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현정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은 결국 의외의 반전으로 끝났다. 재미는 있었는데 결국 '저주'라는걸 그대로 남겨놓을 수 밖에 없는건 호러 미스터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학 서적은 어렵다. 우선 독해력의 문제도 있고.. 사실 이론적으로는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 되면 독해력 자체는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시 그와 관련된 분야를 얼마나 공부했느냐와 그동안 얼마나 인문학 쪽의 책을 읽어왔느냐(법학은 사회과학이지만)하는 문제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문용어와 한자어로 뒤범벅이 되어있을 '전공 서적' 수준의 법학 서적은, 고등학생에겐 절대 무리다. 아니, 정확히는 내게는 절대 무리다.

그러다보면 일반인을 위해 쓰여진 책들로 자연 눈이 돌아가게 된다. 대부분 법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친근한 내용을 위주로 써준다. 특히 선호되는 스타일은 역시 스토리텔링이 편한 판례 중심의 책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법이라는게 상당히 사람들과 친근한 편인가 보다. 즐겨 찾는 저자 중 한 명인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과 우리나라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유명 사건의 판례라면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법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겐 꽤나 이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분위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까지는 드물고, 판례를 중심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책 들이 많다. 무조건 판례를 설명하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판례가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한다'라는 형태. 금태섭 변호사의 두 저서 <디케의 눈>과 <확신의 함정> 역시 이러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과연 법이 정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검사에 대해서, 여러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부패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이미지와 묶여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가? 간단히 생각해봐도,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정적으로 검사와 일반인 사이의 엄청난 갭은 이제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검사에게 정의 구현을 요구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들은 기득권층에 머물러있었다. 오히려 우리 개념의 정의에 가까운 것은 변호사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검사는 이미 특권 계층화되었고, 권력화되었으며, 무엇보다 자기들만의 사회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만의 사회에서, 아마도 단편의 조각에 지나지 않을 조금씩의 비리가 흘러나온다. 어쩌면 이미 검사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별개로, 과연 우리의 사법 시스템이 정의로운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가하는 문제도 있다. 비단 사법 시스템 뿐만 아니라, 수천년간 사회를 유지하는 하나의 축이었던 법이, 정말로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떠받들고 있냐는 문제다. 오랫동안 질서 유지와 정의는 비슷한 개념으로 통용되어왔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은 기득권층의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즉, 법은 권력자를 견제하는 역할과 그들의 이익을 챙기는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법은, 분명히 보수적이다.

현대 사회에 와서 법이 더욱 중요해진 것은, 과거에서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인된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가둬서도 안되며, 그들을 죽이거나 또는 모종의 이유로 그들의 성기능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식 선상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문장 앞에 법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잘못한 사람을) 가둬서도 안되며, (살인마를) 죽이거나 또는 (성폭행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성기능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그랬고, 또 올바른 길이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이러한 폭력을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금고 또는 징역, 사형, 거세에 온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문제로 뒤의 2개에는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앞선 것은 우리에게도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진 것이고, 그것이 인권을 제한함으로서 얻는 다수의 이익을 고려해볼 때, 그리고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법의 (이렇게 표현해도 될 지는 모르겠으나) 폭력성과 그 특유의 보수성이 잘못 결합되는 순간, 법은 압제자가 된다. 그리고 사회는 상당한 넌센스에 빠지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혁명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이 아니면, 우리는 사회를 뒤엎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법의 시제는 '현재'여야만 한다. 우리 중 누구도 4.19 혁명에 대해 기물훼손죄를 논하지 않는다. (본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종북 좌빨의 수작이라는) 5.18 광주 민주 항쟁에 대해 누구도 불법 무기 소지죄 따위를 더이상 논하지 않는다. 법의 개선에 이러한 혁명은 분명한 영향을 미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법은 이러한 혁명에게 '필연적으로' 불법을 선고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서, 법은 혁명에 의해 바로잡아지지만, 스스로 그 바로잡힘을 불법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합법의 범주내에서, 법의 개정은 다시 기득권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혁명이라는 불법적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많은 경우 기득권층의 이익을 내려놓게 할 조치를 그 당사자인 기득권층에게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겠지만, 이런 이유를 가지고 법은 나쁜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항상 "법대로 하자"를 외칠 수도 없다. 종종(또는 자주) 법은 진실이 아닌 권력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법 자체의 나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은 장황하지만, 나 역시도 법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고, 지금 우리의 법이 정의로운지 어떤지, 아니라면 정의로운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이러한 생각을, 덮어두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 마지막으로, <확신의 함정>에 나오는 한 소절.

