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등 뒤로 차오른 땀이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매년 이 계절에 찾아오는 열대야는 해를 거듭하면서 더 지독해지는 것 같다. 불면증도 깊어진다. 김은 선풍기 예약 버튼을 누르려다 그만뒀다. 에어컨 없는 8평짜리 원룸은 창문이 딱 하나라 바람 길이 없다. 정체된 공기를 억지로 순환시키기 위해 하루종일 선풍기를 돌리다 보면, 모터는 터질듯이 뜨거워졌다. 핸드폰 액정이 반짝이며 새벽 3시를 알려줬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렇게 오늘도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출근 준비를 하겠지. 잠 못 자는 날들이 쌓이다보면 포기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의사는 순응이나 적응 같은, 집착을 버리라는 말을 던지지만 의학적 조언이 위로를 주진 않는다. 왼쪽 브라 끈 밑으로 땀이 주룩 흐른다. 와이어가 갈비뼈를 지긋이 눌렀다가 몸을 뒤척이면 허공에 뜬다. 거추장한 와이어와 그 틈 사이의 뜬 공간 같은 어중간한 존재. 너무 어중간해서 갖다 붙일 이름조차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김은 밀어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봐 이 자식아”
“너 내가 유통기한 지난 우유라고 시방 무시하냐?”
김은 눈을 꿈뻑이며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잠자코 서있었다. 잠을 하도 못 자다 보니 이제 꿈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는구나.
“야 너 꼴아 보면 다냐? 이 몸 식는다. 문 곱게 닫고 쳐 자라”
“말 곱게 하세요. 초면에.”
손잡이를 움켜쥔 오른손에 힘을 주면서 내뱉었다. 무슨 정신으로 받아쳤는지 모르겠다. 다만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냉기 덕에 가슴 한 켠이 시원해진 기분이다.
“얼씨구? 가게 주인한테 속아서 산 이 몸을 환불 요구도 못 하길래 숙맥인 줄 알았더니 것도 아니네?”
“… 어쩐지 그 인간 우유를 내 쪽으로 밀더라니 역시”
“뭐 그런거지. 인간사 자체가 약하면 사기 쳐도 된다는 불문율로 굴러가지 않던가.”
“정확하겐, ‘나에게도 갑질 할 기회만 달라’겠지요.”
“그래. 결론은 니가 얕보였다는 거야.”
유통기한 지난 우유가 김을 바라보면서 깔깔 거렸다. 김은 당장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바닥에 패대기 치고 싶었지만, 야밤에 방바닥 청소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는 꿈을 빌미로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당신 냉장고에서 끌어낼 거에요”
“뭣?”
“어제 오늘 시원한 냉장고에 누워서 빈둥거린 게 당신의 일과였겠죠. 하지만 나는 당신이 쓴 전기세 번다고 에어컨도 안 틀어주는 사무실에서 갈렸어요. 적반하장은 이럴 경우 쓰라고 있는 말이겠죠. 지금까진 냉장고에서 냉기를 쏘며 지냈겠지만, 책상 위에 올려두면 어떨까요. 이 방은 아주 더워요. 그리고 선풍기는 제 껍니다. 당신은 책상 위에서 이 뜨거운 열기를 면마다 고루 받으면서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겠죠. 하지만 초반에는 당신 온도가 이 방 온도보다 낮아서 곽 표면에 물방울이 맺힐 거에요. 아무리 우유곽에 방수필름이 붙어 있다고 해도 땀이 차서 흘러내리는 축축한 느낌. 당신도 느껴보세요.”
“야이XRDGSDJFIOJSJOOFJJSOJD~!!!"
김은 아름다운 욕을 속사포로 쏟아내는 우유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우유는 비명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그 자체가 몸을 흔들진 않았다. 그래서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더 현실적인 장면으로 느껴졌다.
2차 건강검진 통지서를 펼치고 그 위에 우유를 올려뒀다. 김은 책상 아래 철푸덕 앉고는 선풍기를 틀어서 바람을 얼굴로 돌렸다. 땀에 젖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가 싶더니, 얼굴에 챨쌱 붙어버렸다. 김은 눈을 감고 선풍기 바람에 흔들리는 손눈썹을 느끼며 그대로 묵묵히 바람을 맞았다.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소리에 우유가 뱉어 낸 욕도 파묻히는 듯 싶었다.
“이봐 냉장고 주인. 선풍기 좀 같이 쐽시다요.”
“흥입니다.”
“아 뭐 서른 넘어서 유치하게 이러지 말고 선풍기 같이 쐬자니까요.”
“말 곱게 해도 돌려줄까 말까에요. 계속 그렇게 자극해도 얻을 건 없습니다.”
“아씨. 야. 나 꿈 아니라고. 니가 하는 말 다 들어줄테니까 선풍기 좀 돌려봐라 진짜.”
김은 입술을 옴싹 거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회전 버튼을 꾹 누른 뒤 입을 뗐다.
“저도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에요. 고집스럽게 높임말을 쓰고 있지만, 그게 당신을 존중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체면을 차리고 싶은 까닭이에요. 물론 당신 말고 나 자신에게. 이것 만큼은 제가 스스로에게 내가 어느 정도 급이라는 최면을 걸고 싶어서예요.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고 그렇게 평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제가 바라는 수준이 있고 그 수준이 지향하는 개인적 목표와 다짐도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는 게 자존심과도 같아요. 당신은 처음 보는 저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비속어를 날렸지만, 그게 친근감의 표시는 아니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런 당신을 높임말로 응수하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선을 그었어요. 아무리 제가 유통기한 지난 우유 환불 요구도 못하는 소심하고 맹한 사람이라도 당신처럼 글러먹은 수준은 아니라고. 난 당신보다 높은 등급이라고. 그렇게 어줍잖은 엘리트 의식을 내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경멸을 표현하는 덴, 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구분해서 언어 표현으로 분명한 계층을 나눠버릴 수도 있어요. 어떤 면으로 이렇게 우월 의식을 표현하는 게 더 저급한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 결론이 뭐야?”
“반말하지 말라고요. 기분 나쁩니다.”
“싫은데? 너도 그냥 반말하면 되잖아. 새벽에 땀 뻘뻘 흘리면서 잠도 못자는 사람이 무슨 예의를 차린다고 자존심이고 등급이야. 워낙 어중간해서 이름도 없는 존재는 서로 간에 지금보다는 더 편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편하다는 게 예의를 글러먹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겁니다.”
“그 예의란 놈은 서로 간에 합의를 하면 허들을 낮출 수는 있을텐데.”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그러게 그런 사이가 되려고 지금 말 걸고 있잖아. 아 짜증. 너 엄청 꽉 막혔구나.”
김은 양반다리를 풀고 벌떡 일어나서 우유곽 머리를 눌러 입구를 찢었다. 찰랑 거리는 하얀 액체를, 미지근하게 걸쭉한 그 액체를 목구멍에 탁 털어 넣었다. 외곽에 송글송글 맺혔던 물방울들은 경사로를 따라 또르륵 흘러 그대로 김의 얼굴로 떨어졌다. 김은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진 물방울을 맞으면서 곧 해가 뜨겠구나. 기어이 밤을 새는구나. 허무감을 느꼈다. 밤을 지새는 날은 전구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에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망상을 펼치기 일수다. 그런데 오늘은 모르겠다. 상상인지 아니면 꿈인지. 혹은 현실인지. 아무렴 어떨까 싶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 물줄기를 묵묵히 맞고 섰다가 외쳤다.
“아오 신발. 유통기한 지난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