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유전자 - 세계사를 뒤바꾼 문제적 유전자 바로 읽기
정우현 지음 / 이른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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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좋은 독서 경험’에 대해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좋은 독서란 ‘호기심 있는 분야에서 유익한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 정의해 왔는데, 『나쁜 유전자』를 읽으면서는 솔직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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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유익한 정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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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뿌리 깊은 상식, 그러니까 ‘공부 머리 같은 능력은 타고난다(유전된다)’는 믿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어댔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나의 상식이었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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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결국 유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령 책에서는 동성애 여부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태아 시절 산모가 분비한 호르몬 같은 환경 요소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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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 치밀하고 탄탄한 논증을 (사실 조금은 힘겹게..) 따라갔더니, 어느새 내 머릿속엔 ‘유전이 전부인 게 더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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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책장을 덮은 후엔 끝내 ‘너무나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편견이 똬리를 틀었던 곳에 새로운 상식이 뿌리를 내린 셈인데,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연 ‘좋은 독서’였다. 더불어 그동안 내가 찾던 ‘유익한 정보’라는 게 사실은 ‘내 입맛에 맞는 정보’는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으니, 더더욱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이렇게까지 좋은 독서 체험을 안겨주신 저자 선생님(@romanc_grey)께 감사 인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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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읽었던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을 보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정보가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행동』을 먼저 읽은 것이 『나쁜 유전자』의 독서에 깊이를 더해준 것 같다. 벽돌책에 도전할 용기가 있다면 함께 읽어보시길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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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다고 전적으로 ‘환경 결정론’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꼭 밝혀두어야겠다. ‘그래서 얘 결론이 대체 뭐야?’ 싶으신 분들은 아래 인용한 『행동』의 서문 일부를 참고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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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학에, 특히 생물학에 바탕을 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점에 따른 중요한 사실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생물학을 알지 못하고서는 공격성, 경쟁, 협동, 감정이입 등등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를 손톱만큼도 기대할 수 없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논할 때 생물학을 끌어들이는 것이 부적절할뿐더러 이념적으로 수상쩍다고 여기는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못지 않게 중요한 점으로, 둘째, 오직 생물학에만 의존하더라도 똑같은 곤경에 처한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사회과학은 언젠가 ‘진짜’ 과학에 흡수될 운명이라고 믿는 일군의 분자생물학 근본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여러분이 이 책을 다 읽으면, 어떤 행동의 ‘생물학적’ 측면과 이른바 ‘심리학적’ 혹은 ‘문화적’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다.”

➕3️⃣ 발행 버튼을 누르고 나니 못 쓴 이야기가 너무 많이 생각나서 브런치에 다시 한번 긴 서평을 써볼 예정. 서평을 두 번 써도 좋을 책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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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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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 어느 날,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감옥살이를 끝내고 돌아왔다. 하지만 화자이자 딸, 고아리가 훌쩍 자란 어느 날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음 본 남자처럼 낯설었”고(226),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가 아득해졌다는 걸”(226) 깨달았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아버지의 빈자리는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멀어졌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 때문에 할아버지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고, 조카 또한 희망하던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경력이 자신의 앞길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음을 깨달은 딸은 마음에 아버지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했을 뿐이다.


그렇게 딸은 아버지의 세계에 무심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빨치산의 굴레가 무거웠”던 만큼, 굴레를 벗어던질 상상조차 못했을 터였다. 아버지의 배경 때문에 결혼식 하루 전날 혼사가 깨졌을 때도, 결혼이 깨진 덕분에 방 한칸을 마련했다며 “빨치산 부모 덕을 본 적도 있다”고 읊조리는 딸의 모습에서 나는 체념을 엿보았다. 굴레를 벗어난 삶을 더는 꿈꾸지 않겠다는 체념이었다.



딸은 장례식을 찾은 조문객 덕분에 아버지가 남긴 세계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고를 당하면 제 논의 모내기를 제쳐두고 수습에 나섰고,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자퇴한 다문화 가정의 자녀에게 “미국을 이긴 위대한 민족의 후손”이란 위로를 건네며 담배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베트남 전에서 장애를 얻어 공산당을 증오하는 참전 용사와도 술잔을 나눴다. 수감 생활 이후에도 사회주의자로 남았던 그는 사실, 이념의 경계 너머를 바라보고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사람이었다. 딸이 모르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 대화가 (이 서평처럼) 마냥 진지했다면 쉽사리 화해하기 어려웠을 터. 투철한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뜻밖에도 “삶의 방식이 유머”(7)였고, 그는 딸 모르게 유머와 진지함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가끔은 어이 없고, 때때로 폭소를 자아내며, 이따금 감동을 주는 아버지의 세계와 대화를 마친 딸은 그제야 자신이 체념했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딸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225) 그제야 딸은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231)