대학 시절 전자공학과를 다니던 친구가 가까운 시일 안에 판사 · 검사 · 변호사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해야 할 요소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바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법률가가 할 일이 없게 된다는 얘기였다. 남의 밥줄이 끊어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아직 개인용PC도 드물던 때라 실감이 나지 않아 반박을 했다. 간단해 보이는 사건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또 똑같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는데 이렇게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무식한 문과 놈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컴퓨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고 제아무리 많은 변수가 있다고 해도 모두 입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
금태섭 변호사는 여기에다 인간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 라고 덧붙였다. 맞는 소리다. 하지만 덧붙여, 단순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법 역시 인간의 일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본다. 법정에서는 모두가 사람이다. 판사도 사람이고, 원고(또는 검사)도 사람이고, 변호인도 사람이고, 피고도 사람이고, 방청객(그리고 있다면 배심원단까지)도 사람이다. 사람의 일을 사람이 재단하고 판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오류가 생기고, 거기에서 법의 부조리함이 나오겠지만, 그렇다면 법을 컴퓨터에게 맞긴 후에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법은 법이다. 이 사람은 나빠, 사형, 이 사람은 이걸 어겼군, 징역, 이렇게 가볍게 판결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사형은 법정 최고형이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사형은 사람을 죽인다"는게 더 중요하다. 아니, 중요해야만 옳다. 법이 정의롭지 못해선 안 될 이유, 나아가 법이 정의의 여부와 무관하게 '컴퓨터적인 사고'의 결과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다.

P.S.) 금태섭 변호사는 법을 좀 더 가깝게 해준다면, 김두식 교수의 글은 법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다르지만, 둘 모두 좋은 저자임에 틀림없다.
 
 


2011. 10. 16
금태섭, <확신의 함정>을 읽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름: 야마다 리사(山田梨沙) 필명: 와타야 리사(綿矢りさ)

생년월일: 1984.2.1 교토출생 (일본)
대표작:



1984년에 태어난 어린 신예 작가로, 처음 문단에 등장하기 전까지 실제로 문학을 전공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아주 독서광이었던듯, 나스 타다모토나 에도가와 란포 등의 작품을 좋아하여 몇번이고 읽었다고. 중학교때는 다나베 세이코의 『言い寄る』등을 반복하여 읽었다고 하지만 무려 연극부 소속[..]이었다. 그녀는 교토시립 무라사키노 고등학교(京 都市立紫野高等学校)에 진학하였으며,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그녀 역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입시에 직면하게 된다. 그녀는 문득 입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 처음으로 쓴 작품이 그녀의 대표작이자 첫 작품인 <인스톨>이다. 국내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의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에 나온내용을 말하자면 이렇다.

 2001년 17살인 여고생 때 입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쓴 <인스톨>이란 소설로 그녀는 제38회 문예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랬던 그녀의 첫 작품 <인스톨>은 그녀조차 생각하기 어려웠던 돌풍을 몰고 왔다. 2001년 일본의 <문예(文藝)>를 통해 공개한 인스톨은 제38회 문예상을 그간 최연소 수상과 타이기록을 기록했다(20년만). 다만 이 기록은 2005년 미나미 나츠(三並夏)의 <헤이세이 머신건즈>에 의하여 갱신된다.1그리고 그녀의 소원대로 2002년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국어국문학과 자기 추천 입학에 성공!

제15회 미시마 유키오 상에도 후보로 올랐지만 심사 의원들의 냉혹한 말을 뒤집어 썼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쟁쟁한 작가들과 경쟁하였기 때문으로, 대부분의 심사의원들은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대단하다는 평가를 했다. 다만 <어리다는것은 메리트이기도 디메리트이기도 하다>라는 표현은, 꽤나 적절했달까. 그녀의 작품에서 구성, 심리묘사 등에는 하자가 없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작품 자체도 어리다라는 평가를 했다.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는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는 장래가 촉망된다, 정도였을까. 계속 지켜보고 싶은 작가 정도로 묘사되었던 것 같다.

