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담금질, 파일럿 피쉬.

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책 제목인 '파일럿 피쉬'란.
완벽한 수족관 생태계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수족관의 진짜 주인인 물고기들을 위해 수조의 건강한 첫 환경을 만들기 위해 쓰여지는, 그리고 자신의 소임을 다한 뒤 생을 마감하는 슬픈 운명의 물고기들..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기억에 대해 새삼스런 이야기를 들춰내는 모리모토에 이어.
한밤중에 걸려온 옛 연인의 전화 한 통.
헤어진지 19년이나 지났지만. '알겠어?'라는 한 마디에 바로 그녀임을 알아듣는 내 귀의 기억들.
그녀가 싫어했던 일들은 아직도 하지 않는, 그녀에 대한 내 몸의 기억들.
그렇게 그녀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나, 야마자키.

기억이란. 그렇게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또한. 나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줄 것이다.
과거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금의 나를 만들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내 모습에 좋든 싫든 영향을 주게 된다.
유키고와 와타나베가 지금의 야마자키의 삶에 영향을 미쳤듯이 말이다.

수조라는 제한된 환경에 있는 물고기들과 파일럿 피쉬와의 관계처럼.
우리의 현재도, 과거의 인연과 추억과 관계들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나에게 파일럿 피쉬와 같은 존재가 된다. 

수조의 맑음처럼 맑았던 과거의 사랑과 
에로잡지라는 예사롭지 않은 주인공의 직장처럼 평범치 않은 현재의 사랑 속에
자신의 소임을 다한 뒤 버려지는 파일럿 피쉬의 슬픈 운명처럼 약간의 쓸쓸함이 스며있는 이야기.
내게 이 책 <파일럿 피쉬>는 그런 느낌이었다.

" 네가 설령 내 앞에서 사라진다 해도 둘이서 지냈던 날들의 기억은 남아.
그 기억이 내 안에 있는 한 나는 그 기억 속의 너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게 돼.
물론 유키코 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와타나베씨,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지내온 시간은 기억의 집합체가 되어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러니까 유키코, 나는 너와 헤어지지 않은 거야. 그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 아닐까.
한 번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어.. "

  - 19년 만에 만난 유키코와 대화하는 야마자키의 말 中