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결정의 엣센스 - 쿠바 미사일 사태와 세계핵전쟁의 위기
그레이엄 앨리슨.필립 젤리코 지음, 김태현 옮김 / 모음북스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나라에서는 박정희가 막 집권한 이후였고 경제개발이다 뭐다 하는 통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 그리고 지금도 별 관심이 없지만 -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역사상 인류가 대규모 핵전쟁에 가장 근접한 순간이었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의 양 중심축이 직접 충돌할 뻔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요건 여담이지만, 요새 미국 정권을 분석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말도 이 때 처음 사용된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의 위기에 대해서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당시 상황을 다룬 '13Days'라는 케빈코스트너 주연의 영화도 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출시된 바 있다. [흥행실적은 그저 그랬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위기를 영화보다도 훨씬 재미있게, 그리고 훨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영화 역시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상당히 애써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를 둘러싼 상황은 보다 복잡했다. 저자들이 두터운 장막을 걷어 보여준 당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일반적인 분석이 가정하는 '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수행' 이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함을 부여준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은 미사일이 있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이 어떠한 위장도 없이 미사일 발사시설을 건설하고 있었고, [이것은 소련군의 실수였는데, 이 때문에 백악관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중장거리 미사일이 쿠바로 이미 반입된 이후에도 백악관의 대통령과 참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중장거리 미사일 반입을 위한 봉쇄안을 선택했다. 흐루시초프의 전략과 명령은 혼잡스러웠고, 케네디는 수많은 참모와 장성들의 조언 속에서 혼란스러워 했다. 저자들이 밝혀낸 사건의 보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나면, 당시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당시 사건을 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상황을 다룬 자료들이 양호한 상태로 잘 보관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다양한 회고록과 회의 기록, 심지어는 당시 회의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까지 입수하여 연구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정치의 기록 문화에 있어 많은 점을 시사한다. 한국의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기록의 절대적인 부족 문제를 호소한다. 연구에 참고할 만한 기록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존재하는 기록들조차 공개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협상 및 정책 결정을 담당했던 이들의 신뢰할 만한 회고록 역시 거의 부재한 상황이고, 출간되는 회고록들 조차 소위 '누군가를 배려한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많은 부분을 감추기 일쑤이다. 이러한 빈약한 기록 문화는 과거 정책에 대한 연구와 반성을 힘들게 하고, 이전의 실수를 이후에도 되풀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중요한 자료들에 보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국의 학자들이 한국의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쓰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상황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분석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들이 사용한 3가지 개념적인 모델들이다. '합리적 행위자 모델'과 '조직 행태 모델', '정치적 의사 결정 모델'의 3가지 모델은 중첩되는 동시에 서로 다른 부분들을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당시 정책 결정과정을 보다 분명하고 세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했다. 이 3가지 모델은 초판이 발행된 이래 이후 수많은 연구에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지금의 국제정치 및 외교정책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본다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북핵 문제의 분석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왜 북한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개수에 대한 미국 CIA와 국방성, 국무부의 조사결과가 다른 것인지, 북한의 입장발표는 왜 그렇게 변덕스러운지, 왜 그렇게 6자회담은 지지부진한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참신한 책을 소개하는 것 같은 글이 되었지만, 사실 이 책은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책이고[들어보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다.], 특히 외교정책의 결정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이 책이 초판이 출판된지 30년도 되지 않아서 한 분야의 고전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만큼 가치있는 책이고, 그렇기에 김태현 선생님의 공들인 번역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다만 critical task를 '치명적 과제'로 옮긴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리고 왜 원서에 나온 도표들은 다 번역본에서 누락된 것일까. 어째서일까..]
어찌되었든, 아마도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몇몇 소수 학자들의 책장에나 꽂히게 되겠지만, 이 책은 보다 널리 읽힐 필요가 있다. 역자 서문에서 나왔던 것처럼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이 읽어야 할 것이고, 북핵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를 보도하는 기자들이 꼭 읽어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일본신문의 분석기사를 인용할 때는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또한 장래 외교관을 꿈꾸는 소년 소녀들 역시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하며,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이 어떻게 '외교'를 하는지 궁금한 모든 국민들에게 추천한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또 재미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