그녀는 두번째 작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130회 아쿠타가와상(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을 수상하였다. 무려 최연소 기록. 이 기록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고, 해당 작품은 12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 셀러... 아니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오노 아즈사 기념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3년 반멘에 리얼 길어진 <꿈을 주다>를 단행본으로 내었고, 제26회 교토부 문화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아쿠타가와상 선평에서도 어리다라는 것이 큰 메리트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가 없다. <이물 배제의 메카니즘>이니 뭐니 하는걸 들먹여서 이 쪽 부분은 커버 불가능. excite 쪽에서는 유치할 수 있을 이야기를 끝까지 덮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극찬.

미모 출중에 뛰어난 글솜씨, 거기다 글솜씨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나이로 미디어에 출연했을 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스토커까지 생긴 모양으로, 한동안 고생해서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도 이런 열기는 식지 않아서 대학에 다니면서는 고생했다고 하지만, 2007년에는 처음의 팬싸인회를 가졌다. 그녀의 이런 고생은 그녀의 작품 <꿈을 주다>에도 드러나고 있는 듯, 연예인의 생활을 베이스로 했지만 사실은 어느정도 미디어에 알려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충도 가득 담겨있다.

"쓰고 있는 때는 꿈꾸고 있는 것 같기에, 내 꿈이지만 앞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고. 자신의 자전적인 성향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다는 어조로 말했지만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작가의 의도 자체가 그것은 아니었던 듯. 이번 이야기를 쓰는데 착수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만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S 수능완성 수리영역 미적분과 통계 기본 - 2011
EBS(한국교육방송공사) 엮음 / 한국교육방송공사(중고등)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연계교재니 필수일 수 밖에. 지만, 우선 실전편.. 1회와 그 이후의 난이도 차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이라는 문명을 기반으로 진보해왔다, 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는 인터넷의 탄생과 함께 발생하여, 단방향 통신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쌍방향 통신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하고, 그에 대해 돌아오는 반응에 다시 반응하며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는, 조금 더 진보되고 구체화되어 여러가지 문화 매체 속에서도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썸머워즈>에 나오는 OZ다. 이 OZ는 전세계를 잇는 네트워크, 라는 단순한 범주에서 벗어나 현실의 모든 것을 관리·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이러한 관리적 측면이 아니라, 잘못된 프로그램에 의한 위험성을 보여줬지만, 그런 이야기 뒤에는 역시 《플래티나 데이터》가 다루고 있는 현대 관리통치의 위험성이 존재하고 있다.

작가의 성향상, 《플래티나 데이터》가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내 생각 이상으로 예상 외의 소설을 써오던 사람이다. 사실 정통파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반전과 교묘함에 초점을 둔 것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지만, 그의 소설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지만, 일반인이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런 트릭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이번의 전기환각기(일명 '전환기')도 그랬고, 《사명과 영혼의 경계》도 그랬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를 다루면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