화해와 함께 마무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다. 이곳에서 어떤 이념은 가져보았던 경험만으로 낙인이 되어버린다. 아버지의 빨치산 활동은 4년에 그쳤지만,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딸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워서 아버지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남한 사회는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아버렸다(252). 그러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부녀의 불화에 관한 이야기이자, 이념을 짓누르는 역사 이야기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도 아버지에게 그랬듯 누군가를 낙인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없애야겠다는 강박이 도리어 우리 모두가 원하는 자유를 짓누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남긴 채 소설은 홀연히 독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수도꼭지라도 튼 듯 쏟아지는 헤픈 눈물이 어쩐지 미덥지 않기도 하였으나 나는 또다시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 황사장 덕분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잠시 놓여나기도 했거니와 어쩌면 진정으로 위로받는 사람은 황사장이 아니라 어머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P24

나중에야 알았다. 그에게 동생이 하나뿐이었다는 걸, 일찍 어머니를 잃어 그가 업어 키운 아들 같은 동생이었다는 걸, 그 동생이 아버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용돈 쥐여주며 귀여워했을 조카였던 셈이다. 그 마음 쌩 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 P28

함박눈 내리던 겨울날이 떠올랐다. 오빠의 마음속에도 그날이 사무치게 남아 있을 터였다. 그날을 마음에 품은 채로 오빠와 나는 멀어지면서 살아온 것이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죄라니! - P81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 P129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 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나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알았을 테고 아버지 방식대로 위로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 P141

어머니의 옛 시동생 가족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습을 나는 어쩐지 처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내 아버지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형수를 빼앗아간 사람만은 아닐 터였다. 형의 친구이고 동지였으며, 운명이 조금만 달랐다면 형과 친구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 P169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 P181

아버지의 시신을 보자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네살 때의 아버지는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다. 일심동체. 아버지의 알몸을 본 섬진강에서 나는 이미 아버지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다. 아버지와 다름을 깨닫고 아버지를 닮고자 서서 오줌을 눌 만큼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다. 그 아버지를 이데올로기가, 국가가 빼앗아간 것이다. - P201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 P225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 P252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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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종 실패기 - 죽을 운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지독한 인간들의 생존 세계사
유진 지음 / 빅피시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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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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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읽었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부산 첨절제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분투를 그린 책이었는데, 전쟁 스펙터클에서 흥분도가 가득 차오른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몇몇 디테일은 아직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이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뿐이었을까. 내 도파민은 얼른 다른 역사책을 찾으라고 부추겼고, 나는 그렇게 역사 블록버스터의 세계로 흠뻑 빠져들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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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지?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태어난 시대와 나라가 이렇게 풍족했던 건 더 나은 내일을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 덕분일텐데, 그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대했던 것이다. 이번에 협찬 받은 『인류 멸종 실패기』를 읽는 내내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런 세상에서 생존해냈다는 게 놀라웠고, 그들을 보지 못했던 내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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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너무 길어서 얼른 책 얘기를 해보면, 『인류 멸종 실패기』는 과거 유럽에 살던 평민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책이다. ‘멸종 실패기’말에서 눈치챈 분도 있겠지만, 그들의 삶은 ‘상상 이상의 열악함’ 그 자체, 아니 그 이상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식품위생법, 공중보건법 위반으로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야 할 일들이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빵에 핀 곰팡이는 갓 돌 지난 유아의 주먹질 수준. 배설물을 처리할 곳이 없어서 길을 향해 뿌리면 그걸 고스란히 맞는다거나, 빵이 먹음직해 보이도록 별별 중금속을 섞어 색과 컬러를 과장했다. 마취도 소독도 없었던 당시의 수술 장면을 소개할 땐, 마치 내 팔을 자르듯 텍스트가 살아 움직였다(끔찍한 묘사만 소개해서 못 읽을 책처럼 비칠까 걱정이 되는데 오해 말아주시길. 저자는 몇몇 끔찍한 장면들을 덜 끔찍하게 중화해내는 훌륭한 필력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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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디테일을 고루 채워주는 『인류 멸종 실패기』는 특히 요즘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었는데(서평단 활동을 신청한 이유이기도 함), 그 이유가 중요하다. 일단 앞서 말했듯 역사엔 ‘스펙터클’ 또는 ‘(정치)드라마’뿐만 아니라, 일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상에서 난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봤는데, 하나는 산소처럼 사방에 널린 풍요가 사실 지극히 예외적 사건이란 점이다. 난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풍요를 갈망할수록 더 깊은 갈등을 낳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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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멸종’이 떠오르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그 시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고, 더 나은 삶을 꿈꿨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후손에게 갚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전쟁에,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변화까지, 암울한 미래만 남은 듯하지만,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꿈을 꿔야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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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사 - 문명의 탄생부터 국제 정세까지 거침없이 내달린다
김도형(별별역사) 지음, 김봉중 감수 / 빅피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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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인지 지정학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와중에 책 출간 시기를 보니 흠.. 책의 관점이 너무 낡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타성에 젖은 서술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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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사생활 - 이토록 게으르고 생각보다 엉뚱한 ㅣ 프린키피아 6
알베르 무케베르 지음, 이정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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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먼저 서평 협업 제안을 받은 책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운명의 과학』을 쓴 한나 크리츨로우의 후속작 『초연결 지능』이었다. 그러나 『초연결 지능』은 이미 배송이 끝난 상태였고, 이대로 협업을 미루고 싶지 않았던 나는 『뇌의 사생활』로 방향을 틀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걸 이렇게 실감해서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뇌의 사생활』을 다 읽은 후에는 그 아쉬움을 깨끗이 털어냈다는 점이 이 서평의 핵심 포인트다.  우리가 지닌 태생적 인지 편향을 두껍지 않은 분량에 말끔하게 정리해놓은 이 책의 특장점 덕분이었다. 『집단 망상』을 읽으면서도 생각했지만, 편향은 거의 모든 인지 과정에 녹아 있으니 겸손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게 이 책에서 얻은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


