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 & 에드가 모랭 지음, 장소미 옮김 / 푸른숲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 모두 분노할 의무가 있다, 라고 부르짖었던 프랑스의 노투사, 스테판 에셀이, 이버엔 정책 제안서로 돌아왔습니다. <분노하라>가 나쁘게 말하면 선동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을만큼 사람들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책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책 -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이하 <지금 일어나~>)는 그 분노를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해내어야할 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책입니다. 그렇다보니 프랑스의 상황을 기반으로 그려냈던 <분노하라> 이상으로 프랑스의 상황에 맞추어 작성되었고, 우리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도 꽤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대개는 우리나라의 좌파에게도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는 책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경제 위기로 인해 악화되었고, 이 이중의 위기가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로도 다 설명이 안 되는 극우파들의 득세를 가속화했다. 좌파는 그 자체로 위기인 데다, 불만을 해소하는 활로로서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몹시 활기찼던 민중의 힘도 이제는 분산되고 와해되었으며, 만연한 무력감과 체념이 곧 분노의 폭발로 변해버릴 위기에 놓여있다.

──<지금 일어나~> PP.30~31


 

이러한 현실, 즉 경제적 위기 앞에서 좌파는 밀려나고 우파가 득세하며, 좌파는 그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진보 집권 플랜에서 조국 교수이 지적하신 진보 진영의 한계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보수의 위기가 진보의 기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 그건 대안없는 좌파, 즉, 진보 집권 플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의 유능함을 대중에게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한편 민중의 힘이 약화되었다는건 우리 나라에도 직접 대입이 가능한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 정치가 그래도 이 정도는, 하는 한계선을 지키면서, 비록 느린 속도이지만 분명하게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간 원동력, 그건 민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요? 촛불집회 등은 여전히 민중의 힘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힘이 옛날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근간에는 스테판 에셀이 이 책에서 지적한 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확산에 있습니다. 어느 좌파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부정적인 시선을 던집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죠. 스테판 에셀의 이 제안서는, 비교적 현실에 맞추어졌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완전 폐기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전과 세계화가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낳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자연 파괴와 같은 당연한 것부터 비인간화,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 민중의 힘을 약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책은 13개의 주제를 통해 분명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는 상투적이고, 일부는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으며, 일부는 너무 프랑스나 유럽적입니다. 거기다 책의 특성상 내용을 풀어가기 시작하면 그 13개 꼭지를 모두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저는 여기에서 경제체제와 교육이라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렇게 문제의 중심이 되는 세계화와 자본주의, 특히 스테판 에셀과 에드가 모랭은 세계화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완전한 탈세계화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자는 세계화와 탈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현재처럼 경쟁력을 강조하는 산업적 세계화로부터는 탈세계화를 이뤄내고, 동시에 개별 국가가 직접 해결하는게 거의 불가능해진 지구촌의 문제에 대응할 때는 전세계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세계화를 이뤄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자가 자본주의 체제를 수정해나가는 방안응로 제시하는 것들은 주로 이런 것들입니다. 사회투자국가, 복지국가, 환경문제의 고려, 경쟁력의 지양, 금융 투기의 지배 방지. 간단히 요약하자면, 손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이러한 정책의 핵심에는 경제 체제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해야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 이르면 이 책의 결정적인 결점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바로 용어의 문제입니다.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적 정서로 가득한 단어들 뿐만 아니라, 사회 투자 국가나 인지민주주의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저자는 설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각주 역시 이를 이해하기에는 부실하기가 마찬가지. 각주가 조금 더 개념의 설명에 치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리해서 거기에 개념에서 나아가 그러한 시스템의 의의나 예시를 끼워넣으면서 읽는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는거야.. 이게 뭔소린데.."하는 상황이 자꾸 나오게 됩니다.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사람들은 그럴듯한 다른 어떠한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이대로 영원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예 체념을 한다. 사회 민주주의는 최대 적수 앞에서 그저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위에 언급한 인용구는, 현재 좌파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활에는 이미 자본주의가 너무 깊게 파고 들고 있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좌파적 색채가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분위기에서는, 이러한 가운데 대안이랍시고 사회민주주의라도 꺼냈다가는 빨갱이, 이적세력, 종북세력이란 딱지를 받기 딱 좋습니다. 더 웃긴건, 사실 우익들의 논리는 "북한은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회 민주주의도 아니잖아. 그게 사민주의야? 독재지. 근데 너희가 사민주의를 주장하는걸 보니 종북세력인게 틀림이 없구나."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좌파의 약점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사민주의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그 이점보다는 결점이 각인되어있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안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스테판 에셀이 내놓은 것이 복지국가와 사회투자국가의 상보 경제 체제, 복수 경제 체제입니다.

