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 서적은 어렵다. 우선 독해력의 문제도 있고.. 사실 이론적으로는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 되면 독해력 자체는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시 그와 관련된 분야를 얼마나 공부했느냐와 그동안 얼마나 인문학 쪽의 책을 읽어왔느냐(법학은 사회과학이지만)하는 문제가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문용어와 한자어로 뒤범벅이 되어있을 '전공 서적' 수준의 법학 서적은, 고등학생에겐 절대 무리다. 아니, 정확히는 내게는 절대 무리다.

그러다보면 일반인을 위해 쓰여진 책들로 자연 눈이 돌아가게 된다. 대부분 법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친근한 내용을 위주로 써준다. 특히 선호되는 스타일은 역시 스토리텔링이 편한 판례 중심의 책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법이라는게 상당히 사람들과 친근한 편인가 보다. 즐겨 찾는 저자 중 한 명인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과 우리나라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유명 사건의 판례라면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법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겐 꽤나 이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분위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까지는 드물고, 판례를 중심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책 들이 많다. 무조건 판례를 설명하기 보다는 '이러이러한 판례가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한다'라는 형태. 금태섭 변호사의 두 저서 <디케의 눈>과 <확신의 함정> 역시 이러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과연 법이 정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검사에 대해서, 여러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부패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이미지와 묶여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가? 간단히 생각해봐도,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정적으로 검사와 일반인 사이의 엄청난 갭은 이제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검사에게 정의 구현을 요구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들은 기득권층에 머물러있었다. 오히려 우리 개념의 정의에 가까운 것은 변호사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검사는 이미 특권 계층화되었고, 권력화되었으며, 무엇보다 자기들만의 사회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만의 사회에서, 아마도 단편의 조각에 지나지 않을 조금씩의 비리가 흘러나온다. 어쩌면 이미 검사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별개로, 과연 우리의 사법 시스템이 정의로운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가하는 문제도 있다. 비단 사법 시스템 뿐만 아니라, 수천년간 사회를 유지하는 하나의 축이었던 법이, 정말로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떠받들고 있냐는 문제다. 오랫동안 질서 유지와 정의는 비슷한 개념으로 통용되어왔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은 기득권층의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즉, 법은 권력자를 견제하는 역할과 그들의 이익을 챙기는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법은, 분명히 보수적이다.

현대 사회에 와서 법이 더욱 중요해진 것은, 과거에서 현대로 오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인된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가둬서도 안되며, 그들을 죽이거나 또는 모종의 이유로 그들의 성기능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식 선상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문장 앞에 법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잘못한 사람을) 가둬서도 안되며, (살인마를) 죽이거나 또는 (성폭행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성기능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그랬고, 또 올바른 길이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이러한 폭력을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금고 또는 징역, 사형, 거세에 온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문제로 뒤의 2개에는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앞선 것은 우리에게도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진 것이고, 그것이 인권을 제한함으로서 얻는 다수의 이익을 고려해볼 때, 그리고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법의 (이렇게 표현해도 될 지는 모르겠으나) 폭력성과 그 특유의 보수성이 잘못 결합되는 순간, 법은 압제자가 된다. 그리고 사회는 상당한 넌센스에 빠지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혁명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이 아니면, 우리는 사회를 뒤엎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법의 시제는 '현재'여야만 한다. 우리 중 누구도 4.19 혁명에 대해 기물훼손죄를 논하지 않는다. (본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종북 좌빨의 수작이라는) 5.18 광주 민주 항쟁에 대해 누구도 불법 무기 소지죄 따위를 더이상 논하지 않는다. 법의 개선에 이러한 혁명은 분명한 영향을 미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법은 이러한 혁명에게 '필연적으로' 불법을 선고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서, 법은 혁명에 의해 바로잡아지지만, 스스로 그 바로잡힘을 불법으로 규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합법의 범주내에서, 법의 개정은 다시 기득권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혁명이라는 불법적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많은 경우 기득권층의 이익을 내려놓게 할 조치를 그 당사자인 기득권층에게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겠지만, 이런 이유를 가지고 법은 나쁜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항상 "법대로 하자"를 외칠 수도 없다. 종종(또는 자주) 법은 진실이 아닌 권력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법 자체의 나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은 장황하지만, 나 역시도 법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고, 지금 우리의 법이 정의로운지 어떤지, 아니라면 정의로운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이러한 생각을, 덮어두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 마지막으로, <확신의 함정>에 나오는 한 소절.

대학 시절 전자공학과를 다니던 친구가 가까운 시일 안에 판사 · 검사 · 변호사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해야 할 요소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바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법률가가 할 일이 없게 된다는 얘기였다. 남의 밥줄이 끊어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아직 개인용PC도 드물던 때라 실감이 나지 않아 반박을 했다. 간단해 보이는 사건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또 똑같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는데 이렇게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무식한 문과 놈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컴퓨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고 제아무리 많은 변수가 있다고 해도 모두 입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
금태섭 변호사는 여기에다 인간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 라고 덧붙였다. 맞는 소리다. 하지만 덧붙여, 단순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법 역시 인간의 일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본다. 법정에서는 모두가 사람이다. 판사도 사람이고, 원고(또는 검사)도 사람이고, 변호인도 사람이고, 피고도 사람이고, 방청객(그리고 있다면 배심원단까지)도 사람이다. 사람의 일을 사람이 재단하고 판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오류가 생기고, 거기에서 법의 부조리함이 나오겠지만, 그렇다면 법을 컴퓨터에게 맞긴 후에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법은 법이다. 이 사람은 나빠, 사형, 이 사람은 이걸 어겼군, 징역, 이렇게 가볍게 판결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사형은 법정 최고형이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사형은 사람을 죽인다"는게 더 중요하다. 아니, 중요해야만 옳다. 법이 정의롭지 못해선 안 될 이유, 나아가 법이 정의의 여부와 무관하게 '컴퓨터적인 사고'의 결과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다.

P.S.) 금태섭 변호사는 법을 좀 더 가깝게 해준다면, 김두식 교수의 글은 법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다르지만, 둘 모두 좋은 저자임에 틀림없다.
 
 


2011. 10. 16
금태섭, <확신의 함정>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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