이번 작품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종래의 추리소설이 트릭을 앞세워 탐정놀이의 미로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 등장한 것이 사회파 추리소설인데 범죄의 사회적 동기와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리얼리즘을 담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오근영, 《사명과 영혼의 경계》역자 후기
범죄의 사회적 동기. 과연, 《플래티나 데이터》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래티나 데이터》가 다루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역시 가장 큰 것은 앞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제목에서도 역시 언급한, '관리통치'다. 앞서 말했듯,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이라는 문명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진보의 흐름 위에 있었다. 페이스북과 같은 SNS, 텀블러나 (큰 범주에서의) 트위터를 포함하는 마이크로 블로그, 그리고 티스토리나같은 블로그 서비스나 각종 블로그 툴 등, 현대사회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확대 뒤에는 지배계층의 편이도 포함되어있다. 그러한 내용 역시 이 작품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플래티나 데이터'라는 게 만들어지게 된 이유. 기술이 발달할 수록, 관리와 통제는 편리해진다. 옛날에는 누군가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과 개인간의 이야기라면, 우연히 누구에게 그 말이 들어가지 않는한 잡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꽁꽁 묶어야만 했던 시대가, 바로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가 친구들과 트위터를 통해, 페이스북을 통해 한 이야기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설정하지 않았다면, 검색 엔진을 통해 그러한 대화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설정을 통해 막아두었다고 하더라도, 공권력 하에서 영원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게 자연스러운 현대 사회의 '생리 구조'일지도 모를 일이고.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DNA를 마음대로 조사해서 수사에 사용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어."
"마음대로가 아니지요. 국가 지도자층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니, 허락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의 지시를 받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국가가 본인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적인 데이터를 이용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금조차 제대로 징수할 수 없을걸요."
이야기는 플래티나 데이터를 다룬다. 플래티나 데이터는, 유전자를 통한 조사 시스템으로부터 적발되지 않는, 즉 NOT FOUND라는 메시지를 띄우게 하는(그리고 동시에 잘못된 자료를 주게 하는) 코드가 덧붙여진 데이터다. 그렇다면 그러한 데이터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과학경찰연구소, 아니 경찰청의……."
"좀 더 위에 있는 사람들이겠지.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자네는 완벽한 수사 시스템을 만들려 했지만 너무 완벽하면 곤란해지는 사람도 있는 거야.
수사 시틈에 이 사회에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윗사람'의 동의 덕분이다. 일전에 어디선가, 우리나라의 지문 채취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는 과정에서 지문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그 글의 필자는, 이러한 지문 채취가 전국민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표현했던 바 있다. 이 작품에서 가구라가 내세우는 명분 역시, 결국은 전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우리가 또 다르게 봐야할, 뼈있는 대목이 2대목 있다. 바로 이러한 '관리통치'하에서 국민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은 곧,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현실적으로, 대의민주제에서 국가 지도자층이, (이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여당과 야당이 합심하여 어떠한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국민들의 반발, 시위는 며칠간 눈을 꾹 감고 있으면 어느새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여느 싸움이나 그렇듯,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으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을 지도자층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그렇게 쉽게 시들해지지 않은 지금까지의 수많은 민주화 운동들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국가가 개인의 DNA 정보를 관리한다는 문제를 국민이 용서할 리가 없어."
그러자 가구라는 질렸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죽여 웃었다.
"국민이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이보세요, 아사마 반장님. 국민이 뭘 어쩔 수 있다는 겁니까? 데모를 하건 연설을 하건 정치가들은 자기들이 통과시키고 싶은 법안을 척척 통과시키는데요.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해오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반대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국민들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법안을 통과시키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초기 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황에 익숙해지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에요. 최종적으로는 DNA를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걸요."
"성가신 질문은 아니에요. 이유는 단순해요. 지배를 당할 바에야 지배를 하는 쪽에 서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지배?"
"관리라고 표현해야 이해하기 쉬울까요? 미국에서 처음으로 DNA 프로파일링이 실용화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틀림없이 모든 것이 관리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위조 카드, 가짜 이름, 위조 여권. 어떤 것을 위조해도 의미가 없는 그런 시대. 살아 있는 한, 유전자는 위조할 수 없지요. 그걸 국가에서 관리한다는 것은 인생을 지배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 아닌가요? 자유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대 세력에 서는 쪽이 더 나은 것 아닙니까?"
리사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반대 세력이 국가의 방침을 바꾼 예가 과거에 몇 번이나 있었지요? 국가가 국민의 DNA를 관리한다는 것은 이제 세계적인 흐름이에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지요. 저는 그런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지배하는 쪽에 서기로 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지배하는 쪽에 선다고 해도 관리를 당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그건 잘 알고 있어요. 다만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 배후를 알아두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제게도 책임이 있는 일이니까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국민은 실로 나약하다. 대의 민주제는, 어쩌면 다수의 지배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심지어 운명까지도) 내맡겨야하는 시스템일지도 모를 일. 조금은 극적이게, 조금은 과장되게, 조금은 적나라하게 그런 부분을 들이파버린 것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고 있는가. 과연 우리 사회는 '자유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 사회인가. 우리들만의 자유는 아닌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제외하더라도, 소설 자체도 재밌다. 현대 정치와 맞물려 생각해보면, 조금은 무섭지만. 사실 이것 외에도, 결국 매드사이언티스트같은 전반적인 과학 기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나아가 심리와 인간, 과학과 감정 같은 여러 떡밥(?)을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가볍게 읽기엔 무겁고, 무겁게 읽기엔 너무 가벼운, 뭐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소설 자체도... 솔직히 범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니 워낙에 소설에 개입이 별로 없지 않았나 싶었거든. 뜬금없이 범인이 그렇게 나오다니.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싶기도. :) 에잇 어쩔거야, 이 어정쩡한데다 서평이 아니라 주제를 정해놓고 그냥 쓴 글같은 서평을! 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