥스, 워커 같은 인물이 실제로는 평범한 선의를 가진 인물들이고, 한편으로 개인적 여건이나 당대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스토너의 성격적 결함때문에 고통받거나 왜곡된 인물이라고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로맥스는 왜 스토너와 달리 워커를 높이 평가했을까? 워커같은 경우 자신이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중세나 고대 문법같은 영문학 분야에대해 공부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생각했고, 따라서 워커는 성실성이 부족한 인물이기보다는 아직 젊은 대학원생이라면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치기와 그 나름 어떤 분야에서는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학생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물론 이후 학과장이 된 로맥스가 스토너를 괴롭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건 좀 과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대목에서는 워커와 로맥스가 모두 장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좀더 복잗한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교사가 형식주의 비평가들의 비평서륵 찢고 학생들에게 자유를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하는 독자들이 로맥스에 대해서는 단순히 악당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도 어떤 관점에서 작품 속 인물이 그려지느냐에 따라 같은 인물도 영웅이 되었다 악당이 되었다 할 수 있는 한끝차이란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로맥스를 처음 만난 스토너는 젊은날 뛰어난 통찰을 가졌던 가장 유능한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를 떠올리는데, 로맥스와 갈등의 골이 계속 깊어질 때로차 스토너는 로맥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고 로맥스의 탁월함을 인정한다.
어찌 보면 문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에는 스토너보단 로맥스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스토, 그이름처럼 돌처럼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한 인물이다. 물론 스토너와 같은 인물들의 낙숫물같은 묵묵한 성실성이 떠받치고 있는 게 인류사의 대부분일지도 모르겠으나... 한편으론 그런 인물들의 완고함이 그 인류사 속 개인을 옥죄는 고통을 만들어낸 점도 있지 않을까.
스토너가 다른 인물들을 혐오하는 것은, 겉으로 크게 싸우고 대립하진 않지만 소설을 통해 자신의 혐오를 공감하라고 치열하게 합리화해나가는 과정은 오히려 나서서 불같이 화내고 부딪히는 것보다 더 집요한 부정적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캐서린을 좋아했던 건 그저 자신과 전혀 대립할 점이 없는 여성 인격체를 만나 자기애를 표출한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스토너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안에 갇힌 이기적 존재일수는 있지만 스토너는 더욱 그러한것같아보인다. 아예 자신과 다른 존재와 부딪혀 갈등조차 하려 않는다. 고고한 냉소와 경멸이 더 비겁하고 나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도 죽지 않고 종신교수직을 유지하며 가정도 끝까지 지켜내고 적당히 바람도 피우며 자신의 삶을 지켜낸 인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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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을 위한 백팩 - 모비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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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문제나 내구성이 보완된듯하네요 1kg안되는 엘지그램이라서인지 노트북 수납 불편없고 여름내 잘썼어요 흠이라면 앨리스 흰색이라 옆 비닐부분에 때가타서안지워지네요 ㅜ 겨울용을 하나 더구매할까기웃거리고있습니다 오늘 또 물량폭주로 택배기사사망사고가 있어서 망설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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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를 위한 변명
유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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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어떤 분의 글에서 '담배는 대마초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라는 구절을 봤다. 그 글은 그 분이 담배를 끊는 과정에 대한 실감나는 수필이었다. 그 글을 읽고 '아, 담배는 정말 해롭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 뒤 이 책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마리화나는 당신을 혁명가로 만든다"는 구절과 미국의 배트남전 반대의 히피 이미지가 겹쳐지며,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냥 궁금한 채로 지나갔다.

그리고 올해 문학 수업을 하다가 담배와 대마초에 대한 얘기를 잠깐 했다. 그러자  3,4년 전에 보았던 이 책 광고가 떠오르며, 호기심이 다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데, 이 책은 그저 나의 호기심만 채워준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고, 특히 인간의 편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대마에 관한 여러 역사적 정보였다.  대마는 인류가 재배한 가장 오래된 작물의 하나이며, 19세기까지 세계 무역의 중심에 있었던 작물이고, 대마와 관련된 전쟁도 수 차례 있었다. 19세기까지 종이의 주원료였던 대마는 20세기 미국에서 나무를 이용한 펄프 제지술이 개발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대마라는 작물에 대한 인류의 탄압의 시작이었다.

20세기초까지도 대마초는 인기있는 기호품의 하나였다. 미국 대통령 워싱턴 역시 대마 농장주였고, 마리화나 애용자였으리라 추정된다.이 시기까지 기호품으로서의  마리화나의 인기는 상승했으나  농업과 산업에서는 조금씩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1916년 대마 박피기와 추수기가 발명되고 1938년에는 더욱 뛰어난 자동화 기기가 발명됐다. 이를 계기로 대마산업은 다시 활성화되어 갔으나...