 

이는 복지국가와 사회투자국가를 동시에 추구해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사실 복지국가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이번 진보와 보수의 대립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덕분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회 투자 국가는 그렇지 않죠. 조금 풀어말하자면, 사회 투자 국가는 복지 국가의 범위가 넓어지고 그 형태가 적극적이 된 경우를 말합니다. 즉, 복지국가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사회 투자 국가는 국가만이 투자할 수 있는 단위의 사회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형태의 국가를 의미하죠.

 

복지라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도 인색한 우리 나라가 과연 사회 투자 국가로 나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어야하는 걸까요. 그러고보면 우리나라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요소들이 외국에서는 왜 그게 당연한데? 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요. 가장 큰게 이런 복지와 사회 투자에 관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조금 옆길로 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보수의 오래된 입장들- 선성장 후분배, 파이를 키우자, 그릇에 물을 붓다보면 그게 넘쳐흘러서 밑으로 파급된다,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의 정책 입안자들이 사랑해 마다않는 구미지역들은 이미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보완하기 위해 복지 정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일견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보수의 저 세 주장들은 너무나도 쉽게 반박되어질 수 있습니다.

 

선성장 후분배 - 근데 도대체 분배는 언제하는거야? 너네들의 그 끊임없는 욕심에 정말로 분배를 시작할만한 지점이 있긴 한거야?

파이를 키우자 - 아니 근데 왜 파이가 커지는데 너네가 가져가는 비율도 점점 커지는거야?

그릇에 물을 붓다보면, 그게 넘쳐흘러 밑으로 파급된다 - 아니 그러면 좋게 물만 부으란 말이야. 왜 자꾸 새 그릇을 가져오는건데? 그래서야 넘칠 수가 없잖아. 너네가 무슨 거꾸로 세 번 타는 보일러니? 왜 흘러내리는 물을 다시 부어 담는거야?

 