깨달음이 이 정도였다면 책을 바꿔 받은 아쉬움이 조금 남았겠지만, 『뇌의 사생활』의 저자는 다행히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람의 편향을 분석하고 정리한 책들은 대개 ‘편향 탈출’과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며 마무리하는데, 책은 이 질문과 함께 한 발짝을 더 내딛길 권한다. 그 질문이란 “그 편향을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라는 것이다. 아래 인용문을 참고해보자.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들은 카너먼의 가설(직관을 담당하는 시스템 1, 이성을 담당하는 시스템 2 - 서평작성자 주)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켰고, 뇌가 카너먼이 제시한 이론보다는 덜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증명해주었다. 카너먼의 모형을 반박하는 주요 논거는 해당 모형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 오류라고 부르는 논리 오류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선과 악, 왼쪽과 오른쪽, 뜨거움과 차가움 등 쌍으로 작용하는 것들에 강하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이원 체계는 서로 분명하게 대립하는 한정된 두 가지 현실로 축소하지 않으면 너무 복잡해서 파악하기 힘든 개념에 적용되는 모호성 감소 기제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람의 뇌도 ‘직관 대 고찰’이라는 이분법적 모델로 기능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뇌가 이분법적으로 기능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경험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 『뇌의 사생활』, 56


“사람의 뇌는 이분법적이기보다는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 켜고 끄는 기능만 있는 전등 스위치보다는 단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라디오의 볼륨에 가깝다는 얘기다.”

- 『뇌의 사생활』, 58


얼마 전 이 책과 함께 펼쳐놓고 읽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저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은 감정과 이성에 대응하는 뇌 부위가 따로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허튼 소리”라고 주장하는데, 『뇌의 사생활』의 저자 또한 최신 연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중요한 건, ‘직관 대 이성’ 구도는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웠고 둘 중 하나를 배척할 수는 없다는 게 내 깨달음의 진짜 핵심이었다(평소 죽어라 이성을 강조하는 투자자들조차 성공의 비결로 ‘야수의 심장’을 꼽지 않나).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대체 어쩌라는 거냐?” 싶지 않으실까? “이것(편향)도 안 돼 저것(이성)도 안 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아, 그럼 생각을 하지 말란 거냐?”라는 질문이 귀를 후벼파는 기분이랄까. 이 날카로운 질문에 (책의 결론과는 별개로) 답을 해보자면, 내 대답은 ‘회의주의자가 되자’는 것이다. 먼저 읽은 『집단 망상』의 ‘사고 지연’ 개념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데, 무작정 믿기 전에 딱 한번만 의심을 해보자는 것이다(실제로 이러한 지연이 가짜뉴스에 빠질 확률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급한 대신 아주 잠깐 수용을 미룰 수 있다면, 우리도 마시멜로 실험의 아이들처럼 현명함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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