목재 펄프의 석유화학 공정 특허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듀폰사와  미국의 2대 신문왕인 허스트(제지자본의 대주주), 그리고 그들을 고객으로 하고 있었던 멜론은행의 대표 멜론, 그와 결탁한 연방마약관리국 관료에 의해서 악명높은 '마리화나 세금법'을 필두로 하여 마리화나에 대한 의도적인 비방여론 조성(인종적 편견을 부추기는)을 조성하고 마리화나는 급격히 '마약류'로 분류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재 펄프의 경우, 반드시 석유 화학 공정을 거쳐야 하는데, 20세기초에는 몰랐으나 석유화학 기술이야말로 대표적인 환경오염 산업으로 인류 환경의 대재앙을 낳았다. 또 대마는 경작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 훼손하면 복원하는 데 적어도 30년 이상 걸리는 목재와는 다르다. 지금처럼 원목을 계속해서 베어낸다면 아마존 밀림은 170년 후에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등을 내세우며 대마초를 탄압했고, 대마초에 관한 논쟁 뒤에는 왜 항상 혁명과 자유에 대한 담론이 따라오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마리화나가 거의 합법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마약을 사용자'가 아닌 '마약' 자체를 문제 삼는 정책이 미국이나 중국처럼 극단적으로 마약 사용자를 처벌하는 정책보다 훨씬 마약 퇴치에 효과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약초로서의 대마의 효과에 대한 지식도 많이 담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내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자본에 의해 편견이 형성되는 과정,

우선 무엇보다 환경 파괴적인 제지술에 대한 대안으로서 표백할 필요가 없는 대마를 종이의 원료로  하는 것이 인류를 위한 대안이 아닌가 하는 절박한 물음,

그리고 역사를 왕조사나 권력 투쟁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개의 식물을 통해서도 이렇게 깊이 고찰할 수 있다는 관점,

그리고 마약에 대한 법집행을 어떤 시각에서 해야 되는가에 대한 네덜란드 사례의 시사점, 우리 학교도 '흡연자'를 문제 삼지 않고, '흡연' 자체와 싸운다면 학생들이 훨씬 건전하게 학교에 적응하며 금연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이 부분은 관심이 좀 덜하긴 하지만, 유현이 노동의 문제와 연관해서 대마초가 추는 쾌락에 대해 얘기한 부분도 생각배 볼 만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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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 옛이야기를 통해서 본 여성성의 재발견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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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책 읽을 여유가 생겼다. 논술과 관련해서도 아니고, 순전히 읽고 싶어서 읽었는데 자습 감독  서너시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글이 특별히 아주 쉬운 것도 아니었다. 재미있어서라고 해야 하나. 요즘 전문적인 주제를 이렇게 자기 목소리로(즉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필자들이 많이 늘었다.

 

올바른 것, 명분 있는 것을 향해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본 사람들, 기존의 사회적 가치에 고지식할 정도로 충실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더욱 와 닿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잃은 것은 무엇이며, 과연 내가 추구했던 것들이 전부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더더욱.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감탄하고 혼자 웃기도 하면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만난다. 내가 애써 잊어버리려 했고, 스스로 하찮게 여겼던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인류사에 일찍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먼지 쌓인 유물로 혹은 잊혀진 유전자로서만 흩어져 있는 여신의 시대, 어머니 대지인 가이아의 시대를 만나고. 양성성이 살아 숨쉬는 온전한 사회, 온전한 인간을 꿈꾸게 되었다.

 

아프로디테로 표현된 여성성의 생명력, 정면 대결하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여성적 가치를 만나고.

이분법으로 얼룩진 가부장제 경쟁 문화로 상처받고 시들어가는 생명력을 되살리는 여성성의 놀라운 힘을 바라보게 되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상반된 특질을 가진 트릭스터, 권위에 짓눌린 시대에 체면과 권위를 조롱하며 해학과 순발력으로 기존의 가치관을 뒤엎는 매력적인 존재 역시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니 읽어갈수록 이 책은 마치 나 자신인 듯했다. 필자가 원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남녀를 불문하고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있었으되 내가 모른척 버려두었던, 오히려 스스로 짓밟고 억눌러 상처 입혔던 어머니 가이아의 심장이  나의 일부로 찬란히 되살아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재미있는 우화 하나를 옮겨 본다.

 

남성성의 논리와 여성성의 논리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 주는 단순한 우화가 있다. 어느 성인(聖人)이 지구 남반부에 있는 대륙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해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정장을 하고 나와서 성인을 환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감동한 성인은 이들 모두에게 신의 은총을 내렸다.

 그러나 대륙 가까이 다가간 성인은 자신이 은총을 내린 대상이 펭귄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하늘나라에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영혼이 없는 펭귄에게 은총을 내렸으니 이제 펭귄에게도 영혼을 주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쟁점이었다. 논쟁이 끝도 없이 지속되던 중 누군가 테레사 성녀에게 물어 보자고 했다. 성녀는 펭귄에게도 영혼을 주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보다는 조금 작은 걸로

 

이야기 속 성녀의 대답은 단순히 해결책만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심각하게 논쟁했던 문제가 사실은 매우 가볍고 사소한 것임을 지적한다. 불필요한 권위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쾌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주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싸우고 또 싸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우화는 조금만 유연함을 발휘하면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주제들이 사실상 가벼운 해답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제 모든 것을 무겁게 만드는 그들의 엄숙함을 조롱하며 신나는 대안을 더 많이 찾아내고 당당히 추구해 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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