이러한 사회 투자의 대표적인 예가 청년 창업 자금 대출입니다. 스테판 에셀과 에드가 모랭이 무슨 생각으로 그 부연에 '성공하면 상환해야한다'라는 단서를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저는 성공하든 안하든 상환할 건 상환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사실 이 책이 어느 정도 도를 지키고 있는 책이긴 한데, 조금 무리수를 두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성공하면 상환한다'라는 저 단서죠. 그 말은 거꾸로 실패하면 상환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건데, 이거야 말로 포퓰리즘, 국가 재정 파탄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자의 의도는 청년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는 것에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정책 제안서라는 점에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러한 정책의 한계는, 그들의 대안이 너무 일변도라는 겁니다. 그들의 대안은 크게 3개로 분류되는데, 우선 정책 제안에서 가장 상투적으로 나오는 의식 개혁(계몽적인 의도로 쓰였다고 풀이할 수 있겠지만, 너무 상투적인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위원회 설바로 치(그러나 저는 이러한 위원회가 설치되서 제대로 문제를 해결한 경우를 별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과세 정책이건 말 그대로 한계 덩어리의 정책이죠) 등이 있습니다. 특히 과세 정책에서 저자들이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경쟁력 지양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과세 정책입니다. 저자들은 해외의 값싼 수입품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환경을 악화시키게 되는 국내 기업들이 이러한 경쟁력 배양에 치중하지 않도록, 국산품과 값싼 제품(콕 집어서 중국산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이의 차액을 과세로 해결하자고 말합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거, 왠지 자유 방임주의가 주창되기 직전에의 보호 무역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지 않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저자가 밝히는 탈세계화의 모토에 동의합니다. 세계화보단 지역을 살리고 키우는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역을 살리고 키우는 것의 기본은, 저자가 말했듯이 전세계의 공존을 전제한 세계화에 있습니다. 세계화를 경계해야하는 이유도 사실 강대국의 이기적 태도에 의해서 그 본질이 왜곡되기 때문 아닌가요? 그런데 위의 주장은, 일반적인 산업 발달 단계 중 물량으로 찍어내는 단계에 있는 개도국들을 영원히 빈곤에 머무르게 할 위험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나라가 경험해 봐서 알듯이, 그런 나라가 내수 시장만 챙기면서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위 주장은 어이없다거나 난감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위험한' 종류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곳은 교육입니다. 우리나라의 진보 교육감들의 행보에 제가 자주 제동을 걸면서, 교권과 무너지는 학교의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학생 인권 조례를 너무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저라고 체벌에 찬성하는 체벌 찬성론자이겠습니까. 다만 시간을 두고 도입하자는 거였죠. 그 시간이 뭐였냐면, 최소한 교권과 학생 인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주목할만 합니다. 무너지는 학교 현실과 교권에 대해서 저자는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책 입안자들이 교사들의 능력을 평가해서 능력있는 교사를 배양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그러한 능력은 교사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최소한의 긍지를 느낄 수 있을 때 배양되는 것이고, 그러한 긍지는 무너져가는 교권을 바로잡아야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트위터에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다면, 대개 학생층과 팔로관계가 맺어져 있어서, 교사들에 대한 비판을 자주 보곤 합니다. 조금 막나가는 주장들도 꽤 많은데, 제가 절대 동의할 수 없는게 "교사들이 이상해졌다, 자기 일만 신경쓰고 학생들에게 진정한 교육을 해주지 않는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문장을 뒤집어볼까요. "학생들이 이상해졌다, 자기 일만 신경쓰고 선생님들을 물로 본다". 이게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게 전대원 선생님이 <나의 권리를 말한다>에서 지적한 '성직관과 노동자관의 혼재'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교사에게 경건하고, 무조건 도덕적인, 즉 성직의 태도를 요구하면서 그들의 처우 등에 있어서는 쟤네가 뭔데? 라는 태도를 취하는 겁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죠. 교육의 파행은 한 집단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던 교사들, 지나치게 막나가고 있는 학생들, 이런 여건이 안중에 없는 정책 입안자와 진보 성향 교육감들.. 사실 그들 모두의 문제인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문제는 점점 악화되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서 찾습니다. 우리가 저자의 의견을 잘 생각해봐야하는 이유죠. 정말로 그게 교사의 문제였나? 하는 내용 말입니다.

 

한편 대학 교육에 있어서, 조금 상투적이긴 하지만, 초학제성과 교양 및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역시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입니다. 특히 초학제성에 눈길이 가는데, 이는 별도의 글에서 다뤄보고 싶은 문제이긴 한데, 법학과가 폐지되면서 각 대학에 일었던 '자유(자율)전공학부' 붐의 한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학과와 무관하게 인문학적 기본 소양을 다져야한다는 입장인데,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는(아니, 사실 나온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서야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모두가 사회과학, 아니 '돈 되는 학문'(=경영학 등)에 치중하고 있는 환경에서, 노동자 양성소에서 나아가 실업자 양성소가 되고 있는 대학을 어떻게 부흥시킬 것인가를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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